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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동문 특집-60학번 여섯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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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9-22 10:56 조회17,1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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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에서 우리는 매일매일 신났습니다”
수도자 길 걷는 60학번 여섯 수녀


1960년도 모교 입학생 159명 가운데 100명만 졸업할 수 있었다. 그 중 여성이 20명이었다. 여성 졸업자 20명 가운데 6명이 수녀로서 수도자의 길을 걸었다. 수도자 서원 50주년을 축하하는 ‘금경축’까지 모두 지냈을 연배에 이른 60학번 동문 수녀 6명은 여전히 건강하게 활동 중이다. 강연희(60 사학), 김경자(60 영문), 김의자(60 영문), 오인숙(60 영문), 최길자(60 철학), 최송실(60 철학) 동문이다.

김경자, 김의자, 최길자 동문은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 소속이다. 고교 동창이기도 한 세 동문은 고교 시절 후암동에 자리한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 지원에서 새벽미사를 함께 드렸던 인연이 같은 수녀회로 입회하는 계기가 됐다. 해당 수녀회는 1319년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창설된 베네딕도회 몬떼 올리베또의 성모 마리아 연합회 소속으로, 1931년 스위스 캄의 성 십자가 수녀원 수녀 6명이 만주 연길교구에 파견되면서 시작됐다. 광복과 중국 공산화, 한국전쟁 등으로 고난을 거치며 1965년 부산 광안동 수녀원으로 자리를 옮겨 꾸준히 성장했고, 1981년 교황권하 자립 수녀회가 됐다. 이해인(석사 82 종교) 수녀가 소속되어 있어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 및 의료봉사에 이어 노인과 가난한 이들을 비롯한 다문화 가정과 가출 소녀들을 위한 사회복지에 힘을 기울인다.


김경자(60 영문)

현재 부산 천주교 당감성당에서 사도직을 수행하는 김경자 헨리카 수녀는 모교 학사 학위번호 1번의 주인공이다. 오빠가 신부가 된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했기에 여섯 살 때부터 수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김 수녀는 “어린이처럼 철없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라며 “전쟁을 겪은 세대다 보니 일찍 철이 들었다”라고 입회 계기를 말했다.

김 수녀는 모교 설립 전부터 예수회와 교류하고 있었다. 고교 시절 후암동 성당을 다닐 때 길로련 신부가 주일 미사를 집전했는데, 길로련 신부가 한국어로 강론할 때 발음을 교정해드린 인연이 있다. 또, 서소문에 있던 예수회 사무실에 찾아가 매주 2시간 레지오 봉사에 나서기도 했다. 예수회가 세계 각지에 후원을 요청하는 편지에 우표 붙이는 게 주된 업무였다. 고교 시절 예수회가 대학을 설립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일찌감치 대학 진로를 모교로 정했다.

전국 최고 수준이던 경기여고에서 입시전형 2차로 분류된 신설 대학에만 지원하는 건 ‘비상식적’이었는데, 모교 지원이 그러하였다. 서강은 학교 설립 인가 절차가 늦어져 2차 전형으로 신입생을 선발해야 했고, 당시 2차란 명문대가 몰려 있는 1차 전형에 탈락한 수험생이 응시하는 학교로 비쳐지곤 했다. 김경자, 김의자, 최길자 수녀는 모두 1차를 거르고 2차인 모교에 응시하는 바람에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눈총을 받았다. 이들에게는 개교 이전부터 서강이 ‘우리 학교’였다.

동기들로부터 ‘엄마’같은 역할을 해왔다고 평가 받는 김경자 수녀는 졸업 후에도 수녀회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왔다. 부산 성분도 병원에서 근무하는 한편, 교육자로서 수련소와 중고등학교 교사로 나서기도 했다. 해외 사목과 장애인 복지관 업무 및 병원 도서관 업무를 맡았는가 하면, 수녀회의 한국관구 독립하는 과정에서 인수인계 업무에 참여했다.

고교 2학년 때 세례를 받고 집안에서 처음으로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김의자 마리로사 수녀는 “학창 시절 하느님 품에 푹 감싸 안기신 채 살고 계시는 신부님들이 아름답고 존경스러웠다”라며 “수녀가 되지 않고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할 방법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최길자(60 철학)

최길자 안젤라 수녀는 “모교에 합격하자마자 부산의 수녀원 본원을 방문했는데 마침 주일저녁기도 시간이었다”라며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하던지, 이런 데서 평생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최 수녀는 졸업 후 거제 해성중고등학교, 부산 데레사 여자중학교, 안동 가톨릭 상지대, 대전 가톨릭 대학교에서 교육 사도직을 맡는가 하면, 수도원에서 예비 수녀 양성 및 수녀 재교육을 담당했다. 수녀회 본원장, 총원장, 지구장, 수련장 등 주요 직위를 역임했고 현재는 김의자 수녀와 함께 경기도 부천시 소사 성분도 은혜의 집에서 소임을 맡아 봉사하고 있다.


