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 민기식 예수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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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6-27 11:06 조회15,885회 댓글4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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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수회, 뿌리가 튼튼해야 서강도 튼튼해져요”
‘있는 듯 없는 듯’ 이라는 표현이 꼭 들어맞는 사람. 존재감이 두드러지지 않지만 옆에 있으면 언제나 편하고 없으면 서운한 사람, 항상 주어진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소리 없이 해내는 사람, 민기식(Robert K. McIntoshi) 신부다.
1966년 8월 8일 한국에 왔으니 올해로 한국생활 50년이다. 1940년생이라 우리 나이로 77세. 인생의 3분의 2 가까운 세월을 한국에서 보냈다. 그럼에도 워낙 유명한 미국 출신 예수회원인 故프라이스 신부나 정일우 신부, 존 P.데일리 신부에 가려진 탓인지, 민 신부를 아는 동문은 많지 않다. 수도자를 두고 속세의 잣대로 유명세를 운운하는 게 분명 못마땅하긴 하지만 말이다.
미국 나이로 26세에 한국에 오셨습니다. 꿈 많은 20대의 젊은 나이에 하고 싶은 일도 많으셨을 텐데, 어떤 계기로 한국에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어릴 때 꿈이 해외 선교사였습니다. 선교사라고 하면 왠지 멋있어 보였고 저도 어른이 되면 선교사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특정 국가에 가고 싶거나 했던 건 아니고 1955년 제가 소속되어 있던 위스컨신 관구가 한국에 예수회를 설립하고 미국 예수회원을 파견했습니다. 그래서 해외에 선교사로 파견된다는 건 십중팔구 한국으로 가는 걸 의미했지요. 신문방송학과를 설립하고 교수로 지냈던 케빈 커스튼 신부와 함께 왔습니다.
한국에 처음 오셔서 많은 것들이 어색하고 불편하셨을 텐데, 어려움은 없으셨는지요.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강의 담당 대우교수로 임용되어 1966년 8월 8일 한국에 도착했고, 한국에 온 지 2주 만에 강단에 섰습니다. 오자마자 아직 적응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동수(60 영문) 동문에게 2주간 속성으로 한국말을 배운 다음 선생이 된 것이지요. 첫 수업이 12시 30분에 시작되었는데 수강생 중에 나이 많은 학생이 있었어요. 자신 보다 나이가 어린 선생이었던 저를 싫어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 나이가 26세였으니 나이를 따지는 한국사람 정서상 불편했을 수도 있지요. 당시 학생들이 트럭타고 소풍갔던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래도 제 수련 동기 중에 이한택 주교가 있어서 한국이 그리 낯선 곳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19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예수회에 입회했는데 그 당시 이한택 동기는 25살이었어요. 그리고 외6촌 형인 정일우 신부님도 서강에 계셨고요.
처음 한국에 오셨을 때 연학수사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제서품 후 서강 아닌 다른 곳에서 일하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수련기 때부터 계속 한국에 있고 싶다고 했어요. 한국에서 계속 있으려면 한국말을 배워야 한다고 하여 18개월간 한국말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서강에서 3년, 광주신학대에서 1학기, 미국에 가서 2년 공부하고 서품 받은 후 1학기 더 공부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미국에서는 철학, 문학, 사목신학을 공부했습니다.
민기식 신부님에 대해 어떤 동문들은 깐깐하고 엄숙한 교수님으로, 어떤 동문들은 친구 같이 편안하고 자상한 신부님으로 기억합니다. 또한 학생들을 지도하던 당시 한국 상황이 녹록치 않았는데요. 한국, 그리고 서강에서는 어떤 일들을 주로 하셨는지요?
학교에서는 1966년부터 1985년 퇴직할 때까지 주로 1, 2학년 교양영어를 가르쳤습니다. 그 이후에도 1991년까지 강의는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1975년부터 1985년까지 10년간 가톨릭학생회 지도신부로 일했는데, 유신정권에서는 외국인이 학생동아리 지도교수를 맡을 수 없었기 때문에 故안병태 신부가 지도교수, 제가 지도신부라는 다소 이상한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1978년부터 1983년까지 故정일우 신부와 함께 복음자리에서 일하기도 했는데 가르치는 일이 많아 저는 손을 떼게 되었지요. 한국예수회에서는 1964년 수련원이 설치되면서 수련원생들에게 영어와 라틴어를 가르쳤고 중간실습생(regency)들과 ‘은평소년의 집’에 실습을 나가기도 했지요.
