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부부 1호 이수조, 하문자 부부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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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중 작성일14-11-17 10:17 조회31,761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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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에 만나 함께 걸은 54년 아직도 모자라 더 오래 걷고 싶어라
서강에서 처음 만나 5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걸어온 서강의 1회 동문이자 1호 캠퍼스 커플인 이수조(60 경제), 하문자(60 사학) 동문부부를 찾았습니다. 서강과 두 사람만의 인연으로도 모자라 딸 셋에 사위 한 명까지 서강인으로 묶여진 대표적인 서강가족. 졸업 후 36년간 섬유회사, 은행, 무역회사, 건설회사 등 우리나라 산업화의 궤적을 따라 산업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남편, 그런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자녀를 키우고 모교와 동문회에서 또 지역에서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며 열심히 살아온 아내. 70대 초반 나이의 중산층 한국인, 서강인의 전형인 두 동문을 가을비가 쏟아지던 날 경기도 이천 율면의 자택에서 만났습니다. 인터뷰하기가 쑥스럽다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마음은 벌써 50여 년 전으로 돌아간 듯 두 부부의 얼굴에는 설렘이 가득했습니다. 인터뷰는 표정훈(88 철학) 편집인과 정명숙(83 불문), 조광현(88 경제) 편집위원이 진행했으며 조광현 편집위원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하문자 동문이 후배들을 위해 정성껏 준비한 점심식사와 창밖에 내리는 빗소리를 즐기며 선후배간의 문답은 화기애애하게 풀려나갔습니다.
표정훈(이하 표) 두 분이 공식적으로 서강의 첫 캠퍼스 커플이시지요?
이수조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우리 외에 염영일(60 물리), 이화자(60 영문) 동문부부가 있지만 염영일 동문은 2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기 때문에 졸업을 못했으니 1호이자 유일한 1회 동문 커플이지요.
표 두 분은 언제 어떻게 만나셨나요?
이수조 아내가 사학과를 졸업했지만 입학 당시에는 저와 같은 경제학과 학생이었습니다. 집안에 우환이 겹치는 바람에 제가 학교에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그때 제가 학사경고 받을 것을 우려한 경제학과 김병국 교수님의 부탁으로 아내가 제게 노트도 빌려주고 보충수업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가족을 잃은 슬픔에 학교생활을 힘들어한 제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지요. 데이트 비용도 모두 아내가 부담했었을 정도예요.
정명숙(이하 정) 개교 당시 학생 수가 많지 않았을 텐데 연애하시면서 다른 학생들의 눈총을 받지는 않으셨는지요?
이수조 160명이 입학하여 59명이 졸업할 만큼 정말 소수였고 1학년 내내 모든 학생이 교양과목을 수강하며 함께 어울려 다녔기 때문에 눈치를 채지 못했어요. 아침에 등교할 때도 마치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행동했고 특히 정재관(60 영문), 김인기(60 경제), 문정재(60 사학) 등과 다섯 명이 늘 붙어 다녔기 때문에 더더욱 눈치 채지 못했을 겁니다. 당시 사회분위기가 아무리 여대생이라도 누구와 사귄다는 소문이 나면 좋지 않으니까 아내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제가 조심한 부분도 있고요. 무슨 이야기였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둘이서 수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신촌에서 광화문까지 무던히도 많이 걸었지요. 그래도 전혀 힘들거나 지치지 않았어요.
정 귀하게 자란 딸이 형편이 어려운 동기생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집안의 반대는 없었나요?
하문자 어머니께서 가톨릭 신자냐고 물으셔서 그렇다고 하니 별 반대가 없으셨어요. 남편은 서강에서 저를 만나 영세를 받았어요. 그리고 남편이 졸업 후 군에 입대했기 때문에 집에서 혼기가 찬 제게 다른 사람과 결혼하라 할까봐 남편 군 입대 기간 동안 저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서 남편이 제대할 때쯤 돌아왔습니다. 이수조 씨를 기다리기 위해 피신을 한 셈이지요.
