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살리는 서강농부들1 - 경북 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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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12-02 13:24 조회13,80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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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문경
박찬교(77사학) | 장경영(80경영),허영실(82종교) 부부 | 장석두(84경영) 동문
“연봉은 매년 오르는데, 나는 시들어가고 있었다.” 얼마 전 어떤 기사에서 전직 엔지니어가 밝힌 귀농(歸農)의 이유다. 언젠가부터 귀농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서강동문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고, 또 어떻게 살 지는 대부분 감감하다. 그래서 서강옛집이 나섰다. 문경, 평창, 아산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생명을 일구고 있는 서강농부들을 만났다. 서강농부들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귀농의 모든 것!
누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 장 반장’이 나타난다
경북 문경은 주흘산, 대야산, 희양산, 황장산 등 명산들이 빚어낸 가파른 고개와 수려한 계곡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백두대간을 병풍처럼 두른 천혜의 경관에 넋을 잃고 시골 길가에 차를 멈춰 세운다. 선선한 바람이 이랑을 지으며 황금빛 들녘을 쓸고 지나간다. 가슴이 뭉클하다. 이 창창한 가을하늘과 어머니 대지, 그리고 땀 흘려 일하는 농부들이 곡식을 영글게 하고 생명을 키운다.
가은터미널에 차를 세우고 약속장소인 읍내 식당을 찾았다. 박찬교(77 사학), 장경영(80 경영), 허영실(82 종교), 장석두(84 경영) 동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취재를 빙자해 문경 동문회를 연 것이다. 박찬교 동문은 1995년부터 괴산에서 농사짓다가 근래에 문경으로 삶터를 옮겼다. 장경영-허영실 동문은 가톨릭학생회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1999년 이곳에 정착했다. ‘막내’ 장석두 동문은 귀농 3년차다.
귀농(歸農)을 말한다… “ 이만 하면 족하잖아요”
“취재는 무슨…. 막걸리나 한 사발 하고 가요.”
꼬치꼬치 호구조사가 이어지자 장경영 동문이 버럭 한다. ‘취재’인지 ‘취조’인지 손발이 오그라지고 민망하단다. 그렇다고 호락호락 물러설 취재진이 아니다. 짐짓 그냥 동문회 온 거라고 눙치고는 슬며시 ‘귀농(歸農)’ 이야기를 꺼냈다. 어차피 귀농이라는 공통점으로 모인 자리다. 어색하게 돌아가기보다는 ‘단도직입’ 훅 들어가는 게 상책이다.
“요즘 귀농에 대한 관심이 뜨겁죠?”
“많이들 찾아와서 물어요. 얼마 전에도 누가 다녀갔는데…. 사실 별 거 없어요. 우린 있는 대로 살거든요. 그래서 쓸 데 없는 소리 말고 직장이나 잘 다니라고 했어요. (웃음)”
걸걸한 과 직속 선배의 말에 장석두 동문이 실제로는 이랬을 것이라며 거든다.
“야, 임마! 꿈 깨! 안 돼!”
이런 냉정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장경영 동문은 있는 대로 산다고 했지만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귀농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막막하다. 특히 시골에서 어떻게 먹고 살지 걱정이다. 귀농에 실패하고 도시로 돌아가는 이들도 대부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다. 뼈 빠지게 일하는데 벌이는 적다보니 삶이 고단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장 동문의 생각은 어떨까?
“사람들이 귀농은 하고 싶은데 도시처럼 생활하려고 해요. 이 밥상 좀 봐요. 푸짐하잖아. 오늘 이렇게 모여서 잘 먹고 이야기 나누는 거, 이런 게 귀한 겁니다. 뭘 더 가지려고 해요? 들일을 하다가 함께 막걸리 한 잔씩 걸치고, 가끔은 어우러져서 풍물 치며 놀고, 그러면 되는 거지. 이만 하면 족하잖아요.”
아직 연차가 짧은 장석두 동문도 조심스럽게 덧붙인다.
“적게 벌고 적게 쓰면 돼요. 거꾸로 하려니까 정착하기 어렵죠.”
이야기가 후끈 달아오른다. 내친 김에 시골에서 아이 키우는 문제도 건드려보았다. 자녀교육은 귀농 하면 떠오르는 화두 중의 하나다.
“자식농사도 작물과 다르지 않아요. 아이들은 산과 들에서 뛰어놀며 자라요. 어른이 할 일은 그 생명력을 믿으며 기다리는 겁니다.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자식 농사에요. 아이를 어떻게 하기보다 내 허물을 돌아보고 고쳐나가는 게 먼저죠.”
장경영 동문은 툭툭 던지듯이 가볍게 말한다. 하지만 듣는 이에게는 무게감 있게 다가온다. 논리보다는 묘한 울림이 있다.