50년이라면 반백년입니다. 한국에 오랜 기간 계셨지만 이를 알고 있는 서강인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1991년까지 서강에서 강의하고 1992년부터는 주로 한국예수회 관련 일들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14년 동안 한국예수회 부지구장(관구승격 전), 부관구장을 맡았고 양성 담당을 8년, 예수회 신학원에서 영적지도 10년, 그 외에 예수회 수련원과 피정 기관인 ‘말씀의 집’에서 영적지도를 담당했습니다. 지금도 신학원에서 1학기씩 예수회의 생활방식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재단이사로도 일했지만 주로 예수회 일이 더 많았던 탓에 저를 기억하는 동문이 별로 없을 수 있어요. 한국예수회가 튼튼해야 서강도 튼튼해진다는 생각을하기 때문에 예수회 일이 제겐 매우 중요합니다. 제 신원이 예수회원이니까요.
고향을 떠나온 지 50년이 되었으니 미국보다는 한국에서 사신 기간이 훨씬 긴 셈인데요. 미국과 한국 양쪽에서 이방인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거나 고향이 그립진 않으셨습니까?
제 형제가 13명인데 현재 미국에는 7명이 살고 있고요, 제 예수회 동기 7명도 있습니다. 저는 남녀공학고등학교를 1958년에 졸업했는데 지난 2008년 졸업 50주년을 맞아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사귀었던 여자 친구가 살아있어서 반가웠어요. 아직도 많은 친구들이 생존해있어요. 고향인 미국에 갈 때마다 그들을 만나는 게 즐겁지요. 그러나 미국은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일 뿐이에요. 제 집은 제 가족들(예수회원)이 있고 지금 제가 살고 있는 한국이에요. 모든 사람이 자기 고향에서 사는건 아니듯이 저 역시 마찬가지에요. 미국은 방문하는곳, 한국은 사는 곳이죠.
그리고 한국은 미국에 비해 살기 편해요. 특히 나이 들어갈수록 필요한 건강보험과 대중교통이 잘 구비되어 있어서 좋아요. 그래서 미국의 제 형제들에게 한국이 얼마나 제게 살기 좋은 지 설명할 때면 다들 부러워하지요. 돼지고기 넣고 끓인 김치찌개와 비지찌개, 보쌈, 파전과 빈대떡 등 맛있는 음식도 많고요. 초콜릿 케이크나 커피, 진토닉, 포도주도 좋아하긴 합니다. 가끔 누군가 제게 죽으면 어디에 묻히고 싶냐고 묻는데 어디에 묻히든 무슨 상관인가요? 큰 우주 안에서 작은 공간일 뿐인데요. 제가 좀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편입니다.
올해 77세이신데 아직도 일하고 계시죠? 건강은 어떠십니까?
워낙 놀기 좋아하고 남을 잘 웃기는 성격인데, 이런 제가 계속 일하는 걸 보면 하느님께서 제 성격을 바꾸시려고 일을 맡기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매주 월·수·금 3일간 한국예수회 관구본부로 출근하여 아침 9시부터 5시까지 근무합니다. 맡은 일은 아키비스트(archivist)로서 예수회 사업과 관련된 문서들, 로마에서 온 문서들, 총회 문서 등 예수회 주요 기록을 정리하고 주요 도서를 구입하는 일을 합니다. 이전에 헙스트 신부님, 프라이스 신부님, 켈리 신부님도 아키비스트였지요.
그 외에도 ‘제3수련(tertianship, 예수회원 마지막 양성단계로서 최종 서원(誓願)을 하기 전의 엄격한 수련 기간 <편집자>)’ 프로그램을 만들고 영적 지도도 합니다. 건강은 3년 전 중풍이 찾아왔지만 곧바로 병원에 갔기 때문에 다행히도 5일간 입원 후 약물치료만 했고 그 외에 특별히 건강 문제는 없는 것 같아요. 다만 심장이 좋지 않아서 요가나 스트레칭을 하고 있긴 합니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십시오.
오래 사는 게 좋은 건지 모르겠어요. 세상에 도움이 되어 오래 살 이유가 있으면 오래 살고 없으면 일찍 가고. 그건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니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언제든지 가야지요. 원래 개인적인 소망은 21세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서 그것만 보고 가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그동안 재미있는 것 많이 보고 건강하게 살았으니 원 없어요. 이제 가도 된다고 생각해요. 현재는 80세가 되는 2020년까지만 사는 게 목표인데 그것도 욕심이겠지요?
