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밝히는 서강인-이준모(83 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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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11-09 12:20 조회21,42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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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밝히는 서강인>
모교 교육목표 가운데 하나가 남과 함께, 남을 위하여, 남을 통하여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려는 시대적 사명을 지닌 인재 양성이다. 서강옛집이 이러한 교육목표가 구현된 조순실(76 사학), 박유미(81 사회), 이준모(83 독문 )동문을 만났다.
인천지역 노숙인들의 동반자
이준모(83 독문)
이준모(83 독문) 동문은 인천지역 노숙인들이 안전하게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말 그대로 온힘을 다하고 있다. 1998년 IMF 외환위기가 발생했을 때부터 노숙인들과 사회 취약계층을 위해 헌신해온 지 올해로 17년째다. 인천 계양구에 자리한 해인교회 목사이면서 사단법인 인천내일을여는집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 동문은 스스로를 ‘봉사하는 소임에 빠진 워커홀릭’이라 칭했다.
이 동문이 노숙인 자활에 투신하게 된 계기는 해인교회 신자 가운데 30%가 외환위기로 인해 실직한 상황이었다. 교인 실직자 위한 기도회를 여는 한편, 이력서 쓰는 요령을 지도했다. 뿐만 아니라 인천 지역 내 회사를 찾아다니면서 직접 구직 활동을 도왔다. 이 동문은 “나중에 회사 형편이 나빠져서 정리해고 해야 할 상황이 되면, 제가 추천한 사람부터 퇴직 처리되도록 나서겠다고 설득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교인 실직자 가운데 90%가 재취업에 성공했다. 이 정도 성과도 대단하지만 이 동문은 모든 실직자들을 도와야겠다는 포부를 품기에 이르렀다. 직업을 잃고 가정이 해체되어 노숙하기에 이른 이웃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작은 예수’로 살아가리라는 다짐
먹을 것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무료 급식을 매일 점심과 저녁에 실시했고, 푸드뱅크를 통해 음식을 나눠줬으며, 푸드마켓을 운영해 가난한 이들이 필요한 식재료와 생필품을 선택해서 가져가도록 했다. 무작정 노숙인을 돕겠다고 나서기 전에, 노숙인들이 사회복지사와 함께 전문 상담을 받은 뒤 필요한 도움이 이뤄지도록 거리상담과 가족상담 및 쪽방상담소을 실시했다. 잠자리가 필요한 이들에게 쉼터와 단신계층을 위한 원룸까지 장만해줬고, 일자리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취업 재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고용을 위한 사업’이라는 취지에서 재활용센터, 도농 직거래 상생사업단, 시니어 클럽 등을 개설했다. 식당 다니던 이에게는 식당을 차려줘서 일하도록 했고, 미장원에서 일하던 이에게는 지역 공공센터에 미용실을 마련해서 취업시켰다. 자녀를 동반한 노숙인들이 마음 놓고 일터에 나갈 수 있도록 아이를 위한 공부방을 마련했는데, 이는 지역아동센터로 자리 잡았다. 현재 인천 지역에만 거리 노숙인이 130여 명 되는 것으로 조사됐는데, 정기적으로 찾아가는 ‘아웃 리치’ 활동을 펼친다. 이 동문은 ‘사회안전망을 구축했다’라는 평가를 받아 보건복지부, 인천시, 법무부, 여성가족부로부터 표창을 받았고, 국무총리와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 사람이 먹고 사는 문제를 국가도 해결하기 어려운데 이 동문은 이를 해내고 있는 셈이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게 커다란 보람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저도 사람인지라 여러 번 도망가고 싶었어요. 셋째 아들이 칠삭둥이로 태어났는데, 남을 돕는 일이 너무 힘들었는지 아내가 임신 중 양수가 터져서 서둘러 출산했죠. 그럴 때마다 ‘작은 예수’로 살아가자고 아내와 다짐했던 기억을 되새긴답니다.”
