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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학번의 삼민광장 추억-김윤성, 이율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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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중 작성일08-12-18 11:47 조회14,3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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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8일, 모교 곳곳에는 교지 <서강>(西江) 56호가 놓였습니다.

1년에 2번 발행되는 교지는 쉽게 지나치기 쉬운 것들에 대한 문제제기로 재학생은 물론 많은 동문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입니다. 특히 이번 호에는 '지나간 미래 : 삼민광장에 드리는 짧은 묵념'을 주제로 하는 두 동문의 기고가 실려 눈길을 끌었습니다. 총동문회는 교지서강편집위원회의 허락을 얻어 두 동문의 글을 원문 그대로 옮깁니다.

이제는 곤자가 플라자와 지하주차장으로 바뀐 삼민광장. 두 동문이 기고한 글을 통해 삼민광장에 얽힌 추억, 그리고 변화한 지금에 관한 상념을 떠올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편집자>



<첫번째 글>

쓸쓸한 가을날에 잃어버린 삼민광장을 생각한다 - 김윤성(99국문)


오늘은 쌀쌀한 가을날의 부산, 금정산성에서 엽서를 띄웁니다. 이곳 금정산성은 사적 제215호로 길이 1만 7336m, 면적 21만 6429평입니다. 동래온천장의 북서쪽 해발고도 801m의 금정산정에 있는 한국 최대의 산성이었으나, 현재는 약 4km의 성벽만이 남아 있습니다. 산성의 위치 ·규모로 보아, 신라 때 왜적을 막기 위하여 축조된 것으로 보이지만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동행한 친구 녀석은 해마다 가을이면 이 산성에 오릅니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추억은 있는 법이죠. 이 녀석에게는 가장 힘들던 시절 큰 힘이 되어준 사람과 가을의 일출을 보았던 이곳이 추억의 장소라는군요. 유독 체력이 약한 저는 아직도 거칠어진 숨을 고르지 못하고 수년전 가을, 금정산성에서..로 시작하는 뻔한 레퍼토리의 추억담을 듣고 있습니다. 
 
아! 혹시 당신에게 말한 적이 있던가요? 제 추억의 장소는 삼민광장이라고요. 대학시절의 소중한 이야기들은 언제나 삼민광장이 배경이 되곤 합니다. 햇살 따뜻한 날이면 친구와, 후배와 삼민광장에 앉아서 몇 시간이고 되새김질을 해댈 수도 있습니다. 지금 제 옆의 친구처럼 말이죠. 다만 녀석은 아직 앉아서 이야기하며 추억할 장소를 가졌고 저는 이제 그곳을 잃어버렸다는 차이가 생겨버리긴 했습니다. 
 
얼마 전 정말 오랜만에 학교에 갔습니다. 오래도록 보고 싶었던 당신은 여전히 활기차고 밝았지만 그런 당신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삼민광장은 정작 사라지고 없더군요. 이곳이 정말 내가 그리워하던 그 곳이 맞는지 아득할 정도였으니까요. 최대한 생생하게 떠올려보려 애썼지만, 그곳은 마치 언제 잔디밭이 있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낯선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새로 생긴 지하상가라는군요. 이곳에서 삼민광장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곤자가의 역습’일까요.>


삼민광장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내, 없어진 것이 삼민광장이라는 물리적 공간만은 아니었기 때문을 알았습니다. 을씨년스럽다 느껴질 정도로 변해버린 그곳을 생각하며 저는, 푸석한 얼굴로 상실의 공백과 단절의 상흔이 어지럽게 뒤섞인 ‘유해’를 수습합니다.
 
첫 번째, 추억의 단절, 공유의 상실입니다.
 
새내기들은 이제 삼민광장에서의 추억을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대동제, 문우제의 흥겨운 주점판이나 즐거운 야외수업 따위를 기대하기는 어렵겠죠. 따뜻한 봄볕에 수업을 잊고 잔디밭에 누워 있기도 하고 막걸리 한잔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힘들어질 것입니다. 지금처럼 청년광장, 메이저코트, 엠마오뚜껑과 같은 곳에 찢기듯 내몰려서 주점을 열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혹은 그리하여 서로의 추억은 많이 다를 것입니다. 저는 호기심 많은 얼굴을 한 어린 친구에게 꿈길을 더듬듯 넋두리를 하곤 합니다. 시간이 더 지나면 지난 추억에 대한 이야기는 복학생 늙은이의 전혀 공감할 수 없는 푸념이 되어 버리겠죠. 청년광장이 그러했듯 몇 장의 사진으로 기억 될 뿐이겠지요.


