100년 가업 거창 유기장인 이혁(04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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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04-21 16:06 조회16,90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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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상한 청년의 구슬땀
‘100년 가업’ 역사를잇는다
봄기운이 서서히 감도는 거창시외버스터미널로 마중 나온 이혁(04 기계) 동문을 처음 만났을 땐 군 제대 후 갓 복학한 학생이거나 대학원 학생인줄 알았다. 아직은 앳된 모습, 백면서생 같은 곱상한 그가 유명한 거창유기공방의 장인일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공방 사무실에서 마주앉아 유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공방 이곳저곳을 돌며 작업 공정에 대해 설명할 때 그는 더 이상 곱상한 청년이 아니었다. 어엿한 유기장이었다.
30대 초반 유기 장인
아직 30대 초반인 이혁 동문은 어쩌다가 유기 장인이 되었을까.
“집안에서 내려온 가업이고 언젠가는 내려와서 가업을 잇겠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그 시기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요. 적어도 40세까지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려고 했었거든요.”
그의 이러한 계획을 바꿔놓은 건 부친의 건강 문제와 거창유기를 둘러싼 여러 환경 변화 때문이었다. 유기의 장점이 알려지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면서 일부 부도덕한 공방들이 소비자들을 속이는 일이 늘어나기 시작하자 힘들게 쌓아온 유기 전통이 무너질까 우려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다급해진 이혁 동문은 이왕 할 거 하루라도 빨리 내려와야겠다는 생각에 결혼한 지 2개월 만에 초등학교 교사인 부인을 서울에 두고 2015년 혼자 거창으로 내려왔다. 그때부터 1주일의 반은 거창에서 반은 서울에서 지낸다. 서울은 그의 신혼집이 있는 곳이자 그가 운영하는 서울 직영점 ‘놋전’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송파구 오금동에 위치한 ‘놋전’은 서울, 경기지역의 고객들이 직접 와서 보고 구입할 수 있는 전시장 겸 판매장 이다. 인터넷으로 주문도 가능하지만 수제 유기제품이라 가격이 만만치 않은데다 주로 선물용이나 혼수용으로 많이 구입하기 때문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아들에 대해 부친인 이기홍 씨는 한편으로는 마음 든든해하면서도 또 한구석엔 미안함이 남는다. 신혼부부를 주말부부로 만든 데다 서울에서 한창 직장생활에 재미 느낄 젊은이를 시골로 끌어내린 것 같아서다. 거창으로 내려오기 전 이혁 동문은 자동차 부품회사인 만도에서 테스트 업무를 맡아 해외 근무가 잦았다. 이 동문이 지금도 신나게 보낸 시절로 기억되는 직장생활을 미련 없이 접게 했던 것은 100년을 바라보는 가업 승계라는 무거운 책임감이었다.
<거창유기공방 전시실>
방짜유기란 전통 합금법을 의미
유기는 살균 및 소독력이 뛰어나 음식을 담으면 대장균과 비브리오균이 99% 이상 죽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보온과 보냉 기능이 탁월해 음식을 담으면 음식과 어울리는 제 온도에 맞게 식사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유기(鍮器)라고 하면 놋그릇을 말하는데 예로부터 유기그릇은 대개 쇳물을 틀에 부어 만드는 ‘주물유기’ 입니다. ‘방짜유기’란 단지 두드려 만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리 한 근(600g)에 주석 넉 냥 닷 돈(167g)을 정확히 합금한 전통 합금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놋제품은 제품의 특성에 따라 제작방식과 재료를 달리하는데 징이나 꽹과리, 양푼, 대야 등 소리를 필요로하는 제품이나 무거운 중량을 해결하기 위한 제품들이 두드려 만들어졌으며 그 외는 대부분 주조방식으로 만들어져 왔습니다. 특히 소형인 밥그릇 등은 망치로 두드려 만든다는 것이 불가능해 프레스 등으로 찍어 만듭니다. 요즘 두드려 만들었다고 하는 제품들은 대부분 헤라시보리, 프레스 등의 기계를 이용하여 만들어지고 있는데 마치 두드려 늘려서 만든 제품만이 전통이고 옳은 제품이라고 오해를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손으로 두드려 만든 제품은 똑같은 제품이나 요철 모양의 제품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누구 작품이라고 선전하는 것 역시 제작 현장을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들 옆에서 부친 이기홍 유기장이 거들었다.
