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지금 서강은 - 4.교정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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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3-09 10:57 조회31,41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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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지금 서강은...>
많은 동문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모교를 방문할 기회가 거의 없다. 어떤 계기로 오랜만에 모교를 찾은 동문들은 노고산은 의구하고 본관이 옛 모습으로 반겨주지만, 많은 것이 바뀐 캠퍼스에 격세지감을 느끼곤 한다. 캠퍼스뿐만이 아니다. 모교의 학사제도를 비롯한 다양한 사항들을 우연한 기회에 전해 듣거나 하면, 생소한 것들이 적지 않다.
2015년 지금 서강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수업종은 계속해서 울리고 있을까? 독후감 제출함 앞에는 마감시각에 쫓기는 후배들이 원고지 칸을 채우고 있을까? 삼민광장, 청년광장은 옛 모습 그대로일까? 로욜라도서관 옆 연못의 거북이와 잉어는 어떻게 됐을까? 새로 생긴 전공에는 무엇이 있을까? 학사제도는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다양한 궁금증을 풀어보자.
4.떠났으되 결코 떠나지 않은 분들 _ 교정의 동상
교정에서 만나는 순교성인들, 학교 설립과 발전의 주역들
1839년(헌종 5)에 일어난 제2차 천주교 박해사건, 즉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파리외방전교회에서 파견된 앵베르, 모방, 샤스탕 신부는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모래사장에 버려진 시신을 20여일 만에 신자들이 거두어 노고산, 그러니까 모교가 자리 잡은 산에 매장하여 4년이 흘렀다. 이후 교우 박 바오로와 아들 박순집 베드로가 자신들의 선산인 삼성산(서울 관악구)으로 이장해 1843~1901년까지 모시다가 명동성당 지하묘소로 옮겼다. 이들 세 신부 외에도 많은 순교자들이 노고산에 가매장되었다가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으니, 오늘날 노고산은 많은 가톨릭 신자들로부터 순교 성지로 중시된다.
모교 정문을 지나 언덕을 오르다 보면 가브리엘관 앞에 조각상 세 개가 정문 쪽을 바라보며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 순으로 모방 신부, 앵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를 기리는 순교 현양비다. 모방(1803~1839) 신부는 이 땅에 온 최초의 서양인 신부로 1836년 초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입국한 후 전교에 헌신했다. 그는 김대건 신부에게 세례를 행하였고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를 마카오로 유학시켰다. 가운데 위치한 앵베르(1796~1839) 주교는 조선에 교회가 설립된지 반세기 만에 맞이한 첫 주교였다. 샤스탕(1803~1839) 신부 역시 갖은 어려움 속에서 전교 사업에 애썼다.
한편 본관 앞에는 서강 탄생의 주역, 테오도르 게페르트(1905~2002) 신부의 동상이 인자한 미소를 띠고 서 있으며 유해는 로욜라동산에 봉안되어 있다. 2003년 7월 13일 당시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한 가운데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2002년 98세의 일기로 선종한 뒤 열린 장례미사도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했다. 서강의 설립자인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는 1954년 한국으로 건너와 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내고 개교를 이끌었으며 이사장 재직 시절에도 직접 교단에 서서 학생들과 만나고자 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마지막으로 찾아뵈었을 때 게페르트 신부는 “한국과 한국교회, 그리고 한국의 제자들을 위해 늘 기도한다”라고 말했다.
본관과 로욜라 도서관 사이 로욜라 동산에는 서강의 초대 총장 존 P. 데일리(1923~2011) 신부와 만날 수 있다. 1961년 한국 땅을 밟은 이후 영문학을 가르치며 모교 제2대 학장을 거쳐 1970년 종합대 승격 후 제1~2대 총장을 맡은 분이다. 쉼터에서 산책로 쪽으로 좀 더 들어가면, 베이슬 프라이스(1923~2004) 신부와 김태관(1919~1990) 신부의 흉상과 만날 수 있다. 2004년 81세를 일기로 선종한 프라이스 신부는 1957년 한국으로 파견되어 서강대 설립을 이끌었고 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선종하기 직전 학기까지도 학부 학생들에게 역사와 영문학을 강의했다. 1939년 한국인 최초의 예수회원이 된 김태관 신부는 모교 초대 이사를 지냈고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1990년 강의 도중 선종할 때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학생과 학교를 위하여 헌신했다.