“귀농? 그냥 가는 거예요. 에라, 몰라, 하고 가는 거죠. 귀농하겠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저더러 미친놈이랬어요. 그런데 아직까지 별 탈 없이 살고 있잖아요. 귀농은 머리 굴리는 게 아니라 내가 살면서 만드는 거 아닐까요.”
같은 맥락에서 그의 아내인 허영실 동문은 “(억지로) 답을 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고, 문경 동문회의 정신적 지주 박찬교 동문은 ‘결단의 문제’라고 정리한다. 굉장한 철학이 있는 것도, 성공의 비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햇수로 15년, 20년씩 땅을 일군 사람들에게 귀농은 특별할 것이 없는 삶 그 자체이다. 가물거리는 긴 시간이 흘러 이제 ‘귀농’이라는 단어조차 무색하다.
영생의 집 원장님 ? ‘깽판’ 치고 ‘바보’가 되다
읍내에서 식사를 마치고 찾아간 곳은 희양산 아래 원북리 장경영 동문의 집. 정확히 말하자면 살림집 앞에 있는 어느 노조 연수원이었다. 하룻밤 유숙하겠다는 취재진의 염치없는 부탁에 부랴부랴 숙소를 마련한 것이다. 본의 아닌(?) ‘민폐 취재’다. 문경의 밤은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무르익어 갔다.
장 동문은 현재 희양산우렁쌀작목반 반장을 맡고 있다. 그는 지금껏 농약과 화학비료를 안 쓰는 친환경 농법을 고수해왔다. 백두대간의 허리 격인 희양산에는 선종의 구산선문 도량인 봉암사가 자리 잡고 있다. 유서 깊은 희양산 일대가 장 동문의 노력 덕택에 청정지대로 바뀌어가고 있다.
“여기는 원래 화전민 마을이었어요. 생판 모르는 타지 사람이 와서 친환경 한다고 설치니 시선이 고울 리 있겠어요? 귀농 초창기엔 뺨도 맞고 그랬죠. 물론 마을 주민들도 치도곤 많이 당했고…. 저도 ‘깽판’ 좀 칠 줄 알거든요. (웃음) 지금은 온 동네가 친환경단지 다 됐어요. 주민들도 대부분 협조를 잘 해주시죠.”
장경영-허영실 부부는 1999년 원북리에 둥지를 틀었다. 귀농하자고 꼬신 쪽은 아내인 허 동문이었다. 장 동문은 불콰해진 얼굴로 그 시절을 회고했다.
“이 사람이 시골에서 살자고 했어요. 월급쟁이, 10년 이상 하지 말라고…. 결국 직장은 11년 다니고 그만뒀죠. 막판에 노조위원장하며 IMF 정리해고 막느라 1년 더 한 겁니다.”
이 마을은 탁아소 활동을 오래 한 허영실 동문이 공동육아모임을 통해 알게 됐다. 귀농인에게 정착지는 배우자나 마찬가지다. 흔히들 배우자감을 만나면 이 사람이구나, 싶은 느낌이 온다고 한다. 두 사람이 이곳을 찾았을 때도 그랬다고. 부부는 지금의 희양분교 근처에 단칸방을 빌렸다. 남의 집 더부살이로 첫단추를 꿴 것이다.
귀농은 쓰라린 실패의 경험과 함께 시작되었다. 두 사람이 처음에 관심을 쏟은 일은 대안학교였다. 취재진이 하룻밤 신세 진 연수원이 알고 보니 예전에 대안학교를 준비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같이 준비하던 동료가 중도에 떠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부부는 다섯 아이들(입양아 포함)과 함께 덩그러니 남겨졌다. 설상가상으로 동네에 이상한 소문이 돌면서 살림을 차린 단칸방에서도 쫓겨나야 했다.
“마을주민들이 ‘영생의 집’, ‘영생교’라고 불렀어요. 아이들을 입양하거나 위탁해서 우르르 몰려다니니까 고아원이나 사이비종교 쯤으로 여긴 겁니다. 새로 집을 짓는데 건축자재 영수증을 ‘영생의 집 원장’ 앞으로 끊어줬어요. 아내가 ‘여보, 이게 뭐야?’ 하고 어이없어 했죠. 결국 그 집은 주민들의 반대로 허가가 나지 않았습니다.”
힘든 여건에서도 장경영 동문은 꾸역꾸역 농사를 지어나갔다. 덜컹거리는 트럭을 몰고 들일 나갈 때마다 그는 막걸리 몇 통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이른바 ‘논둑막걸리’다. 동네 못자리 논에서 어르신들과 막걸리 나눠 마시며 농사를 배우고 삶의 지혜를 얻었다. 간혹 ‘깽판’ 칠 때는 믿고 따르는 신부님을 찾아갔다. ‘남 가르치려 들지 말고 같이 바보가 되시라’는 말씀에 무릎을 치며 마음을 다스렸다.