<(왼쪽 부터)이혁(04 기계) 동문과 부친 이기홍 유기장>
1924년부터 시작한 거창유기공방
이혁 동문의 가업인 거창유기공방의 역사는 192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故김석이 옹이 거창에 주물유기 공방을 개설하여 운영해오다가 이 동문의 조부인 이현호 옹이 문하생으로 입문하여 공방을 승계한다. 이후 1980년에 부친인 이기홍 씨가 승계하여 운영하다가 2015년 이혁 동문이 4대 승계를 시작했다. 이제 그의 손으로 가업 100년 역사를 준비하고 있는 셈이다.
가업을 잇겠다고 거창에 내려온 지 올해로 3년째. 지난 2년간의 유기장 생활은 어땠을까.
“유기장으로서 공방에서 일하고 배우는 것은 물론, 15명의 직원들 생계를 책임지는 경영자로서 사무실 업무 프로세스도 개선하고, 마케팅과 홍보도 해야 하고, 시장 흐름에 맞는 신제품과 디자인도 기획해야 하고, 국가 지원 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2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어요. 어릴 때부터 보아온 가업이었지만 막상 제가 직접 해보니 거창유기공방의 오늘이 있기까지 아버님께서 엄청 고생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굴곡 속에서도 전통을 지켜 오신 할아버님, 아버님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그분들께서 고생하며 닦아놓으신 길에 제가 서있는데 잘 해낼지 걱정입니다.”
여러 차례 위기 속 100년 역사 준비
거창유기공방은 일제시대에 유기제품 공출과 제작금지령으로, 6.25 전쟁으로, 60년대와 70년대엔 연탄사용 및 스테인리스와 멜라민 등 가벼운 식기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아 공방이 폐쇄되었던 적은 있지만 유기제작에는 손을 놓지 않아 결국 살아남았다. 이혁 동문의 부친 이기홍 씨는 “먹고 살기 위해서, 배운 게 이거라서”라고 거들었지만 사명감 없인 힘든 일이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거창지역엔 13곳의 유기 공방이 있었지만 모두 없어지고 이곳만 남아 거창유기의 맥을 이은것이다. 지금은 거창읍내에 4곳이 있다고 한다.
그런 노력이 열매를 맺어 거창유기공방은 1991년부터 2014년까지 23년간 한해도 거름 없이 경남과 전국공예품경진대회에서 수상했고, 중소기업청으로부터 ‘제1회 명문장수기업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경상남도 탄생 100주년을 맞아 경남 상징 문물 100종이 담긴 타임캡슐에도 거창유기공방의 제품이 들어가 있다. 영화 ‘음란서생’과 TV 드라마 ‘왕과 나’의 주요 세트 배경인 유기제품도 이곳의 제품이다. 뿐만 아니라 부친 이기홍 씨는 지난 2003년 전국공예품경진대회에서 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한 짱짱한 실력자다. 이런 배경은 이혁 동문에겐 자랑스러운 가업의 역사이자 넘어서야할 장벽이다.
<이혁 동문의 유기 작품과 상장>
첫 작품으로 대한민국공예품대전 특선 수상
그러나 호랑이의 새끼는 호랑이다. 부친이 아직 멀었다고 아직 안된다고 하는데도 그는 기어이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선보였다. 그의 첫 작품인 놋그릇 표면에 문양을 넣어 옻칠한 유화(鍮畵)는 지난해 6월 ‘제46회 경상남도 공예품대전’에서 은상(대한민국공예품대전에서 특선)을 받았다. 놋그릇에 옻칠을 한다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점수를 얻었다. 자신의 능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어엿한 거창유기 장인이 된 것이다. 그는 이의 특허출원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워낙 유명한 유기장을 부친으로 둔 까닭에 이 정도로는 어림없는 모양이다. 아버지의 꿈은 ‘유기를 본 차이나를 능가하는 세계적인 그릇으로 키우는 것’이라는데 그의 꿈은 ‘2년 내에 부친이 공방 일에서 손 떼게 하는 것’이라 한다. 부친의 꿈이 곧 그의 꿈이 될 모양이다. 곱상하고 앳된 얼굴이지만 눈매가 야무진 젊은이다.