2남 1녀를 둔 가장이지만 늘 다른 남을 돕는 데 헌신하다보니 이 동문은 가족에게 마음 가는 만큼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게 늘 미안하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자녀들의 소원이 ‘우리 가족끼리만 여행가는 것’이었는데 아직 실천하지 못했다. 그래도 함께 해인교회를 이끌어 가는 부인 김영선 목사가 든든한 동반자며, 고등학생인 막내아들 외에 큰딸과 작은딸은 모두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봉사 DNA는 유전되는 모양이다.
‘눌린자의 하느님’과 만난 대학시절
이 동문은 자신이 ‘현장형 사회복지’를 실천할 수 있게 된 계기는 모두 모교에서 공부한 덕분이라 말했다. 청소년 시절부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고교 시절 춘천의 명동에서 성경을 손에 들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구원을 얻을 것이리라”하고 외치며 다닐 정도였다. 모교 입학 이후에도 기독교 관련 동아리 활동에 나섰지만, 주로 성경에서 답을 찾는 공부 모임만으로는 늘 갈증을 느꼈다. 총학생회 홍보부장으로도 활동했지만, 하나님 뜻을 따르는 기독 학생으로서의 고민이 더욱 깊었다. 이 동문은 “박홍 신부님의 수업 ‘영성과 그리스도인’을 듣던 중 신부님이 피아노는 피아노 치면서 배운다고 말씀하신 게 인상 깊었다”라며 “예배와 예전에 참여하는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영과 만나고,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안고 눈물 흘리시는 하느님을 만나고, 이를 마음에 담고 실천하는 게 영성이라고 강의하신 데 감화됐다”라고 말했다.
“서강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배웠어요. 신부님들로부터 강의도 듣고, ‘해방자 예수’, ‘눌린 자의 하느님’, ‘신에게 솔직히(나와 너)’ 등 로욜라도서관 200번대 서적을 탐독하면서 철저한 실천을 강조하는 예수회 정신이 스며들었어요. 서강에서 종교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하다보니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이자 세상에 버려진 사람들의 친구더군요. 이에 신앙생활을 내면화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가난한 자들과 먹고 자고 같이 사는 게 중요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어요. 성서의 가르침과 영성이 결합된 셈인데, 돌이켜 보면 하나님이 저를 서강으로 이끈 것 같아요. 대학에서 해방자 예수를 만났으니까요.”
‘양심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고민에 ‘대학생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고민이 합쳐질 때쯤 경찰서 유치장에 일주일 동안 갇혔다는 이 동문은 유치장에서 ‘평생 화염병 던지며 살 수 있겠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예수처럼 살자고 마음먹었다. 모교 졸업 이후 한신대 신학대학원을 진학했고, 졸업 이후 인천 지역 민중 현장으로 떠났다. 인천 노동문화원에서 노동자에게 성서 강의도 하다가, 1994년 7월 1일 해인교회로 부임해서 지금까지 가난한 이들과 어울려서 울고 웃는 중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외환위기는 현재진행형
“어린 시절 지독하게 가난했던 게 아마 노숙인 돕는 계기가 된 건지도 모르겠어요. 강원도 춘천이 고향인데 어릴 때 어머니가 노점상을 운영했어요. 대학 입학 이후 하숙할 돈이 없어서 서강대 바로 앞에 있던 교회 기도실에서 살았답니다. 많이 굶고 다녔죠. 1학년 때부터 C관 식당과 ‘개집’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짜장면 빈 그릇 치웠어요. 왜 그렇게 가난했는지 모르겠지만 300원짜리 짜장면 사 먹을 돈이 없었답니다. 굶는 설움을 아니까 노숙자 심정 잘 알아요.”