“귀농인들이 초창기에 느끼는 고충 중의 하나가 바로 마을주민들과 서먹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시골마을에는 힘든 세월을 겪어온 분들이 많습니다. 쉽게 친해지는 게 더 이상하죠. 마을주민들이 나한테 잘하길 바라기 전에 내가 그 분들에게 어떻게 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해요.”
허영실 동문은 남편이 밥시간만 되면 사라진다고 푸념한다. 틈만 나면 남의 집을 기웃거린다는 것이다. 장 동문은 그저 어르신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할 뿐이란다. 말동무도 해주고 목욕도 시켜드린다. 누구 한 분 세상을 떠나면 며칠씩 앓아눕는다. 그는 작목반도 이 분들이 있기 때문에 굴러간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희양산 아래 원북리는 귀농인들과 마을주민들이 함께 친환경단지를 일궈나가고 있다. 그 중심에 장경영 동문이 있다. 이 동네에서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장 반장’이 나타난다.
“어느 순간 저 자신을, 제 것을 내려놓게 됐어요. 앞만 쳐다보지 않고 옆도 좀 돌아보고,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어도 기다리고,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놓치지 않으려고 해요. 한창 때는 잘난 척하고 떠들었는데 지금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귀농은 부부 금슬을 돋운다?
이튿날 아침, 밤늦도록 막걸리 잔을 기울였는데도 희한하게 숙취가 없다. 허영실 동문이 끓여준 무죽 덕분이다. 무 말고는 특별한 재료도 안 보이는데 어쩌면 그렇게 개운하고 담백한 맛을 내는지…. 취재진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한 그릇 더!”를 외쳤다.
장경영 동문은 작목반장답게 아침부터 고추 수매 일정을 조정하느라 바쁘다. 희양산우렁쌀작목반은 친환경 농법으로 쌀, 잡곡, 고추, 들깨 등을 생산한다. 친환경에 대한 장 동문의 기준은 엄격하다. 몰래 농약을 친 작목반 회원은 걸리는 즉시 아웃이다.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한번은 소비자가 전화를 걸어 “벌레 먹고 못생긴 고추를 보냈다”라고 항의한 적이 있다. 그는 정중하게 “앞으로 농약 친 예쁜 고추 사 드시고 그 고추는 돌려보내 달라”라고 청했다. 소비자는 화를 내는 대신 아파트 부녀회에서 나눠먹겠다며 고추 10근을 더 주문했다고. 장 동문은 농약으로 주변 생명을 죽일 바엔 차라리 자신이 벌레 먹고 죽는 게 낫단다. 이쯤 되면 친환경 농법이 아니라 ‘곤조농법’이라고 할 만하다.
취재를 마치고 마을을 빠져나가는 길. 차가 출렁거리면서 먼지가 날린다. 이 길에도 재미난 사연이 있다. 도로포장을 할 수 있는데 장 동문이 거부한 것이다. 읍에서 예산까지 편성했고 담당주사가 읍소를 하는데도 아랑곳없다. 사람은 흙을 밟고 살아야 한다며 꼿꼿하게 버티는 중이다. 그가 생각하는 친환경단지는 논밭뿐 아니라 길까지 아우른다. 희양산을 벗어난 취재진은 박찬교 동문의 산골짜기 황토집에 들렀다. 호미 하나씩 들고 산을 맨다는 박 동문 내외와 ‘브런치 새참’을 함께 했다.
다음 행선지는 장석두 동문 내외의 비탈진 과수원이었다. 사과를 베어 물고 오미자 작황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다보니 해가 중천이다. 화기애애했던 1박2일 문경 동문회도 어느덧 막을 내릴 시간….
마지막으로 세 부부가 모여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했다. 팔짱 끼고 꾸밈없이 웃는 모습이 절로 미소를 자아낸다. 그러고 보니 문경 동문회의 시작과 끝을 이들은 짝을 지어 함께 했다. 남편 따로, 아내 따로 엇박자가 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귀농이 부부 금슬을 돋우나 보다. 찰칵! 이 사진과 함께 문경 귀농 동문회도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성싶다.
희양산우렁쌀작목반 - 장경영, 허영실 동문 부부
품목 - 쌀, 잡곡, 고추, 들깨, 들기름, 건나물 등
전화 - 054-571-6367
휴대전화 - O1O-2763-6376
다음카페 - 희양산우렁쌀 cafe.daum.net/urungssal
미르샘 농원 - 장석두 동문
품목 - 사과, 사과즙, 오미자, 곶감
휴대전화 - O1O-3325-2O73
<장경영·허영실 동문부부>
<부인과 함께, 박찬교 동문>
<과수원을 운영하는 장석두 동문의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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