이제 미국에서 건너온 예수회원들은 몇 분 남지 않았다. 민기식 신부, 기수현(다니엘 키스터, 영문과, 1974년) 신부, 한국인으로 귀화한 박문수(프란시스 부크마이어, 사회학과, 1969년) 신부, 그리고 건강이 많이 좋지 않은 신성용(크리스토퍼 스팔라틴, 철학과, 1965년) 신부가 있다. 이들은 서강인이고 모두 한국 사람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이라는 표현이 꼭 들어맞는 사람. 존재감이 두드러지지 않지만 옆에 있으면 언제나 편하고 없으면 서운한 사람, 항상 주어진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소리 없이 해내는 사람, 민기식(Robert K. McIntoshi) 신부다.
1966년 8월 8일 한국에 왔으니 올해로 한국생활 50년이다. 1940년생이라 우리 나이로 77세. 인생의 3분의 2 가까운 세월을 한국에서 보냈다. 그럼에도 워낙 유명한 미국 출신 예수회원인 故프라이스 신부나 정일우 신부, 존 P.데일리 신부에 가려진 탓인지, 민 신부를 아는 동문은 많지 않다. 수도자를 두고 속세의 잣대로 유명세를 운운하는 게 분명 못마땅하긴 하지만 말이다.
미국 나이로 26세에 한국에 오셨습니다. 꿈 많은 20대의 젊은 나이에 하고 싶은 일도 많으셨을 텐데, 어떤 계기로 한국에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어릴 때 꿈이 해외 선교사였습니다. 선교사라고 하면 왠지 멋있어 보였고 저도 어른이 되면 선교사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특정 국가에 가고 싶거나 했던 건 아니고 1955년 제가 소속되어 있던 위스컨신 관구가 한국에 예수회를 설립하고 미국 예수회원을 파견했습니다. 그래서 해외에 선교사로 파견된다는 건 십중팔구 한국으로 가는 걸 의미했지요. 신문방송학과를 설립하고 교수로 지냈던 케빈 커스튼 신부와 함께 왔습니다.
한국에 처음 오셔서 많은 것들이 어색하고 불편하셨을 텐데, 어려움은 없으셨는지요.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강의 담당 대우교수로 임용되어 1966년 8월 8일 한국에 도착했고, 한국에 온 지 2주 만에 강단에 섰습니다. 오자마자 아직 적응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동수(60 영문) 동문에게 2주간 속성으로 한국말을 배운 다음 선생이 된 것이지요. 첫 수업이 12시 30분에 시작되었는데 수강생 중에 나이 많은 학생이 있었어요. 자신 보다 나이가 어린 선생이었던 저를 싫어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 나이가 26세였으니 나이를 따지는 한국사람 정서상 불편했을 수도 있지요. 당시 학생들이 트럭타고 소풍갔던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래도 제 수련 동기 중에 이한택 주교가 있어서 한국이 그리 낯선 곳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19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예수회에 입회했는데 그 당시 이한택 동기는 25살이었어요. 그리고 외6촌 형인 정일우 신부님도 서강에 계셨고요.
처음 한국에 오셨을 때 연학수사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제서품 후 서강 아닌 다른 곳에서 일하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수련기 때부터 계속 한국에 있고 싶다고 했어요. 한국에서 계속 있으려면 한국말을 배워야 한다고 하여 18개월간 한국말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서강에서 3년, 광주신학대에서 1학기, 미국에 가서 2년 공부하고 서품 받은 후 1학기 더 공부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미국에서는 철학, 문학, 사목신학을 공부했습니다.
민기식 신부님에 대해 어떤 동문들은 깐깐하고 엄숙한 교수님으로, 어떤 동문들은 친구 같이 편안하고 자상한 신부님으로 기억합니다. 또한 학생들을 지도하던 당시 한국 상황이 녹록치 않았는데요. 한국, 그리고 서강에서는 어떤 일들을 주로 하셨는지요?
학교에서는 1966년부터 1985년 퇴직할 때까지 주로 1, 2학년 교양영어를 가르쳤습니다. 그 이후에도 1991년까지 강의는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1975년부터 1985년까지 10년간 가톨릭학생회 지도신부로 일했는데, 유신정권에서는 외국인이 학생동아리 지도교수를 맡을 수 없었기 때문에 故안병태 신부가 지도교수, 제가 지도신부라는 다소 이상한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1978년부터 1983년까지 故정일우 신부와 함께 복음자리에서 일하기도 했는데 가르치는 일이 많아 저는 손을 떼게 되었지요. 한국예수회에서는 1964년 수련원이 설치되면서 수련원생들에게 영어와 라틴어를 가르쳤고 중간실습생(regency)들과 ‘은평소년의 집’에 실습을 나가기도 했지요.