많은 동문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모교를 방문할 기회가 거의 없다. 어떤 계기로 오랜만에 모교를 찾은 동문들은 노고산은 의구하고 본관이 옛 모습으로 반겨주지만, 많은 것이 바뀐 캠퍼스에 격세지감을 느끼곤 한다. 캠퍼스뿐만이 아니다. 모교의 학사제도를 비롯한 다양한 사항들을 우연한 기회에 전해 듣거나 하면, 생소한 것들이 적지 않다.
2015년 지금 서강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수업종은 계속해서 울리고 있을까? 독후감 제출함 앞에는 마감시각에 쫓기는 후배들이 원고지 칸을 채우고 있을까? 삼민광장, 청년광장은 옛 모습 그대로일까? 로욜라도서관 옆 연못의 거북이와 잉어는 어떻게 됐을까? 새로 생긴 전공에는 무엇이 있을까? 학사제도는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다양한 궁금증을 풀어보자.
4.떠났으되 결코 떠나지 않은 분들 _ 교정의 동상
교정에서 만나는 순교성인들, 학교 설립과 발전의 주역들
1839년(헌종 5)에 일어난 제2차 천주교 박해사건, 즉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파리외방전교회에서 파견된 앵베르, 모방, 샤스탕 신부는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모래사장에 버려진 시신을 20여일 만에 신자들이 거두어 노고산, 그러니까 모교가 자리 잡은 산에 매장하여 4년이 흘렀다. 이후 교우 박 바오로와 아들 박순집 베드로가 자신들의 선산인 삼성산(서울 관악구)으로 이장해 1843~1901년까지 모시다가 명동성당 지하묘소로 옮겼다. 이들 세 신부 외에도 많은 순교자들이 노고산에 가매장되었다가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으니, 오늘날 노고산은 많은 가톨릭 신자들로부터 순교 성지로 중시된다.
모교 정문을 지나 언덕을 오르다 보면 가브리엘관 앞에 조각상 세 개가 정문 쪽을 바라보며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 순으로 모방 신부, 앵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를 기리는 순교 현양비다. 모방(1803~1839) 신부는 이 땅에 온 최초의 서양인 신부로 1836년 초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입국한 후 전교에 헌신했다. 그는 김대건 신부에게 세례를 행하였고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를 마카오로 유학시켰다. 가운데 위치한 앵베르(1796~1839) 주교는 조선에 교회가 설립된지 반세기 만에 맞이한 첫 주교였다. 샤스탕(1803~1839) 신부 역시 갖은 어려움 속에서 전교 사업에 애썼다.
한편 본관 앞에는 서강 탄생의 주역, 테오도르 게페르트(1905~2002) 신부의 동상이 인자한 미소를 띠고 서 있으며 유해는 로욜라동산에 봉안되어 있다. 2003년 7월 13일 당시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한 가운데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2002년 98세의 일기로 선종한 뒤 열린 장례미사도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했다. 서강의 설립자인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는 1954년 한국으로 건너와 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내고 개교를 이끌었으며 이사장 재직 시절에도 직접 교단에 서서 학생들과 만나고자 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마지막으로 찾아뵈었을 때 게페르트 신부는 “한국과 한국교회, 그리고 한국의 제자들을 위해 늘 기도한다”라고 말했다.
본관과 로욜라 도서관 사이 로욜라 동산에는 서강의 초대 총장 존 P. 데일리(1923~2011) 신부와 만날 수 있다. 1961년 한국 땅을 밟은 이후 영문학을 가르치며 모교 제2대 학장을 거쳐 1970년 종합대 승격 후 제1~2대 총장을 맡은 분이다. 쉼터에서 산책로 쪽으로 좀 더 들어가면, 베이슬 프라이스(1923~2004) 신부와 김태관(1919~1990) 신부의 흉상과 만날 수 있다. 2004년 81세를 일기로 선종한 프라이스 신부는 1957년 한국으로 파견되어 서강대 설립을 이끌었고 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선종하기 직전 학기까지도 학부 학생들에게 역사와 영문학을 강의했다. 1939년 한국인 최초의 예수회원이 된 김태관 신부는 모교 초대 이사를 지냈고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1990년 강의 도중 선종할 때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학생과 학교를 위하여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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