<떠들썩한 막걸리판이 사라진 삼민광장에, 환경동아리 ‘풍뎅이’는 지하캠퍼스 착공식을 바라보며 사과를 깎아먹고 있었다. 지금은 이 동아리도 해체된 상태다. 그들의 슬프고도 조용한 저항마저 ‘흘러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두 번째는 자연과 인간의 단절, 쉴 곳의 상실입니다. 이제 서강에 남아있는 자연스런 잔디밭은 없습니다.




<이렇게 풀들이 자라나는데, 한쪽에서는 그들의 죽음을 축하하고 있었습니다. ‘망나니’격인 포크레인도 참석했군요>

 
딱딱한 콘크리트위에 억지로 뿌리내려짐을 당한 인공잔디밭 뿐입니다. 5월이면 청년광장에서는 잔디보호를 한답시고 사방을 둘러싼 출입금지 간판과 긴 출입방지용 끈이 당신을 막아 설 것입니다. 이에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몰래 들어가려다 경비아저씨에게 쫓겨나거나 높아진 건물들 사이에 숨어있는 좁고 어두운 벤치에 엉덩이를 대는 일 정도일 겁니다.

삼민광장에서 그늘이 되어 주던 나무들은 일찌감치 뽑히고 흩어져 여기저기 심어졌을 테고요. 새로 생겼다는 곤자가 플라자 앞에도 아주 작은 잔디가 있긴 했습니다. 그 좁은 곳에 몸을 우겨넣은 사람들은 삼민을 기억하거나 들어본 적이 있을까요? 새로 지었다는 민자 기숙사는 하늘을 반쯤 가리고 있었고, 이 푸른 하늘을 무색케 하는 잿빛 학교에는 공사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 사이로 무표정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스쳐갔고, 비어있는 벤치들은 제각기 바깥만을 향하고 있을 뿐이었죠. 정문 쪽 솔밭도 건물 신축 때문에 사라진다는 이야기까지 들으니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역사의 단절, 혁명의 상실입니다. 의기촌을 갈아엎고 로욜라 광장이라는 곳을 만든 덕분에 06학번부터는 의기촌을 모를 것입니다.


<어느 겨울날의 의기촌>


 “‘꼬꼬마 동산’에서 만나자”고 점심 약속을 잡는 새내기들을 보고 당황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이들은 대리석 벤치에 밀려 쓸쓸히 구석을 지키고 있는 의기선배 기념비를 보지 못하고 지나치거나 우연히 발견한다 해도 누군지 모르겠지요. 매년 의기제가 열리고는 있지만 어떤 마음으로,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을까요? 민족, 민주, 민중이라는 삼민(三民)정신의 기념(?)이라는 삼민광장도 이제 잊혀질 것 같습니다.

가장 격렬한 시대에 가장 열심히 싸워왔던 선배들의 자취들이 서강에서 씻겨 내려가는군요. 당신은 왜 여기가 의기촌인지, 왜 여기가 삼민광장인지 궁금해 할 이유마저 없어진 셈입니다. 그리고는 사회의 낙오자(?)가 되지 않으려 도서관으로, 토익학원으로 발걸음을 옮기겠지요.

가끔은 아득하게 혁명을 이야기하며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떠올린다 해도, 이내 당신의 턱밑에 엄습한 현실을 부여잡아야 하니까요. 이런 현상을 ‘시대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주류들의 자유겠지만, 역사가 파헤쳐진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삼민광장이 상실됨과 동시에 부쩍 얄팍해지는 역사 앞에서, "내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기억을 기초로 하는 정의이다"라는 카뮈의 말을 생각합니다.




친구녀석의 끝날것 같지 않던 추억담이 드디어 끝났군요. 이 금정산성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내년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이제 슬슬 내려 가 봐야겠습니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가던 때보다는 훨씬 쉽겠지요. 체력이 약한 저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겠지만 어쩐지 씁쓸합니다. 산을 오르는 것처럼 한걸음 한걸음 만들어졌던 아름다운 추억이, 푸릇하던 자연이, 뜨거웠던 역사가 산을 내려가는 것처럼 쉽게 사라져 가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보고싶은 당신,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길 이곳에서 기원합니다.