50년이라면 반백년입니다. 한국에 오랜 기간 계셨지만 이를 알고 있는 서강인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1991년까지 서강에서 강의하고 1992년부터는 주로 한국예수회 관련 일들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14년 동안 한국예수회 부지구장(관구승격 전), 부관구장을 맡았고 양성 담당을 8년, 예수회 신학원에서 영적지도 10년, 그 외에 예수회 수련원과 피정 기관인 ‘말씀의 집’에서 영적지도를 담당했습니다. 지금도 신학원에서 1학기씩 예수회의 생활방식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재단이사로도 일했지만 주로 예수회 일이 더 많았던 탓에 저를 기억하는 동문이 별로 없을 수 있어요. 한국예수회가 튼튼해야 서강도 튼튼해진다는 생각을하기 때문에 예수회 일이 제겐 매우 중요합니다. 제 신원이 예수회원이니까요.
고향을 떠나온 지 50년이 되었으니 미국보다는 한국에서 사신 기간이 훨씬 긴 셈인데요. 미국과 한국 양쪽에서 이방인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거나 고향이 그립진 않으셨습니까?
제 형제가 13명인데 현재 미국에는 7명이 살고 있고요, 제 예수회 동기 7명도 있습니다. 저는 남녀공학고등학교를 1958년에 졸업했는데 지난 2008년 졸업 50주년을 맞아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사귀었던 여자 친구가 살아있어서 반가웠어요. 아직도 많은 친구들이 생존해있어요. 고향인 미국에 갈 때마다 그들을 만나는 게 즐겁지요. 그러나 미국은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일 뿐이에요. 제 집은 제 가족들(예수회원)이 있고 지금 제가 살고 있는 한국이에요. 모든 사람이 자기 고향에서 사는건 아니듯이 저 역시 마찬가지에요. 미국은 방문하는곳, 한국은 사는 곳이죠.
그리고 한국은 미국에 비해 살기 편해요. 특히 나이 들어갈수록 필요한 건강보험과 대중교통이 잘 구비되어 있어서 좋아요. 그래서 미국의 제 형제들에게 한국이 얼마나 제게 살기 좋은 지 설명할 때면 다들 부러워하지요. 돼지고기 넣고 끓인 김치찌개와 비지찌개, 보쌈, 파전과 빈대떡 등 맛있는 음식도 많고요. 초콜릿 케이크나 커피, 진토닉, 포도주도 좋아하긴 합니다. 가끔 누군가 제게 죽으면 어디에 묻히고 싶냐고 묻는데 어디에 묻히든 무슨 상관인가요? 큰 우주 안에서 작은 공간일 뿐인데요. 제가 좀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편입니다.
올해 77세이신데 아직도 일하고 계시죠? 건강은 어떠십니까?
워낙 놀기 좋아하고 남을 잘 웃기는 성격인데, 이런 제가 계속 일하는 걸 보면 하느님께서 제 성격을 바꾸시려고 일을 맡기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매주 월·수·금 3일간 한국예수회 관구본부로 출근하여 아침 9시부터 5시까지 근무합니다. 맡은 일은 아키비스트(archivist)로서 예수회 사업과 관련된 문서들, 로마에서 온 문서들, 총회 문서 등 예수회 주요 기록을 정리하고 주요 도서를 구입하는 일을 합니다. 이전에 헙스트 신부님, 프라이스 신부님, 켈리 신부님도 아키비스트였지요.
그 외에도 ‘제3수련(tertianship, 예수회원 마지막 양성단계로서 최종 서원(誓願)을 하기 전의 엄격한 수련 기간 <편집자>)’ 프로그램을 만들고 영적 지도도 합니다. 건강은 3년 전 중풍이 찾아왔지만 곧바로 병원에 갔기 때문에 다행히도 5일간 입원 후 약물치료만 했고 그 외에 특별히 건강 문제는 없는 것 같아요. 다만 심장이 좋지 않아서 요가나 스트레칭을 하고 있긴 합니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십시오.
오래 사는 게 좋은 건지 모르겠어요. 세상에 도움이 되어 오래 살 이유가 있으면 오래 살고 없으면 일찍 가고. 그건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니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언제든지 가야지요. 원래 개인적인 소망은 21세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서 그것만 보고 가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그동안 재미있는 것 많이 보고 건강하게 살았으니 원 없어요. 이제 가도 된다고 생각해요. 현재는 80세가 되는 2020년까지만 사는 게 목표인데 그것도 욕심이겠지요?
이제 미국에서 건너온 예수회원들은 몇 분 남지 않았다. 민기식 신부, 기수현(다니엘 키스터, 영문과, 1974년) 신부, 한국인으로 귀화한 박문수(프란시스 부크마이어, 사회학과, 1969년) 신부, 그리고 건강이 많이 좋지 않은 신성용(크리스토퍼 스팔라틴, 철학과, 1965년) 신부가 있다. 이들은 서강인이고 모두 한국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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