이수조 저는 정말 서강에서 하문자라는 인생 최대, 최고의 선물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문자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원래 수녀가 되려고 했었어요. 경제학과에 입학한 것도 아는 수녀님께서 당가수녀가 필요하니 제게 경제학을 공부하고 수녀원에 입회할 것을 권유하셔서 그 뜻에 따른 거예요. 입학한 후 동기 여학생들과 광안리에 있는 수녀원을 방문하기로했는데 출발 당일 아침에 오빠가 여자들이 함부로 지방으로 놀러 가면 안된다고 야단을 치며 못 가게 해서 저만 못갔어요, 그때 갔던 동기 여학생들은 수녀원에서 입회 번호표를 받고 졸업 후 모두 수녀가 되었어요. 제 동기 여학생 14명 중 8명이 수녀가 되었으니까요. 나머지는 졸업 후 해외로 나갔고…. 아무나 수녀가 되는 건 아닌가 봐요,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그 후 저는 이수조 씨를 만나 연애하고 경제학 대신 제가 좋아하던 사학과로 전공을 바꿨습니다.
표 캠퍼스 커플이라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무엇일까요?
이수조 나쁜 점은 모르겠고 동기라서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와 추억도 많고 공감대 형성이 잘 돼요. 한마디만 해도 서로 금세 알아들으니까. 우린 20대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평생 친구잖아요. 제가 한동안 신장이 좋지 않아서 병원에 입원했었는데 그 때 아내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어요. 아내가 없었으면 지금의 저도 없는 거지요.
조광현(이하 조) 언제부터 이곳에서 지내신 거예요? 집이 외진 곳에 있는데 무섭진 않나요?
이수조 무섭다기 보다 조용하고 아늑해서 좋아요. 이곳을 저는 글라라수도원이라고 부릅니다. 아내가 원장이고 저는 보조원이고(참고로 글라라는 하문자 동문의 세례명이다). 둘만 있다 보니 서로 이야기도 많이 하고 서로 의지하고. 하문자 제가 전원생활을 원했어요, 급속히 변해가는 도시 생활에 제 노후를 맡기고 싶지 않아서 잠 안 오는 밤이면 거실에서 두꺼운 지도책 펴놓고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의 이곳저곳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혼자 상상속의 여행을 다녔어요. 그런 제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던 남편이 결혼 30주년 기념 선물로 원하는 곳에 집을 사주겠다고 제안했어요. 1여 년의 수소문 끝에 이 집을 찾아냈고 주말마다 내려와 집을 가꾸며 준비하다 결국 내려왔지요. 남편은 제가 곧 적응에 어려움을 느끼고 다시 도시로 나갈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수녀는 못 되었지만 다 내려놓고 수도자 같은 생활을 하고 싶었어요. 이제 조금이나마 그 꿈을 이룬거지요.
이수조 저는 사실 전원생활을 원하진 않았어요. 그러나 아프고 난 이후 이곳에서 생활한 덕분에 제가 건강을 많이 회복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맑고 깨끗한 공기에 아내가 제 건강을 염려하여 유기농으로 직접 먹을거리를 심고 가꾼 덕분이에요. 유리창 너머로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을 보고 있노라면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어요. 결혼한 아이들과 손자들에게도 좋은 고향이 되고 있고요.
표 자녀들도 모두 서강 동문이지요?
이수조 아이들을 모두 서강에 보내고 싶었어요. 딸 셋이 모두 동문인데 첫째인 경진(90 종교)이는 서강 외에 다른 대학은 없는 줄 알았고 남편 권승욱(89 화공)도 서강에서 만났어요. 둘째인 승연(95 컴퓨터)이는 건축학과 가려는 것을 설득해서 서강인으로 만들었고 연년생 막내인 경아(95 영문)는 영어를 잘해서 자연히 서강으로 왔고. 제 동생 이명조(64 경영)도 동문입니다.
하문자 제 조카인 양홍조(76 정외)와 이석원(90 경영)도 동문이고요. 우리 부부 소원은 손녀도 서강인으로 만들어 3대째 서강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고등학교 2학년인데 서강대 들어가라고 늘 기도하고 있어요.
정 하문자 선배님의 서강사랑은 유별나지 않나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1984년에 동문회가 대학 동문회 중 최초로 전산화를 시작할 때 선배님께서 여자부회장으로서 전산화 기금 마련에 발 벗고 나섰던 것으로 아는데요.
이수조 특히 예수회 후원회장으로 오랫동안 활동했었지요. 서강이 부르면 늘 달려가니까….