‘100년 가업’ 역사를잇는다
봄기운이 서서히 감도는 거창시외버스터미널로 마중 나온 이혁(04 기계) 동문을 처음 만났을 땐 군 제대 후 갓 복학한 학생이거나 대학원 학생인줄 알았다. 아직은 앳된 모습, 백면서생 같은 곱상한 그가 유명한 거창유기공방의 장인일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공방 사무실에서 마주앉아 유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공방 이곳저곳을 돌며 작업 공정에 대해 설명할 때 그는 더 이상 곱상한 청년이 아니었다. 어엿한 유기장이었다.
30대 초반 유기 장인
아직 30대 초반인 이혁 동문은 어쩌다가 유기 장인이 되었을까.
“집안에서 내려온 가업이고 언젠가는 내려와서 가업을 잇겠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그 시기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요. 적어도 40세까지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려고 했었거든요.”
그의 이러한 계획을 바꿔놓은 건 부친의 건강 문제와 거창유기를 둘러싼 여러 환경 변화 때문이었다. 유기의 장점이 알려지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면서 일부 부도덕한 공방들이 소비자들을 속이는 일이 늘어나기 시작하자 힘들게 쌓아온 유기 전통이 무너질까 우려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다급해진 이혁 동문은 이왕 할 거 하루라도 빨리 내려와야겠다는 생각에 결혼한 지 2개월 만에 초등학교 교사인 부인을 서울에 두고 2015년 혼자 거창으로 내려왔다. 그때부터 1주일의 반은 거창에서 반은 서울에서 지낸다. 서울은 그의 신혼집이 있는 곳이자 그가 운영하는 서울 직영점 ‘놋전’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송파구 오금동에 위치한 ‘놋전’은 서울, 경기지역의 고객들이 직접 와서 보고 구입할 수 있는 전시장 겸 판매장 이다. 인터넷으로 주문도 가능하지만 수제 유기제품이라 가격이 만만치 않은데다 주로 선물용이나 혼수용으로 많이 구입하기 때문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아들에 대해 부친인 이기홍 씨는 한편으로는 마음 든든해하면서도 또 한구석엔 미안함이 남는다. 신혼부부를 주말부부로 만든 데다 서울에서 한창 직장생활에 재미 느낄 젊은이를 시골로 끌어내린 것 같아서다. 거창으로 내려오기 전 이혁 동문은 자동차 부품회사인 만도에서 테스트 업무를 맡아 해외 근무가 잦았다. 이 동문이 지금도 신나게 보낸 시절로 기억되는 직장생활을 미련 없이 접게 했던 것은 100년을 바라보는 가업 승계라는 무거운 책임감이었다.
<거창유기공방 전시실>
방짜유기란 전통 합금법을 의미
유기는 살균 및 소독력이 뛰어나 음식을 담으면 대장균과 비브리오균이 99% 이상 죽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보온과 보냉 기능이 탁월해 음식을 담으면 음식과 어울리는 제 온도에 맞게 식사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유기(鍮器)라고 하면 놋그릇을 말하는데 예로부터 유기그릇은 대개 쇳물을 틀에 부어 만드는 ‘주물유기’ 입니다. ‘방짜유기’란 단지 두드려 만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리 한 근(600g)에 주석 넉 냥 닷 돈(167g)을 정확히 합금한 전통 합금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놋제품은 제품의 특성에 따라 제작방식과 재료를 달리하는데 징이나 꽹과리, 양푼, 대야 등 소리를 필요로하는 제품이나 무거운 중량을 해결하기 위한 제품들이 두드려 만들어졌으며 그 외는 대부분 주조방식으로 만들어져 왔습니다. 특히 소형인 밥그릇 등은 망치로 두드려 만든다는 것이 불가능해 프레스 등으로 찍어 만듭니다. 요즘 두드려 만들었다고 하는 제품들은 대부분 헤라시보리, 프레스 등의 기계를 이용하여 만들어지고 있는데 마치 두드려 늘려서 만든 제품만이 전통이고 옳은 제품이라고 오해를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손으로 두드려 만든 제품은 똑같은 제품이나 요철 모양의 제품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누구 작품이라고 선전하는 것 역시 제작 현장을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들 옆에서 부친 이기홍 유기장이 거들었다.
