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 김영주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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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8-23 13:42 조회13,97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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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풍당당’ 20대 국회 이끄는 서강 경제통
김영주(경제 15기) 국회의원
20대 국회가 문을 연 직후라 의원회관은 부산해 보였다. 미로 같은 복도를 더듬어 526호로 찾아 들었다. 훤칠한 키에 맵시 나는 여성 한 분이 취재진을 반겼다.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이번에 3선 중진이 된 김영주 의원이다. 인사를 나누다 말고 대뜸 질문 아닌 질문을 하고 말았다.
“아니, 의원님 서강대 나오셨어요?”
서강대학교를 나왔으니 성사된 인터뷰이건만 김 의원이 동문이란 사실이 딴에는 신기했나 보다. 김 동문은 1997년 IMF 경제위기가 불거진 이듬해 경제대학원에 입학해 노동경제학을 전공했다. 농구선수 출신으로 은행에서 노조활동을 펼치다가 시장경제를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어 서강과 인연을 맺은 것이다. 이 시기는 그녀의 인생에 있어 정계 입문으로 이어지는 전환점이기도 했다.
1970년대 여고농구 스타, 남녀 고용평등에 앞장서다
1970년대 고교 농구에 열광했던 세대에게 무학여고 14번 김영주는 인기스타였다. 그녀는 중학교 1학년 때 농구부 짝꿍의 훈련을 따라다니다가 열정 넘치는 코트의 매력에 반했다고 한다. 체육특기생은 아니었지만 무작정 농구를 시작했다. 패스의 기본도 모르던 여학생이 주전 선수로 뛰기까지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을까.
“제가 무슨 일이든 한 번 시작하면 끝장을 봅니다. 초등학교부터 농구해온 아이들을 뛰어넘기 위해 새벽이나 훈련이 끝난 후에 혼자서 연습했죠. 주전이 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어요. 우리는 운동부지만 수업을 꼬박꼬박 받으면서 시합에 나섰습니다. 그래도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컵을 들어 올렸어요. 팀플레이에 능했거든요.”
김영주 동문의 선수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신탁은행 소속으로 뛰다가 3년 만에 은퇴한 것이다. 농구경력이 끝나자마자 20대 초반의 나이에 약수동 지점 발령이 떨어졌다. ‘설렘 반 두려움 반’ 떨리는 마음으로 출근한 김 동문은 차가운 현실의 벽과 마주했다. 한 달 가까이 그녀에게 아무런 업무도 주어지지 않았다.
“당시 지점장님이 운동하던 사람을 보냈다며 저를 앞에 세워두고 인사부에 항의했어요. 그래도 제가 왕년의 스타였는데…(웃음). 하지만 지점에서 아무 일도 안 준다고 정말 아무 일도 안 할 수는 없었죠. 옆자리 막내에게 떡볶이 사주면서 돈 세는 법, 주판 튕기는 법, 장부 적는 법을 배웠습니다. 처음 맡게 된 업무는 돈 바꿔주는 일이었어요. 장충동의 부자 손님이든, 약수동의 달동네 손님이든 열과 성을 다했어요. 이런 식으로 몇 년 하니까 고객들이 먼저 저를 찾더군요. 지점장님도 제가 다른 지점으로 발령날까봐 묶어두려고 애썼고요. 여행원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은행장상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한창 은행 업무에 재미를 붙일 무렵 김영주 동문은 여행원에 대한 차별 문제에 눈 뜨게 된다. 여행원은 임금, 승진, 복지 등 고용조건에 있어서 일반 행원에 비해 심각한 불이익을 받았다. 1980년대 초반 김 동문이 노조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여행원이 책임자로 승진하려면 전환고시를 봐야 했어요. 여행원에서 일반 행원, 그러니까 남행원으로 전환한다고 해서 우리끼리 ‘성전환고시’라고 불렀죠. 시험과목은 여신과 수신, 외환, 영어, 상식, 논문이었습니다. 과락이 있어서 한 과목이라도 점수가 모자라면 통과시켜주지 않았죠. 상식은 주위에 물어보니까 행정고시 수준이라고 했고, 논문은 아무리 잘 써도 합격점을 주지 않았어요. 3000명이 넘는 여행원 중에서 성전환고시를 통과하는 사람은 1년에 한두 명뿐이었습니다. 결국 여행원 제도가 존속하는 한 여성은 불평등한 고용조건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김영주 동문은 다른 은행 여성대표들과 손잡고 국회, 시민단체를 수시로 드나들었다. 1987년 ‘남녀고용평등법’ 제정에 앞장서고 2년 후 ‘동일노동 동일임금’ 조항을 관철시켰다. 법제도 정비와 함께 여행원 제도는 1990년대 들어 폐지 수순을 밟았다. 우리나라 남녀고용평등 증진의 귀중한 진일보였다. 그 공을 인정받아 김 동문은 1996년 국민포장을 받았다. 그녀에게는 인생의 숙제를 해치운 시간이었다.
“김영주씨 덕분에 노동조합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은행 업무와 노조 활동, 그리고 자녀 교육 등으로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이었지만 김영주 동문은 학업의 끈도 놓지 않았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학부 과정을 마치고 그녀가 선택한 곳은 서강대학교 경제대학원이었다. 당시 김 동문은 전국금융노동조합연맹에서 여성 최초로 상임부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그녀는 현장에서 노동 환경을 바꿔나가려면 시장경제를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영주 동문은 학부를 갓 졸업한 어린 학생부터 정부부처, 대기업의 경제통까지 끌어 모아 스터디그룹을 조직했다. 주말마다 금융노련 사무실에 모여 일주일 동안 배운 것을 복습하고 시험과 리포트를 준비했다. 물론 밥값과 술값을 대느라 지갑은 얇아졌지만 대신 경제학 지식이 두터워졌다. 2000년 경제대학원을 졸업할 때 김 동문은 우수논문상을 수상했다. 상도 상이지만 논문을 지도했던 남성일(72 경제) 교수의 격려를 그녀는 지금도 뿌듯하게 간직하고 있다.