남을 돕고 있는 이 동문이 가장 경계하는 건 자신이 남을 돕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란다. 이미 상처 받은 노숙인을 보듬어야하기에 자존감에 상처를 줘서는 안 된다는 취지에서다. 이에 옷이며 음식이며 생필품을 나눠주기도 하지만, 직접 골라갈 수 있도록 운영한다. 폐휴지 줍는 이들 30명을 모아 조합을 결성하고 안전조끼를 착용하게끔 해서 소속감을 갖게 하는 한편 주변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도록 했다. 모은 폐품은 고물상에서 킬로그램당 80원 쳐줄 때 조합 운영 수익금으로 킬로그램당 20원씩 더 쳐준다. 학교나 단체로부터 폐품을 전달 받거나 후원금이 들어올 때 나눠주는 셈이다. 이 동문은 “하나님 모시는 노숙인 쉼터에 오는 분들을 ‘식구’라고 부른다”라며 “우리는 밥상 공동체다”라고 말했다. 이 동문은 “‘내일은 여는 집’ 가훈이 ‘잘 먹고 잘 살자’인데, 한 가족처럼 서로 어울려서 지내는 게 최고다”라고 덧붙였다. 지난 추석 연휴에는 노숙인 식구들과 밤 까고 전 부치면서 닭싸움, 신발 던지기, 영화 보기, 민속촌 가기 등을 즐기며 가족처럼 지냈다.
가난한 이들에게 외환위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외환위기 시절 무료급식을 먹던 이들이 지금을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서 여전히 하루 평균 300명이 무료 급식소를 찾는다. 올 한해 노숙인을 비롯한 노인과 취약계층 1000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치약 회사 다니던 동문이 유통기한 얼마 안 남은 치약 3톤을 보내준 적이 있어요. 쪽방 주민은 물론 가난한 지역주민이 정말 잘 썼습니다. 내일을 여는 집에 동문들이 후원해주면 큰 도움이 됩니다. 재활용 센터도 운영하고 있으니 집에서 안 입는 옷이나 필요 없는 가전제품 및 가구를 보내주면 수선하고 수리해서 상품화가 가능해요. 이 과정에서 노숙인과 취약계층에게 일거리가 생기는가 하면, 발생하는 수익금은 모두 이들을 위해 쓸 수 있어요. 동문들의 따뜻한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사단법인 인천 내일을 여는 집
http://homelesshot.or.kr
후원계좌
농협중앙회 176-01-172902 (예금주 내일을여는집)
문의
032-556-8004
모교 교육목표 가운데 하나가 남과 함께, 남을 위하여, 남을 통하여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려는 시대적 사명을 지닌 인재 양성이다. 서강옛집이 이러한 교육목표가 구현된 조순실(76 사학), 박유미(81 사회), 이준모(83 독문 )동문을 만났다.
인천지역 노숙인들의 동반자
이준모(83 독문)
이준모(83 독문) 동문은 인천지역 노숙인들이 안전하게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말 그대로 온힘을 다하고 있다. 1998년 IMF 외환위기가 발생했을 때부터 노숙인들과 사회 취약계층을 위해 헌신해온 지 올해로 17년째다. 인천 계양구에 자리한 해인교회 목사이면서 사단법인 인천내일을여는집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 동문은 스스로를 ‘봉사하는 소임에 빠진 워커홀릭’이라 칭했다.