<(왼쪽 부터)이혁(04 기계) 동문과 부친 이기홍 유기장>
1924년부터 시작한 거창유기공방
이혁 동문의 가업인 거창유기공방의 역사는 192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故김석이 옹이 거창에 주물유기 공방을 개설하여 운영해오다가 이 동문의 조부인 이현호 옹이 문하생으로 입문하여 공방을 승계한다. 이후 1980년에 부친인 이기홍 씨가 승계하여 운영하다가 2015년 이혁 동문이 4대 승계를 시작했다. 이제 그의 손으로 가업 100년 역사를 준비하고 있는 셈이다.
가업을 잇겠다고 거창에 내려온 지 올해로 3년째. 지난 2년간의 유기장 생활은 어땠을까.
“유기장으로서 공방에서 일하고 배우는 것은 물론, 15명의 직원들 생계를 책임지는 경영자로서 사무실 업무 프로세스도 개선하고, 마케팅과 홍보도 해야 하고, 시장 흐름에 맞는 신제품과 디자인도 기획해야 하고, 국가 지원 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2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어요. 어릴 때부터 보아온 가업이었지만 막상 제가 직접 해보니 거창유기공방의 오늘이 있기까지 아버님께서 엄청 고생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굴곡 속에서도 전통을 지켜 오신 할아버님, 아버님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그분들께서 고생하며 닦아놓으신 길에 제가 서있는데 잘 해낼지 걱정입니다.”
여러 차례 위기 속 100년 역사 준비
거창유기공방은 일제시대에 유기제품 공출과 제작금지령으로, 6.25 전쟁으로, 60년대와 70년대엔 연탄사용 및 스테인리스와 멜라민 등 가벼운 식기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아 공방이 폐쇄되었던 적은 있지만 유기제작에는 손을 놓지 않아 결국 살아남았다. 이혁 동문의 부친 이기홍 씨는 “먹고 살기 위해서, 배운 게 이거라서”라고 거들었지만 사명감 없인 힘든 일이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거창지역엔 13곳의 유기 공방이 있었지만 모두 없어지고 이곳만 남아 거창유기의 맥을 이은것이다. 지금은 거창읍내에 4곳이 있다고 한다.
그런 노력이 열매를 맺어 거창유기공방은 1991년부터 2014년까지 23년간 한해도 거름 없이 경남과 전국공예품경진대회에서 수상했고, 중소기업청으로부터 ‘제1회 명문장수기업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경상남도 탄생 100주년을 맞아 경남 상징 문물 100종이 담긴 타임캡슐에도 거창유기공방의 제품이 들어가 있다. 영화 ‘음란서생’과 TV 드라마 ‘왕과 나’의 주요 세트 배경인 유기제품도 이곳의 제품이다. 뿐만 아니라 부친 이기홍 씨는 지난 2003년 전국공예품경진대회에서 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한 짱짱한 실력자다. 이런 배경은 이혁 동문에겐 자랑스러운 가업의 역사이자 넘어서야할 장벽이다.
<이혁 동문의 유기 작품과 상장>
첫 작품으로 대한민국공예품대전 특선 수상
그러나 호랑이의 새끼는 호랑이다. 부친이 아직 멀었다고 아직 안된다고 하는데도 그는 기어이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선보였다. 그의 첫 작품인 놋그릇 표면에 문양을 넣어 옻칠한 유화(鍮畵)는 지난해 6월 ‘제46회 경상남도 공예품대전’에서 은상(대한민국공예품대전에서 특선)을 받았다. 놋그릇에 옻칠을 한다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점수를 얻었다. 자신의 능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어엿한 거창유기 장인이 된 것이다. 그는 이의 특허출원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워낙 유명한 유기장을 부친으로 둔 까닭에 이 정도로는 어림없는 모양이다. 아버지의 꿈은 ‘유기를 본 차이나를 능가하는 세계적인 그릇으로 키우는 것’이라는데 그의 꿈은 ‘2년 내에 부친이 공방 일에서 손 떼게 하는 것’이라 한다. 부친의 꿈이 곧 그의 꿈이 될 모양이다. 곱상하고 앳된 얼굴이지만 눈매가 야무진 젊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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