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동문회 특집-고국에 계신 동문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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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5-22 10:18 조회15,85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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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 계신 동문 여러분, 이제야 겨우 우리 동문만의 사무실을(학교 도움이긴 하지만) 갖고 동문과 모교를 위한 조그만 일이라도 하려고 시동하고 있는 참입니다만, 매해 동문회는 적자가 나왔었고 올해도 예외일 순 없는 것입니다. 국내에서는 장학기금을 국외에서는 동문기금을 마련한다면 우린 조금 떳떳한 서강의 졸업생으로서 마음 흐뭇할 것이 아닙니까. 해외에 계시고, 또 제가 주소를 갖고 있는 80여 명이 모두 협조해주신다면 30~100달러로 100만 원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71년 2월 25일, <서강옛집> 제46호에 실린 간절한 호소다. 1971년 당시까지 졸업생, 즉 동문 숫자는 1000여 명이었으니 동문회가 주소를 파악하고 있는 해외 거주 동문 숫자가 80여 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전체 동문 가운데 해외 동문이 적어도 10% 이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1975년 5월, 미국 보스턴 지역 동문들이 야유회를 갖고 개교 15주년을 맞이한 모교를 위해 소액이나마 기여하자는 뜻을 모아서 150달러를 동문회로 보내왔다. 이를 계기로 재미 동문회를 조직하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해외 동문회 결성 및 활성화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일이었다. 재미 서강대학교 동문회는 1977년 6월에 결성되었다. 당시 노버트 J. 트레이시 신부의 미국 방문을 계기로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에 거주하는 동문 30여 명이 모인 것을 계기로, 재미 동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로스앤젤리스 지역에 ‘재미 서강동문회’를 결성하게 되었던 것. 당시 회장은 이한일(60 경제), 총무는 황극만(62 경제) 동문이었다.
1985년 4월 15일에 발간된 <서강옛집> 개교 25주년 기념 특집호(제135호)는 ‘서강동문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를 특집 기사로 내보냈다. 당시 기준으로 동문 숫자는 총 8549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해외 거주 및 유학이 14.8%를 차지했다. 1987년 조사에서도 해외 거주 동문이 15.7%, 숫자로는 1470명으로 나타났다. 해외 유학이 점점 더 쉬워졌다는 점, 90년대 중후반 이후 세계화 물결이거셌다는 점을 감안하고,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가 성장해온 추이를 고려하면 해외 동문 비중은 ‘적어도’ 15% 이상이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에는 특히 그 중반기를 전후로 해외 지부 결성이 줄을 이었다. 미국에서는 중서부, 남가주, 뉴욕, 북가주, 콜럼버스, 필라델피아, 세인트루이스, 조지아 지부가 생겼고 그 외 지역에서도 리야드 동문회, 도쿄지부, 재독 서강동문회, 재영서강동문회, 브라질 동문회, 캐나다 동문회, 재싱가폴 동문회 등이 신설되었다.
이러한 해외 지부들은 ‘눈에서 멀어져도 마음에서는 더 가까워지는’ 후배 사랑을 실천해왔으니 동문 장학금이다. ‘미주지역 총동문회 장학금’(존 P. 데일리 추모장학금으로 변경),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동문회 장학금’, ‘홍콩동문회 장학금’, ‘재중 화동동문회 장학금’, ‘재인니 서강대 동문회 장학금’, ‘사이공 동문회 장학금’, ‘뉴욕 동문회 해외연수 장학금’ 등 미국, 중국, 독일, 베트남, 인도네시아, 홍콩 등 활발한 모임을 갖는 지부들은 송년회나 신년회를 열 때마다 장학금을 모아 동문장학회로 보내오고 있다.
특히 미주 지역 동문회는 동문 수가 가장 많은 만큼 기금 모금에서도 늘 선도적이어서 각 지역마다 자체적인 기부를 진행해 온 끝에 2004년, 북가주지부 회장이었던 이상수(78 전자) 동문의 헌신적인 활동에 힘입어 비영리법인인 ‘Sogang Alumnai America’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주 지역 동문들은 손쉽게 장학 사업에 참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부에 따른 세제혜택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많은 동문들이 모교 서강을 ‘일찍부터 국제화된 대학’으로 일컫곤 한다. 총동문회도 마찬가지여서 전 세계에 걸쳐 활동 중인 동문들과 해외 지부들이야말로 ‘국제화된 총동문회’의 근간이자 실핏줄들이다. 해외 거주의 이유는 각자 다르고 체류 기간도 다양하지만 그 모든 차이를 넘어서게 만드는 단 하나의 이름이자 이유는 ‘서강’이다.