이 동문이 노숙인 자활에 투신하게 된 계기는 해인교회 신자 가운데 30%가 외환위기로 인해 실직한 상황이었다. 교인 실직자 위한 기도회를 여는 한편, 이력서 쓰는 요령을 지도했다. 뿐만 아니라 인천 지역 내 회사를 찾아다니면서 직접 구직 활동을 도왔다. 이 동문은 “나중에 회사 형편이 나빠져서 정리해고 해야 할 상황이 되면, 제가 추천한 사람부터 퇴직 처리되도록 나서겠다고 설득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교인 실직자 가운데 90%가 재취업에 성공했다. 이 정도 성과도 대단하지만 이 동문은 모든 실직자들을 도와야겠다는 포부를 품기에 이르렀다. 직업을 잃고 가정이 해체되어 노숙하기에 이른 이웃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작은 예수’로 살아가리라는 다짐
먹을 것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무료 급식을 매일 점심과 저녁에 실시했고, 푸드뱅크를 통해 음식을 나눠줬으며, 푸드마켓을 운영해 가난한 이들이 필요한 식재료와 생필품을 선택해서 가져가도록 했다. 무작정 노숙인을 돕겠다고 나서기 전에, 노숙인들이 사회복지사와 함께 전문 상담을 받은 뒤 필요한 도움이 이뤄지도록 거리상담과 가족상담 및 쪽방상담소을 실시했다. 잠자리가 필요한 이들에게 쉼터와 단신계층을 위한 원룸까지 장만해줬고, 일자리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취업 재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고용을 위한 사업’이라는 취지에서 재활용센터, 도농 직거래 상생사업단, 시니어 클럽 등을 개설했다. 식당 다니던 이에게는 식당을 차려줘서 일하도록 했고, 미장원에서 일하던 이에게는 지역 공공센터에 미용실을 마련해서 취업시켰다. 자녀를 동반한 노숙인들이 마음 놓고 일터에 나갈 수 있도록 아이를 위한 공부방을 마련했는데, 이는 지역아동센터로 자리 잡았다. 현재 인천 지역에만 거리 노숙인이 130여 명 되는 것으로 조사됐는데, 정기적으로 찾아가는 ‘아웃 리치’ 활동을 펼친다. 이 동문은 ‘사회안전망을 구축했다’라는 평가를 받아 보건복지부, 인천시, 법무부, 여성가족부로부터 표창을 받았고, 국무총리와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 사람이 먹고 사는 문제를 국가도 해결하기 어려운데 이 동문은 이를 해내고 있는 셈이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게 커다란 보람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저도 사람인지라 여러 번 도망가고 싶었어요. 셋째 아들이 칠삭둥이로 태어났는데, 남을 돕는 일이 너무 힘들었는지 아내가 임신 중 양수가 터져서 서둘러 출산했죠. 그럴 때마다 ‘작은 예수’로 살아가자고 아내와 다짐했던 기억을 되새긴답니다.”
2남 1녀를 둔 가장이지만 늘 다른 남을 돕는 데 헌신하다보니 이 동문은 가족에게 마음 가는 만큼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게 늘 미안하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자녀들의 소원이 ‘우리 가족끼리만 여행가는 것’이었는데 아직 실천하지 못했다. 그래도 함께 해인교회를 이끌어 가는 부인 김영선 목사가 든든한 동반자며, 고등학생인 막내아들 외에 큰딸과 작은딸은 모두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봉사 DNA는 유전되는 모양이다.
‘눌린자의 하느님’과 만난 대학시절
이 동문은 자신이 ‘현장형 사회복지’를 실천할 수 있게 된 계기는 모두 모교에서 공부한 덕분이라 말했다. 청소년 시절부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고교 시절 춘천의 명동에서 성경을 손에 들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구원을 얻을 것이리라”하고 외치며 다닐 정도였다. 모교 입학 이후에도 기독교 관련 동아리 활동에 나섰지만, 주로 성경에서 답을 찾는 공부 모임만으로는 늘 갈증을 느꼈다. 총학생회 홍보부장으로도 활동했지만, 하나님 뜻을 따르는 기독 학생으로서의 고민이 더욱 깊었다. 이 동문은 “박홍 신부님의 수업 ‘영성과 그리스도인’을 듣던 중 신부님이 피아노는 피아노 치면서 배운다고 말씀하신 게 인상 깊었다”라며 “예배와 예전에 참여하는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영과 만나고,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안고 눈물 흘리시는 하느님을 만나고, 이를 마음에 담고 실천하는 게 영성이라고 강의하신 데 감화됐다”라고 말했다.
“서강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배웠어요. 신부님들로부터 강의도 듣고, ‘해방자 예수’, ‘눌린 자의 하느님’, ‘신에게 솔직히(나와 너)’ 등 로욜라도서관 200번대 서적을 탐독하면서 철저한 실천을 강조하는 예수회 정신이 스며들었어요. 서강에서 종교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하다보니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이자 세상에 버려진 사람들의 친구더군요. 이에 신앙생활을 내면화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가난한 자들과 먹고 자고 같이 사는 게 중요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어요. 성서의 가르침과 영성이 결합된 셈인데, 돌이켜 보면 하나님이 저를 서강으로 이끈 것 같아요. 대학에서 해방자 예수를 만났으니까요.”