<두번째 글>

삼민광장, 실용주의, 그리고 서강 - 이율빈(99사학)


99년, 삼민광장이라는 이름은 새내기인 내겐 꽤나 어려운 각인 과정을 거쳤던 것 같다. 내가 삼민(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이라는 생소한 구호들을 알고 있을 리도 만무했거니와 동기 및 선배들의 입에서 나온 삼민광장이라는 이름은 내 귀에 ‘선민광장’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민이라는 이름이든 선민이라는 이름이든 명칭을 떠나 내 머릿속에 자리잡게 된 삼민광장의 이미지는 ‘캠퍼스의 낭만’이 펼쳐지던 곳이었다.

“오후에 수업 있니?”
“네. 3시에 읽기 수업인데요?”
“응 째고 삼민광장으로 나와라. 막걸리 먹게.”

선배들과의 대단히 짧은 몇 마디의 대화 끝에 우리는 화창한 봄날의 어떤 오후들을 답답한 강의실이 아니라 삼민광장의 잔디 위에 풀어 놓곤 했다. 물론 개중엔 수업을 빠지고 잔디밭에 막걸리를 먹으러 나온 사실을 별스레 생각하지 않는 부류도 있었지만 결석이라는 모험에 직면하여 근심을 토로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우리가 기나긴 입시생활 끝에 대학생이 되어 비로소 캠퍼스에서 자유와 낭만을 누릴 자격을 얻게 된 새내기였다손 치더라도, 여전히 비자율적인 고등학생의 의무감을 떨치지 못해 부모님께 저조한 성적을 변호해야 할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우리 학교는 성적표가 집으로 발송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의 자랑스런 선배들은 이런 새내기들의 걱정어린 질문에 능수능란한 솔루션을 즉석에서 제시해 주곤 했다. FA를 받게 되어 부모님이 FA에 대해 물어보신다면 Fantastic A라는 임기응변을 통해 위기를 탈출하라는 얘기나, 제적경고를 받아서 부모님을 모시고 와 선서를 해야 할 상황이 되더라도 평소에 자주 가던 옹고집 이모에게 부탁하면 어머니 대역을 해주신다는 얘기들은 당시 우리에겐 어둠 속의 빛(?)이자 자기합리화의 매우 유용한 기제였다.


<어느 봄날의 삼민광장. 곳곳에서 벌어진 막걸리판에 FA경고를 집계하는 행정팀은 분주해졌을 것이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선배·동기들은 비로소 삼민광장의 푸르고 경사진 잔디 위에 엉덩이를 깔고 둘러앉을 수 있게 된다. 삼민광장에서의 막걸리판이 만들어 내는 풍경들은 보통 몇가지로 압축되는데, 먼저 게임을 통해 술잔을 돌리고 이후 술이 오르면 말뚝박기나 닭싸움으로 취기를 한껏 올린다.

그리고는 과방에서 들고 온 청테이프 덕지덕지 붙은 기타를 누군가 품에 넣는 순간 지금까지 마셨던 알콜들을 연료로 해서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경사진 삼민광장 굴러내려가기 시합을 마지막으로 그날의 낮술판이 종료된다. 물론 해가 지고 나면 근처 술집에서 본격적으로 2라운드 술판이 시작되는 건 필연적인 수순이다.

그렇다고 삼민광장이 ‘술 먹는 공간’만은 아니었다. 공강 시간에 햇볕 쬐며 책을 읽을 때 삼민광장만한 도서관은 없었고, 술이 아니라 짜장면을 시키면 노천식당이 따로 없었다. 삼민광장 둘레로 심어진 나무 그늘 아래에서는 캠퍼스 커플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고 대동제 때는 훌륭한 공연장이 되기도 했다.

또 여럿이 모여 수건돌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즉석 소풍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서강대의 삼민광장은 흔히 얘기하는 ‘캠퍼스의 낭만’이 펼쳐지던 장이자 대학문화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대학문화에서 ‘자유와 낭만’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IMF 구제금융 이후 새롭게 제안된 새로운 대학상(像)은 “대학만 잘 가면 취직과 연애 모두에 성공할 수 있다”고 수험생들을 독려하시던 우리네 부모님들의 말씀들이 무색하게도, “대학 진학 후에도 학점과 토익점수와 인턴십 경력에 민감해야만 하는” 대학이었다.

