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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신 김금화 굿판의 장구재비 조성연(79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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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12-28 14:19 조회14,4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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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전통예술의 뿌리 소중한 문화자산”
조성연(79 수학) 나라 만신 김금화 굿판의 장구재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굿’은 사제자(司祭者)인 무당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노래와 춤으로 길흉화복(吉凶禍福) 등의 인간의 운명을 조절해 달라고 비는 제의라고 한다. 즉 ‘조상의 근원을 이어, 세상에 태어나서, 오래 살면서, 재물을 많이 가지고 편히 살고, 액운을 물리치며, 병이 들면 고쳐서 건강하게 살다가, 죽어서도 영혼이 내세의 좋은 곳으로 가서 영생하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굿은 유한한 인간존재를 무한의 영원한 존재로 바꾸어 놓으려고 하는 행동적 현상이자 신과 인간이 만나는 소통의 장이다.

당연히 굿은 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많은 제물을 올려 대접하고 재비(악공)의 무악(巫樂)반주에 맞추어 화려한 무복(巫服)을 입고 가무로 신을 즐겁게 하여 원하는 바를 기원하며 만족해진 신을 잘 보내드리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이렇게 신을 대접하고 보내드리고 나면 그 후엔 굿판에 함께한 사람들이 제물을 나눠먹으며 춤추고 즐기는 축제판이 벌어진다.

이 굿판에서 주인공은 당연히 무당이지만 무당이 신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이끌고, 신명나게 굿을 벌여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굿이 진행되는 긴 시간 동안 참여자들과 구경꾼들을 굿에 몰입하게 하고 흥겨운 축제로 만들어주는 재비들이야말로 굿판에 없어서는 안될 빛나는 조연들이다

조성연(79 수학) 동문도 그 재비들 중 한명이다. 그러나 그는 보통 재비가 아니다. 나라 만신(萬神)이자 세계적인 만신인 김금화(중요무형문화재 제82-2호)의 재비이다. 때로는 앞에 서서 신명나게 꽹과리를 치며 길을 열고 때로는 옆에서 장구를 치며 굿판을 이어나간다. 김금화 굿판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자 그를 ‘신엄마(神母)’로 모시는 아들이다.

김금화 만신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만신〉(2014년), <비단꽃길>(2013년)을 봤습니다. 영화에 만신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인물인 것 같은데 어떻게 인연이 되었습니까.

학창시절 ‘탈반’에서 활동했었습니다. 그곳에서 다양한 탈춤을 배우기도 하고 소리도 배웠는데 선배들이 소리를 잘 한다고 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소리는 남들보다 쉽게 배웠고 잘 따라했었는데 흥미가 있다보니 더 배우러 학교 밖으로 나갔지요. 제가 대학에 들어온 79년과 80년대 초는 대학생활을 하기 힘든 시기였어요. 휴교도 했었고 시위로 잡혀가는 선배와 친구들도 많았고 암울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자연히 학교 밖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요.

‘민요연구회’에 들어갔는데 민요를 민족과 민중의 노래로서 인식하고 이를 통해 문화운동을 전개하였던 문화운동단체였어요. 이곳에서 김금화 선생의 신딸이었던 김경란 선배를 만났고 김 선배를 통해 김금화 선생과 연결된 거지요.

김금화 만신의 장구재비가 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김금화 선생님은 1985년에 ‘서해안배연신굿 및 대동굿’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가 되신 분입니다. 강신무이면서도 철물이굿, 만수대탁굿, 배연신굿, 지노귀굿 등 모든 종류의 굿에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쉽게 이런 분의 재비가 될 수는 없었지요. 더군다나 당시에 만신의 재비는 모두 여자들이어서 남자는 끼기도 힘들었지만 텃세도 심해서 잘 가르쳐주지도 않았어요. 노력과 인내 끝에 결국 장구채를 잡게 되었는데 남자가 만신의 굿판에서 장구를 치게 된 것은 제가 처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저 말고도 몇 명 더 있지만 당시에는 저밖에 없어서 많이 눈에 띄었을 것입니다.

영화와 사진에서 장구나 꽹가리를 치는 모습을 보면서 혹시 내림굿을 받은 것은 아닌가 궁금했었습니다.

저는 한국인은 정도의 차이일 뿐 조금씩의 신기(神氣)가 있다고 봅니다. 다만 신이 내리고 안 내리고는 신의 선택이겠지요. 아무나 무당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신이 선택한 사람만이 무당이 될 수 있을 텐데 그런 면에서 저는 무병(巫病)을 앓거나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김금화 선생을 ‘신어머니’라고 부르는데 굿에 함께 다니고 또 다양한 일을 도와드리니 그런 소리가 났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김금화 선생께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많이 활동하시고 신딸 중에는 외국인도 많습니다. 제가 영어와 중국어를 할 수 있어서 선생을 대신하여 해외에 이메일이나 서신도 보내고 연로하시기 때문에 해외에 나가시면 통역도 하고 가이드 역할도 합니다.

김금화 선생이 많이 아끼는 제자로 알고 있습니다. 지난해 말 문화재청으로부터 전수교육 조교로 선정되기도 했는데요. 어떤 역할을 하는 겁니까.

김금화 선생은 ‘서해안배연신굿 및 대동굿’으로 중요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가 되신 분입니다. 저는 그 분이 수행하는 전수교육을 도와서 차세대 전승자를 키우는 일을 하게 됩니다.

전수교육 조교는 해당 분야를 최소한 8년 이상 연마한 자 중 선정하는데 실기역량을 포함한 전승능력과 전수활동 기여도 등을 종합적으로 심사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해안배연신굿은 서해안 지역 어촌에서 어민들이 풍어를 기원하고, 마을 사람들의 액을 예방하여 평안을 기원하는 마을굿이자 대동단결을 추구하는 마을 축제입니다. 인천, 소래포구, 화수부두 등 서해안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는 황해도굿인데요, 지난 10월 16일에도 소래포구 축제에서 풍어제를 벌였습니다.

굿에 대해 동문들에게 알리고 싶은 게 있다면

굿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해온 오랜 전통신앙입니다. 고고학 자료에서 오늘날 무당의 방울과 비교되는 제의용 방울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굿의 역사는 신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이고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신라 제2대 남해왕은 차차웅으로 불렸는데 이는 방언으로 무당의 뜻이었다고 해요. <고려사>에 무격을 모아 기우제를 지낸 기록이 보이고,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도 수록된 내용이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팔관회>도 불교행사와 무속행사가 결합된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러나 조선시대에 유교가 들어오면서 금기시되고 일제에 의해 탄압받고 미신으로 치부되면서 외면받아 왔습니다.

요즘 들어 굿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어 반가운 소식인데요, 굿은 음악, 춤, 복식(服飾), 무가(巫歌) 등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어 전통예술의 뿌리이면서 사람들을 위무해주는 기능을 가진 우리의 소중한 문화자산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보다는 서양인들이 더욱 관심과 흥미를 갖고 있다는데 아쉬움이 남습니다.

굿에 대한 인식이 개선된 것은 모두 김금화 선생님의 노력 덕분이고 이런 분을 ‘신엄마’로 모시고 재비를 할 수 있다는 게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명숙(83 불문) 서강옛집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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