‘양심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고민에 ‘대학생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고민이 합쳐질 때쯤 경찰서 유치장에 일주일 동안 갇혔다는 이 동문은 유치장에서 ‘평생 화염병 던지며 살 수 있겠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예수처럼 살자고 마음먹었다. 모교 졸업 이후 한신대 신학대학원을 진학했고, 졸업 이후 인천 지역 민중 현장으로 떠났다. 인천 노동문화원에서 노동자에게 성서 강의도 하다가, 1994년 7월 1일 해인교회로 부임해서 지금까지 가난한 이들과 어울려서 울고 웃는 중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외환위기는 현재진행형
“어린 시절 지독하게 가난했던 게 아마 노숙인 돕는 계기가 된 건지도 모르겠어요. 강원도 춘천이 고향인데 어릴 때 어머니가 노점상을 운영했어요. 대학 입학 이후 하숙할 돈이 없어서 서강대 바로 앞에 있던 교회 기도실에서 살았답니다. 많이 굶고 다녔죠. 1학년 때부터 C관 식당과 ‘개집’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짜장면 빈 그릇 치웠어요. 왜 그렇게 가난했는지 모르겠지만 300원짜리 짜장면 사 먹을 돈이 없었답니다. 굶는 설움을 아니까 노숙자 심정 잘 알아요.”
남을 돕고 있는 이 동문이 가장 경계하는 건 자신이 남을 돕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란다. 이미 상처 받은 노숙인을 보듬어야하기에 자존감에 상처를 줘서는 안 된다는 취지에서다. 이에 옷이며 음식이며 생필품을 나눠주기도 하지만, 직접 골라갈 수 있도록 운영한다. 폐휴지 줍는 이들 30명을 모아 조합을 결성하고 안전조끼를 착용하게끔 해서 소속감을 갖게 하는 한편 주변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도록 했다. 모은 폐품은 고물상에서 킬로그램당 80원 쳐줄 때 조합 운영 수익금으로 킬로그램당 20원씩 더 쳐준다. 학교나 단체로부터 폐품을 전달 받거나 후원금이 들어올 때 나눠주는 셈이다. 이 동문은 “하나님 모시는 노숙인 쉼터에 오는 분들을 ‘식구’라고 부른다”라며 “우리는 밥상 공동체다”라고 말했다. 이 동문은 “‘내일은 여는 집’ 가훈이 ‘잘 먹고 잘 살자’인데, 한 가족처럼 서로 어울려서 지내는 게 최고다”라고 덧붙였다. 지난 추석 연휴에는 노숙인 식구들과 밤 까고 전 부치면서 닭싸움, 신발 던지기, 영화 보기, 민속촌 가기 등을 즐기며 가족처럼 지냈다.
가난한 이들에게 외환위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외환위기 시절 무료급식을 먹던 이들이 지금을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서 여전히 하루 평균 300명이 무료 급식소를 찾는다. 올 한해 노숙인을 비롯한 노인과 취약계층 1000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치약 회사 다니던 동문이 유통기한 얼마 안 남은 치약 3톤을 보내준 적이 있어요. 쪽방 주민은 물론 가난한 지역주민이 정말 잘 썼습니다. 내일을 여는 집에 동문들이 후원해주면 큰 도움이 됩니다. 재활용 센터도 운영하고 있으니 집에서 안 입는 옷이나 필요 없는 가전제품 및 가구를 보내주면 수선하고 수리해서 상품화가 가능해요. 이 과정에서 노숙인과 취약계층에게 일거리가 생기는가 하면, 발생하는 수익금은 모두 이들을 위해 쓸 수 있어요. 동문들의 따뜻한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사단법인 인천 내일을 여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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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032-556-8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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