1971년 2월 25일, <서강옛집> 제46호에 실린 간절한 호소다. 1971년 당시까지 졸업생, 즉 동문 숫자는 1000여 명이었으니 동문회가 주소를 파악하고 있는 해외 거주 동문 숫자가 80여 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전체 동문 가운데 해외 동문이 적어도 10% 이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1975년 5월, 미국 보스턴 지역 동문들이 야유회를 갖고 개교 15주년을 맞이한 모교를 위해 소액이나마 기여하자는 뜻을 모아서 150달러를 동문회로 보내왔다. 이를 계기로 재미 동문회를 조직하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해외 동문회 결성 및 활성화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일이었다. 재미 서강대학교 동문회는 1977년 6월에 결성되었다. 당시 노버트 J. 트레이시 신부의 미국 방문을 계기로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에 거주하는 동문 30여 명이 모인 것을 계기로, 재미 동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로스앤젤리스 지역에 ‘재미 서강동문회’를 결성하게 되었던 것. 당시 회장은 이한일(60 경제), 총무는 황극만(62 경제) 동문이었다.
1985년 4월 15일에 발간된 <서강옛집> 개교 25주년 기념 특집호(제135호)는 ‘서강동문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를 특집 기사로 내보냈다. 당시 기준으로 동문 숫자는 총 8549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해외 거주 및 유학이 14.8%를 차지했다. 1987년 조사에서도 해외 거주 동문이 15.7%, 숫자로는 1470명으로 나타났다. 해외 유학이 점점 더 쉬워졌다는 점, 90년대 중후반 이후 세계화 물결이거셌다는 점을 감안하고,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가 성장해온 추이를 고려하면 해외 동문 비중은 ‘적어도’ 15% 이상이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에는 특히 그 중반기를 전후로 해외 지부 결성이 줄을 이었다. 미국에서는 중서부, 남가주, 뉴욕, 북가주, 콜럼버스, 필라델피아, 세인트루이스, 조지아 지부가 생겼고 그 외 지역에서도 리야드 동문회, 도쿄지부, 재독 서강동문회, 재영서강동문회, 브라질 동문회, 캐나다 동문회, 재싱가폴 동문회 등이 신설되었다.
이러한 해외 지부들은 ‘눈에서 멀어져도 마음에서는 더 가까워지는’ 후배 사랑을 실천해왔으니 동문 장학금이다. ‘미주지역 총동문회 장학금’(존 P. 데일리 추모장학금으로 변경),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동문회 장학금’, ‘홍콩동문회 장학금’, ‘재중 화동동문회 장학금’, ‘재인니 서강대 동문회 장학금’, ‘사이공 동문회 장학금’, ‘뉴욕 동문회 해외연수 장학금’ 등 미국, 중국, 독일, 베트남, 인도네시아, 홍콩 등 활발한 모임을 갖는 지부들은 송년회나 신년회를 열 때마다 장학금을 모아 동문장학회로 보내오고 있다.
특히 미주 지역 동문회는 동문 수가 가장 많은 만큼 기금 모금에서도 늘 선도적이어서 각 지역마다 자체적인 기부를 진행해 온 끝에 2004년, 북가주지부 회장이었던 이상수(78 전자) 동문의 헌신적인 활동에 힘입어 비영리법인인 ‘Sogang Alumnai America’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주 지역 동문들은 손쉽게 장학 사업에 참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부에 따른 세제혜택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많은 동문들이 모교 서강을 ‘일찍부터 국제화된 대학’으로 일컫곤 한다. 총동문회도 마찬가지여서 전 세계에 걸쳐 활동 중인 동문들과 해외 지부들이야말로 ‘국제화된 총동문회’의 근간이자 실핏줄들이다. 해외 거주의 이유는 각자 다르고 체류 기간도 다양하지만 그 모든 차이를 넘어서게 만드는 단 하나의 이름이자 이유는 ‘서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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