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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70신방)동문의 장영희 교수 추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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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5-15 09:12 조회11,7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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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 이름난 정훈(70 신방) 동문이 오랜 기간 살갑게 지낸 고(故) 장영희 동문을 애도하는 글을 보내왔습니다. 두 사람은 서강을 창립한 고(故) 프라이스 신부님을 오랫동안 모셔온 '화요 가족'의 주요 멤버였습니다. 


장영희, 프라이스 신부님 찾아 떠나다

정  훈(70 신방, 방송PD, 한국DMB 회장)




“프라이스 신부님은 모두가 알다시피 나의 공식 내비게이터였다. 지독한 방향치인 내가 서강대가 있는 신촌을 벗어나면 정신없이 헤매는 것을 아시는 신부님은 (서강대 옆) 거구장 가는 길도 오른쪽 왼쪽 가르쳐주셔야 마음을 놓으셨고, 시내에 갈 일이 있으면 순전히 내비게이터 역할을 하기 위해 함께 내 차를 타고 가주시기도 했다. 그래서 신부님은 내 차의 방향 내비게이터 역할을 하셨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내 인생의 내비게이터였다.”

 

이 글은 2004년 9월 29일 선종하신 프라이스 신부님 추모문집에 장영희 교수가 쓴 것이다.(<물처럼 공기처럼-프라이스 신부를 말하다> 112쪽) 두 사람은 생전에 각별했다. 한 사람은 1923년 미국에서 태어나 57년 한국에 와서 서강대를 세우고, 최초로 협동조합과 건강한 노사문화를 심으며 어려운 이들을 말없이 도와오다 이 땅에 묻히셨고, 또 한사람은 1급 장애인을 환영해준 서강대에서 마음껏 가르치며 뛰놀았는데 주옥같은 글과 함께 순진무구한 웃음과 명징한 감수성을 남긴 채 엊그제 이승을 떠났다.

 

나는 감사하게도 두 사람 가까이에 있었다. 신부님은 내가 학창시절부터 선종하실 때까지 30년간 매주 화요일날 “이유 없이” 만나왔다.(그래서 ‘Tuesday with Morrie’처럼 ‘화요가족’이라 불렸다.) 매주 화요일에 보태서 모든 가족생활사와 관심사도 함께 나누어오던 터라 신부님의 끔찍한 애제자이자 내 1년 후배이기도 한 장 교수에 관한 일상사 역시 항상 곁에 있는 듯했다.

 

신부님은 우리에게 장영희 교수에 관한 에피소드를 전하실 때, 평온하신 평소 표정과 달리 무척 신나서, 실제 얼굴색도 홍조를 띠며 말씀하시는데 그 즐거움과 애틋함은 곁에서 보아도 부러움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영희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안식년이라 뉴욕에 갔잖아? 그런데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났는데도 안 고쳐주더래요. 그래서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동시에 소송을 내서 이겼다잖아요? 하하하,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나도 장애인 다큐멘터리를 많이 제작해봐서 절감했지만 종국적으로는 장애를 가진 당사자 스스로가 주장하고 일어서야 한다.

 

뉴욕 영웅담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신부님의 또 다른 말씀 - “엊그제 영희가 급하다고 연락 왔는데 서울 시내에서 운전하는 중에 길을 잃었대요. 내가 놀라서 어디냐니까, 이대 앞이래 글쎄. 그래서 침착해라, 이대 앞은 네가 항상 출근하는 서강대 근처야.” 파안대소 하시며 왼쪽 오른쪽을 가르쳐주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똑똑한 장영희 교수가?’하고 의심스러운 분은 글머리의 장영희 추모글을 보면 이해하시게 된다.

 

2004년은 두 사람에게 또 각별한 해였다. 그 해는 프라이스 신부님 사제서품 50주년이었다. 기념모임을 준비하며 내가 신부님께 초청 리스트를 여쭈었다. “바쁘신데 여러분 귀찮게 해드리지 말고…그래도 영희는 힘들어도 올거야.” 그 자리에서 두 분은 (사진처럼)해맑게 웃고, 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로를 칭찬하고 그랬으나, 6월 그 때 두 분은 암에 걸려 있었다.

 

이미 2001년 유방암 수술 완치 통보를 받고도 장영희 교수는 다시 척추암의 덫에 걸렸다. 신부님은 대장암 말기였는데 본인이 미련스러울 정도로 병원출입을 삼가면서 평온한 표정을 잃지 않고 계시던 중이었다. 9월 들어 성모병원에 입원하신 신부님은 영희의 건강을 염려하며 보고 싶다고 하셨으나 그 때 장 교수는 세브란스에서 치열하게 항암 치료 중이었다.

 

그 해 10월 초하루 신부님 영결미사를 하루 앞둔 전날 밤, 나는 장 교수 병실을 찾아가 당신이 해야 할 조사를 내가 한다고 보고하였다. “그래요, 신부님이 정 선배에게 조사해달라고 유언하셨다면서요. 절 기다리시라고 전해주세요. 저는 이제 제 삶의 내비게이터를 잃어버렸어요….”

 

이튿날 영결미사에서 나는 장 교수의 안부와 신부님 사랑을 손님들께 보고한 뒤 “안녕하세요, 하느님…”으로 시작하는 조사를 읽기 시작했다. 울음을 깨물며 듣는 사람들이나, 읽는 나나, 머지않은 두 분의 만남을 신앙심과 무관하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상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거기 오신 분들은 두 분과 함께 무언가 공통분모 심성을 가진 분들이니까 말이다.

 

놀랍게도 선생 장영희는 2005년 캠퍼스에 생환하였다. “캠퍼스에 돌아오니까, 살 것 같아요. 우리 학생들하고 호흡하니까 생명력을 얻나 봐요.” 2008년 9월 27일 본관 앞 청년광장에서 열린 홈 커밍 데이 행사에 사랑하는 동생과 조카들을 데리고 참석했을 때, 야외에서 힘들지 않느냐고 묻는 내게 장 교수가 대답한 말이다.

 

과학이 밉다. 기적이 꺾인 날, 세브란스 빈소에서 동생 영주 씨를 보고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언니 따라다니며 보살피느라 애 많이 쓰셨지요, 했더니 “아니요, 저의 기쁨이었는데요. 언니 곁에서 삶을 배웠어요.”라고 대답했다. 오빠 장병우 씨는 프라이스 신부님 이야기를 하며 이렇게 보탰다, “신부님이 내비게이터였다는데, 쓰시던 지팡이를 돌아가시기 직전에 영희에게 주셨답니다.”

 

하늘 길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 영희가 내비게이터를 만나러 가는데 지팡이가 도움이 되겠지? 아니, 먼저 알고 신부님이 문 앞에 나와 계시는 게 아닐까? 수필가 장영희는 이 글 첫머리 추모문의 맨 마지막 말을 이렇게 맺었었다. “(…)그리고 언젠가 혹시 나도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천국의 문 앞에서 시계를 보시면서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신부님을 만날 수 있겠지….”

                                                   
*사진은, 2004년 6월 프라이스 신부 금경축 축하모임에서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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