최송실(60 철학)

학창 시절 예수회 신부님들과 담소하는 최송실 수녀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최송실 마리아 수녀는 졸업 후 ‘변함없는 참 행복에 대한 갈증’이 수도자의 길로 이끈 동력이었다. 졸업하자마자 수녀회에 입회했고, 이듬해 로마에 있는 본 수도회 총원 소속 국제 수련원으로 파견되어 런던을 거쳐 4년 동안 수련을 마치고 귀국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로 교육과 행정직에서 일해 왔다. 해당 수녀회는 1696년 프랑스 북부 시골마을 러베빌에서 주민들의 인간적 영적품위를 높이기 위해 시작된 수도회다. 지금까지 그 목표에 충실하여 파견되는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인간적 영적품위를 높이는데 우선적으로 필요한 일에 봉사해 왔다. 주로 다양한 형태의 교육, 의료, 사회사업에 헌신하고 있다. 최 동문은 다양한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 모든 것을 나누며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수도자로서 커다란 보람을 느낀다 한다.

최송실 수녀는 커다란 열정으로 영어를 지도해줬던 서강에 깊이 감사해한다. 전 세계를 무대로 봉사하는 수녀회인 만큼 유창한 영어는 필수 요건이었다. 모교에서 쌓은 실력을 바탕으로 중고등학교 및 수련원과 유기서원자수련원에서 교사를 맡았고 행정 사도직으로 관구 비서, 대구 관구 관구장, 로마 총원 총참사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재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에서 소임을 받아 봉직중인 최 수녀는 “서강은 한 마디로 저의 고향이요, 어버이다”라며 “제게 수도생활은 높으신 분의 은덕으로 명을 다 하는 순간까지 끝나지 않을, 하느님과 이웃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해가는 여정이다”라고 말했다.


강연희(60 사학)


베레모 쓰고 한껏 멋부린 강연희 수녀(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예수수도회 강연희 레지나 수녀는 교육사도직에 헌신했다. 1968년부터 교편을 잡고 대전 성모여자중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쳤고, 성모여자고등학교에서 세계사를 가르쳤다. 대전성모여고에는 제3대 교장으로 1983년 취임한 이래 1991년까지 재직했다. 교장 시절 우수한 학생을 서강으로 많이 보낸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모교 재학 시절 교육하는 수도자로서 살면서 교사로 중고교 청소년들과 사는 게 가장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꿈을 실현한 것이다.

강연희 수녀는 “제자들이 환갑을 넘겼는데, 서강에서 인간 중심의 교육을 해주셨던 신부님들 덕분에 저 역시 제자들에게 멋있고 품위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당부해왔다”라며 “서강은 나로 하여금 하느님과 함께 있어야 할 곳에 꼭 있어야 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게 했다”라고 말했다. 대학 3학년 시절 농촌계몽활동 나섰을 때 가난한 사람 위해 수녀가 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는 강 수녀는 졸업 즈음 故박고영 신부께 수녀원 추천을 부탁드렸다. 그러자 신부님이 소개해준 곳이 지금의 예수수도회인 동정성모회다.

예수수도회는 영국 출신 메리 워드가 1609년 프랑스 생토메에서 창립했는데, 소녀들의 교육과 영적지도와 자선 활동으로써 하느님께 봉사하는 게 주된 활동이었다. 한국 진출은 1952년 독일 유학중이던 박고영 신부가 이 수도회의 독일 뮌헨분원이 펼치는 교육 사업을 보고 한국 진출을 요청한데서 비롯됐다. 1964년 우리나라에 진출한 예수수도회에 강 동문은 졸업 후 6개월 뒤 입회했다. 박고영 신부의 조카인 박의열 엘리사벳 수녀가 초대 원장을 맡았고 1973년 관구로 승격했다. 올해 2월 구로구 오류동에 자리한 예수수도회 서울분원으로 소임을 받은 강 동문은 “가난한 사람 도우면서 하느님 사랑 만나게 해주는 게 보람이다”라며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기도 시간 충분히 가지면서 남은 삶을 수도자로서 살고 싶다”라고 말했다.


오인숙(60 영문)

대한성공회 성가수도회 오인숙 카타리나 수녀사제는 우리나라 성공회 최초로 수녀에서 사제가 되었다. 오인숙 수녀사제는 한국전쟁 때 부모님을 여의고 성공회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어 모교 재학 시절 4년 내내 현재 성공회 서울 성당이 자리한 정동의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1964년 2월 졸업 후 4월 수녀원에 입회한 오 동문은 “어린 시절 보육원 운영하는 분을 보면서 감동했기에, 커서 사회사업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라며 “결혼하면 내 아이만 보호하려할 것 같아서 결혼은 안하려고 일찌감치 마음먹었다”라고 말했다. 고교시절 집 앞 성당에 들러서 기도할 때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영적 질문을 받은 것도 계기가 됐다.

