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총장님, 총장님, 우리 총장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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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8-03 11:26 조회16,48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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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한국화 이후 첫 한국인 총장, 서인석 신부
예수회 미국 위스콘신 관구 소속이던 한국 예수회는 1985년 2월 22일 독립 관구가 되었고 학교 운영도 한국인 신부들이 맡게 되었다. 1984년 취임한 존 D. 메이스 총장의 재임 기간이 1년6개월에 불과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 한국화 과정에서 갈등도 없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서인석 신부가 제6대 총장으로 취임하여 모교 역사상 최초의 한국인 총장이 되었다. 서인석 신부는 부임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강대의 특징은 가족적 분위기입니다. 지금까지 이룩된 가족적 연구 분위기, 스승과 제자의 친밀성 등을 계속 키워나가는 것이 제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경향신문> 1985.1.8.)
서인석 신부는 총장직에서 물러난 뒤 1994년부터 대구가톨릭대 교수로 재직하다 은퇴하였고 67세를 일기로 2005년 선종하였다. 서인석 신부는 성서학자·신학자로서도 탁월했다. 저서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분도출판사, 1979)은 80년대에 기독교 사회운동에 관심 있는 많은 청년들 사이에서 필독서로 읽혔다. ‘우리 시대 민중의 고난과 사회 불의에 대해서 신앙의 원천인 성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책이었다.
뜨거운 이슈를 몰고 다닌 ‘스타 총장’, 박홍 신부
제7~8대 총장을 역임한(1989년 1월~1997년 1월) 박홍 신부는 명실상부한 ‘스타 총장’이었다. 박홍 총장에 필적하는 대중적 인지도를 누린 대학교 총장은 매우 드물다. 박홍 총장의 재임 기간은 국내적으로는 80년대 사회변혁운동의 물결이 잦아드는 시기였고, 세계적으로는 소련 및 동구 공산권 붕괴와 함께 동서(東西) 냉전과 이데올로기 대립이 해체되는 시기였다.
‘총장들 모아 놓고 검찰총장하고 법무부장관하고 초청해서 얘기했지. “학생들 풀어줘라. 정의를 향한 순수한 열정에서 뛰어든 대학생이 대다수다.” 검찰총장이 “증거가 없지 않느냐”라고 하더라고. 증거를 댔지. 교도소에서 내가 학생들에게 손도장을 받았거든. “주체사상,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진정 답이 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답이 못 됩니다”라고 적고 손도장 찍게 한 거지. 폭탄주 10잔 돌았을 무렵 증거를 들이댔는데, 한 일주일 뒤 학생들 대부분이 석방됐어요.’
박홍 전 총장이 2014년 〈서강옛집〉과 가진 위와 같은 인터뷰 내용이 그의 ‘광폭 행보’를 말해준다. 이른바 ‘주사파’(주체사상파) 논란을 중심으로 뜨거운 이슈를 불러일으킨 박홍 총장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엇갈리기도 하지만, 학교 발전을 향한 열정과 실행력이 대단했으며 특유의 카리스마와 친화력을 바탕으로 학교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화제를 몰고 다녔다.
예수회 미국 위스콘신 관구 소속이던 한국 예수회는 1985년 2월 22일 독립 관구가 되었고 학교 운영도 한국인 신부들이 맡게 되었다. 1984년 취임한 존 D. 메이스 총장의 재임 기간이 1년6개월에 불과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 한국화 과정에서 갈등도 없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서인석 신부가 제6대 총장으로 취임하여 모교 역사상 최초의 한국인 총장이 되었다. 서인석 신부는 부임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강대의 특징은 가족적 분위기입니다. 지금까지 이룩된 가족적 연구 분위기, 스승과 제자의 친밀성 등을 계속 키워나가는 것이 제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경향신문> 1985.1.8.)
서인석 신부는 총장직에서 물러난 뒤 1994년부터 대구가톨릭대 교수로 재직하다 은퇴하였고 67세를 일기로 2005년 선종하였다. 서인석 신부는 성서학자·신학자로서도 탁월했다. 저서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분도출판사, 1979)은 80년대에 기독교 사회운동에 관심 있는 많은 청년들 사이에서 필독서로 읽혔다. ‘우리 시대 민중의 고난과 사회 불의에 대해서 신앙의 원천인 성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책이었다.
뜨거운 이슈를 몰고 다닌 ‘스타 총장’, 박홍 신부
제7~8대 총장을 역임한(1989년 1월~1997년 1월) 박홍 신부는 명실상부한 ‘스타 총장’이었다. 박홍 총장에 필적하는 대중적 인지도를 누린 대학교 총장은 매우 드물다. 박홍 총장의 재임 기간은 국내적으로는 80년대 사회변혁운동의 물결이 잦아드는 시기였고, 세계적으로는 소련 및 동구 공산권 붕괴와 함께 동서(東西) 냉전과 이데올로기 대립이 해체되는 시기였다.
‘총장들 모아 놓고 검찰총장하고 법무부장관하고 초청해서 얘기했지. “학생들 풀어줘라. 정의를 향한 순수한 열정에서 뛰어든 대학생이 대다수다.” 검찰총장이 “증거가 없지 않느냐”라고 하더라고. 증거를 댔지. 교도소에서 내가 학생들에게 손도장을 받았거든. “주체사상,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진정 답이 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답이 못 됩니다”라고 적고 손도장 찍게 한 거지. 폭탄주 10잔 돌았을 무렵 증거를 들이댔는데, 한 일주일 뒤 학생들 대부분이 석방됐어요.’
박홍 전 총장이 2014년 〈서강옛집〉과 가진 위와 같은 인터뷰 내용이 그의 ‘광폭 행보’를 말해준다. 이른바 ‘주사파’(주체사상파) 논란을 중심으로 뜨거운 이슈를 불러일으킨 박홍 총장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엇갈리기도 하지만, 학교 발전을 향한 열정과 실행력이 대단했으며 특유의 카리스마와 친화력을 바탕으로 학교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화제를 몰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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