“남 교수님은 깐깐한 논문심사로 정평이 나있었어요. 또 IMF 사태가 터지자 기업이 없으면 노조도 없다면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주문하는 바람에 노동계에서 비난도 꽤 받으셨죠. 그런 교수님이 제가 졸업할 때 ‘김영주씨 덕분에 노동조합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라고 말씀해주셨어요. 노조 사람들은 공부 안하는 줄 알았는데 저로 인해 선입견이 깨졌다는 겁니다. 저한테는 그 말씀보다 기쁜 졸업선물이 없었어요.”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김영주 동문은 노동계와 여성계의 추천으로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 후보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김 동문이 국회에 입성한 것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였다. 대통령직 인수위와 청와대 노동TF에서 자문위원으로 전문성을 발휘하고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됐다. 그녀는 자리를 보고 달려오지 않았지만 시대가 그녀를 요구한 셈이다.
김영주 동문은 국회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약했다. ‘대기환경보전법’, ‘소음진동규제법’ 등 17대 국회에서 김 동문이 대표 발의해 통과시킨 법안들은 대부분 서민의 삶과 직결되는 것들이었다. 미세먼지, 오존 등 대기질 정보를 국민에게 공개하고, 65데시벨 이상의 소음에 대해 방음벽 등을 설치하도록 했다. 이처럼 서민생활에 꼭 필요한 법안만 제출했기에 가결율도 높았다. 19대 국회에서는 ‘자본시장법’을 개정해 주가조작에 대해 부당이득을 초과하는 징벌적 벌금을 매기게 하고, 내부 미공개 정보에 의한 주식 취득을 막아 재벌의 불법증여에 제동을 걸었다. 특히 2014년 통과된 ‘국립묘지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소방공무원들의 눈물을 씻어줬다는 평가를 받으며 대한민국 최우수법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화재현장에서 고양이를 안고 나오다가 숨진 소방관이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원래 아기 울음소리인 줄 알고 화재현장에 뛰어들었는데 거기 고양이가 있었던 거죠. 단지 아기가 아니라 고양이였기 때문에 안장심사에서 떨어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진짜 아기였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소방공무원의 국립묘지 안장률을 조사해봤더니 20%에도 못 미쳤어요. 그걸 100% 안장으로 바꾸는 것이 국민이 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의정활동을 살펴보면 거대 담론보다는 삶의 애환에 주목하는 특색이 있다. 이는 노조 시절부터 한결같이 이어온 ‘김영주 스타일’이다. 지난 5월 19일 19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처리한 ‘고용보험법’ 개정안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실업수당을 받는 기간에도 국가의 보조를 받아 국민연금을 부을 수 있도록 했는데 오는 7월부터 시행된단다. 국민연금의 경우 단절기간이 있으면 수급액이 크게 줄어들 수 있으니 꼭 알려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서민애환 담아내는 생활정치
20대 ‘여소야대’ 국회에서 김영주 동문은 3선 중진의원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겠다는 각오다. 상반기에 정무위원회 소속이 된 김 동문은 관치금융의 소산인 가계부채 문제를 정조준하고 있다. 당에서도 가계부채대책 TF 단장을 맡은 만큼 의욕이 넘친다. 대기업의 편의만 봐주고 솜방망이 처분만 일삼는 공정거래위원회 또한 소비자 편으로 돌려세우려 한다. 또 19대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으로서 아쉬움을 남긴 과제들을 20대에서 꼭 해결하겠다는 의지도 밝힌다.
“가습기 살균제 문제는 2013년부터 피해신고를 받고 보상을 추진했는데 정부여당의 비협조로 난항을 겪었어요. 피해자들이 절규해도 산업통상자원부 같은 데서는 눈도 깜짝 하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여소야대가 되니까 검찰이 먼저 수사한 걸 내놓기 시작했어요. 미세먼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는 소득양극화를 넘어 환경양극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없는 사람들은 일급 발암물질에 노출된 채 살아갑니다. 대기질부터 일상 속의 화학물질까지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야 해요. 이렇게 서민의 애환을 담아내는 생활정치를 펼쳐나가고 싶습니다.”
농구선수, 은행원, 노조활동가, 국회의원…. 김영주 동문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세계를 확장해왔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할지언정 결코 포기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늘 시작은 미약했지만 전문성을 기르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치열하게 헤쳐 나갔다. 그 과정 속에 서강과의 인연도 소중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김 동문은 이 인연이 더욱 특별해졌으면 하는바람을 감추지 않았다.
“다른 대학에서는 1년짜리 과정만 다녀도 온갖 상장을 보내오고 각종 요청이 빗발칩니다. 그런데 서강대는 제가 애정을 가지고 석사과정을 밟았는데도 좀 점잖게 하는 것 같아요. (웃음) 앞으로는 동문들 간에 정보를 적극적으로 공유했으면 합니다. 제가 국회에서 다룰 가계부채 문제도 금융경제의 명문인 서강 동문들이 밀어주시면 큰 힘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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