나의 대학생활은 이러한 변화가 상당부분 진행되고 있던 9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고, 내 운명 역시 삼민광장에서의 ‘자유와 낭만’ 만을 그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조건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삼민광장의 운명 역시 나와 같은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삼민광장의 운명을 얘기하기에 앞서 청년광장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96년 이전의 청년광장 모습>


삼민광장이야 앞서 늘어놓은 대로 나의 대학시절까지만 해도 서강인들에겐 적어도 추억 한자락씩은 안겨 줄 만큼 여전히 넓고 푸근한 품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청년광장의 운명은 그렇지 못했다. 나 역시 원래의 청년광장의 모습은 사진으로밖에 본 적이 없지만 선배들이 자랑스레 청년광장에 대한 추억을 읊던 기억은 생생하다.

선배들에 의하면 97년 주차장 공사 전까지 청년광장은 서강인들의 쉼터이자 만남의 광장이었다고들 했다. 당시 청년광장은 지금과는 달리 좌우에 난 길보다 낮은 지형이었다고 하는데, 하교길에 청년광장에 앉아 있는 여러 무리들을 관찰하다 아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가 있으면 즉시 내려가 합류하던 일들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삼민광장이 후문 근처에 위치했다는 특성이 있는 데 반해 청년광장은 명실상부한 서강대를 대표하는 광장이었다.

그러나 청년광장은 교내 주차공간 부족이라는 구실로 인해 대규모 공사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어떤 선배가 포크레인 앞에 드러누워 공사를 막으려 하기도 했다는 전설적인 얘기들이 전해지지만, 확실한 것은 예전의 청년광장은 현재의 청년광장으로 변모해 버렸다는 사실이었고 서강대 하면 청년광장이던 시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는 사실 역시 그러했다. 주차공간 역시 실용적인 차원에서 서강대에 필요한 부분이었겠지만 그로 인해 서강인들은 ‘다른 필요한 부분’을 잃게 된 것이다.

삼민광장의 운명은 청년광장의 그것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삼민광장이 사라진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내가 군대를 갔다 와서 복학했던 바로 그 학기였다.




주차공간의 부족으로 인해 삼민광장 일대를 뒤집고 지하에는 주차장, 지상에는 민간투자 학사 및 근린시설이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이윽고 공사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1년을 넘는 오랜 공사 끝에 내가 낮잠자고, 누워서 책읽고, 친구들과 짜장면을 시켜 먹고, 술을 먹고 굴러 내려가던 그 경사 심하던 잔디밭에는 햄버거와 커피를 파는 상가와 예쁘게 구획된 대리석들이 들어서 있었다. 마치 거짓말처럼.
 
삼민광장은 실용적인 요청에 의해 운명을 맞았다. 학내 주차공간의 부족, 그리고 ‘서강발전’을 위한 기업식 경영 방침이 제출한 민자유치의 명분은 서강으로 하여금 삼민광장을 청년광장처럼 ‘밀어버리’게끔 하였고, 그 실용주의의 열매는 지금 확인할 수 있듯이 유명 커피전문점과 고가의 민자 기숙사이다.

여기에서 이러한 결과들에 대해 옳다 그르다라는 평가를 쉽게 내릴 수는 없다. ‘서강발전’에 혼신을 다하고 있는 재단 관계자들이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을 일개 졸업생이 함부로 평가하는 것은 자칫 무책임한 언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하주차장이 생겨서 교내 주차공간 부족 문제가 어느정도 해결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경축’할 일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서강이 얼마나 이 새로운 대리석 건축물들이 담지한 실용성을 원했던 것인지, 또 새로운 실용적 혜택들이 과연 혜택인지에 대해서는 서강인 모두가 한번쯤 곱씹어 볼 문제가 아닌가 한다. 혹시 삼민광장 터에 새로이 자리잡은 시설들은 이미 콘크리트와 대리석으로 피복된 서울 거리를 지겹도록 밟아 온 우리에게 동일한 것들의 반복이 되지는 않는가.

만약 ‘서강발전’을 부르짖으며 야심차게 진행했던 캠퍼스 개발들이 진정한 ‘발전’과 거리가 먼 것일 가능성은 없는가. 대학 생활 8년 간 하도 들어서 이젠 아예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편해 보이기까지 한 각종 대학 평점, 그렇게도 중요하다던 대학 평점은 삼민광장이 ‘서강발전’을 위해 그 따뜻하던 품을 포크레인에 내 주고 있던 순간에도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과연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광경은 실용성의 열매가 분명한가. ‘서강발전’을 위한 길이 확실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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