오 수녀사제는 “요즘 시대에 예수님이 찾아오신다면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숏커트를 하고 계실 것이다”라며 “신앙은 생활에서 묻어나는 관계성에서의사랑이기에, 하느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을 사랑하는 휴머니즘이다”라고 설명했다. “처한 상황과 입장을 살펴야지 법과 헌장을 그대로 따르려 해서는 안된다”라고 소신을 밝히는 오 수녀사제는 “이러한 자세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해주셨던 서강의 신부님들로부터 배운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모교 개교를 준비하며 서소문에 자리했던 예수회 건물 전경

이러한 취지에서 오 수녀사제는 수도원 개혁에 나서 성과를 거둔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긴다. 수녀 입회 당시 두껍고 길었던 검정색 수녀복이 무척 불편하고 더웠기에, 이를 조금 짧게 손보고 색상도 파란색으로 바꾸기까지 꽤 오랜 시간 수도회 관계자들과 대화해야했다. 먼저 실천하면 그 추이를 지켜보겠다는 말에 직접 옷을 지어 몇 년 동안 실천한 뚝심을 보였다. 덕분에 성가수도회 수녀들은 산뜻하고 활동하기 편한 수녀복을 입을 수 있게 되었고, 오 수녀사제는 수녀복 개선 활동처럼 곳곳에서 사람을 위한 개혁을 펼쳐왔다.

학창 시절 오 수녀사제만 성공회 신자다보니 겪게 된 일화도 있다. 존 P. 데일리 신부가 집전하는 교내 미사 도중 영성체를 모시려는데 데일리 신부님이 영성체를 베풀지 않아 시작된 일화다.

“처음에는 ‘키가 작아 못 보셨나?’ 생각해서 다음 줄에 다시 섰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어요. ‘아, 내가 성공회 신자여서 그러셨구나’라고 생각해서 다음에는 영성체를 모시러 나가지 않았죠. 그런데 2010년 개교 50주년 행사 때 데일리 신부님이 서강을 방문한 다음 날, 저희 수녀원을 방문하셨어요. 저를 보시고는 무릎을 꿇고 ‘이제 사제가 되셨으니 축복해달라’라고 부탁하시더군요. 깜짝 놀라 만류했더니 축복할 때까지 안 일어나시겠대요. 그래서 축복해드렸죠. 말씀은 안하셨지만 아마 옛 기억이 오랫동안 괴로우셨던 것 같아요.”

1960학번 동기인 수녀 6명은 모교 재학 시절 낮 시간 매일미사를 드렸다. 60학번 여학생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였기에 단체로 미사에 참여하는 게 낯설지 않은 문화였다. 성탄, 부활, 성모성월 등 교회 생활을 학교생활처럼 해왔다. 이들은 공유하는 추억으로 길로련 신부와 미8군과 DMZ 위문 공연을 다니던 것, 프라이스 신부와 남한산성, 북한산, 도봉산 등을 하이킹 다녀온 것이 있다. 방학이면 피정을 다녀오기도 했고 성탄절은 모두의 축제였다.

최길자 수녀는 “신부님들과 교수님들의 지극한 관심과 사랑 속에 매일 매일이 신났다”라며 “몸이 아프면 집까지 차량으로 데려다 주신 프라이스 신부님, 저녁에 도서실에서 공부하고 있으면 따뜻한 찐빵을 사주셨던 박고영 신부님, 갑자기 비가 와 학생들이 현관에서 주춤거리고 있을 때 아코디언을 들고 나와 노래하시던 길로련 신부님, 기도를 가르쳐주신 헙스트 신부님과 늘 뒷일을 맡아 해주시던 오 수사님과 민 수사님들이 계셔서 우리는 참 행복했다”라고 추억했다.

김경자 수녀는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훨씬 대접받은 것 같다”라며 “당시 여학생들이 ‘학생’보다 ‘엄마’ 역할을 했다고도 생각하는 데, 서양인들과 한국인 직원 및 교수들이 서로 융화되도록 도왔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교수에게 깍듯하게, 서양인에게 다정하게’가 주된 행동 지침이었다고 덧붙였다.


학사 학위 1호의 주인공 김경자 수녀의 학위증

김의자 수녀는 “신부님들은 재채기를 할 때조차 주변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애쓰셨다”라며 “지금도 신부님들의 말씀이 생각날 때마다 와닿는다”라고 회고했다.

강연희 수녀는 “‘엄마야~’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도 신부님들이 잘해주셨다”라며 “제 키가 작아(149cm) 별명이 ‘서강 베이비’였는데 신부님이 교내 목수에게 요청해 작은 키에도 불편하지 않은 의자를 주문 제작해주기도 했다”라고 추억했다. 그러면서 “배려심과 열정을 지녔던 신부님 덕분에, 나를 위해 사는 것보다 남을 위해 사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생각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오인숙 수녀사제는 “학창 시절 신부님들의 진지함을 느꼈다”라며 “우리 생활 속에 늘 함께 계신 하느님을 몸소 보여주신 분들이 서강의 신부님들이었다”라고 말했다.

동기 수녀들은 한 목소리로 “우리는 참으로 사랑받았다”라며 “이러한 자각은 우리로 하여금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받았듯이 사랑하자고 우리를 이끌어준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엄마가 자식 생각하듯이 항상 서강을 위해 기도한다”라고 덧붙였다.


2010년 4월 18일 동문회관에서 개최한 강일회 홈커밍 행사에 60학번 동기 수녀들이 은사와 벗들과 함께 기념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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