하문자 제가 먼저 나서는 건 싫어하지만 일이 생기고 부르면 가요. 서강이니까. 저는 서강이 개교하기 전인 고등학교 시절부터 서소문 예수회에서 미국 신부님들의 후원 요청 편지 발송 작업을 도와드렸어요. 재미있고도 보람 있었어요. 그리고 그 학교가 개교하면 나도 꼭 그 학교를 가리라 마음먹었지요. 서강에 원서를 내려고 했을 때 담임선생님께서 말리셨어요. 아직 인가도 안 난데다 알지도 못하는 학교를 왜 가려 하느냐고…. 저는 서강이 꼭 문을 열거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겁 없이 인가도 안 난 학교에 원서를 넣었어요. 서강은 4월18일에 개교했잖아요. 저희들 입학하고 나서 개교한 거예요.
표 긴 시간 재미있는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서강에 대해 새롭게 느껴집니다. 서강의 맏이로서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지요?
하문자 서강인은 요란하고 특출 나진 않지만 다른 대학 출신들에 비해 훨씬 우수하고 모두들 성실하고 겸손해요. 이런 전통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더불어 주위의 이웃과 가진 것을 나누고 베풀고.
이수조 하문자 씨처럼 살면 되요. 우리 동네가 모두 27가구인데 마을 노인 회장 맡아서 열심히봉사하고 있어요. 그전에는 시립병원과 결핵환자후원회 회장도 했었고. 또 3년간 원어민 강사 없는 우리 동네 초등학교에서 영어강사로 봉사도 했었고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는 어디나 가요. 동네생활에 잘 적응하는 하문자씨 덕분에 제가 덕을 봐요. 그래서 우리 동네에서 저는 “이씨”이고 아내는 “선생님”이예요.
서강에서 처음 만나 5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걸어온 서강의 1회 동문이자 1호 캠퍼스 커플인 이수조(60 경제), 하문자(60 사학) 동문부부를 찾았습니다. 서강과 두 사람만의 인연으로도 모자라 딸 셋에 사위 한 명까지 서강인으로 묶여진 대표적인 서강가족. 졸업 후 36년간 섬유회사, 은행, 무역회사, 건설회사 등 우리나라 산업화의 궤적을 따라 산업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남편, 그런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자녀를 키우고 모교와 동문회에서 또 지역에서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며 열심히 살아온 아내. 70대 초반 나이의 중산층 한국인, 서강인의 전형인 두 동문을 가을비가 쏟아지던 날 경기도 이천 율면의 자택에서 만났습니다. 인터뷰하기가 쑥스럽다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마음은 벌써 50여 년 전으로 돌아간 듯 두 부부의 얼굴에는 설렘이 가득했습니다. 인터뷰는 표정훈(88 철학) 편집인과 정명숙(83 불문), 조광현(88 경제) 편집위원이 진행했으며 조광현 편집위원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하문자 동문이 후배들을 위해 정성껏 준비한 점심식사와 창밖에 내리는 빗소리를 즐기며 선후배간의 문답은 화기애애하게 풀려나갔습니다.
표정훈(이하 표) 두 분이 공식적으로 서강의 첫 캠퍼스 커플이시지요?
이수조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우리 외에 염영일(60 물리), 이화자(60 영문) 동문부부가 있지만 염영일 동문은 2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기 때문에 졸업을 못했으니 1호이자 유일한 1회 동문 커플이지요.
표 두 분은 언제 어떻게 만나셨나요?
이수조 아내가 사학과를 졸업했지만 입학 당시에는 저와 같은 경제학과 학생이었습니다. 집안에 우환이 겹치는 바람에 제가 학교에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그때 제가 학사경고 받을 것을 우려한 경제학과 김병국 교수님의 부탁으로 아내가 제게 노트도 빌려주고 보충수업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가족을 잃은 슬픔에 학교생활을 힘들어한 제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지요. 데이트 비용도 모두 아내가 부담했었을 정도예요.
정명숙(이하 정) 개교 당시 학생 수가 많지 않았을 텐데 연애하시면서 다른 학생들의 눈총을 받지는 않으셨는지요?
이수조 160명이 입학하여 59명이 졸업할 만큼 정말 소수였고 1학년 내내 모든 학생이 교양과목을 수강하며 함께 어울려 다녔기 때문에 눈치를 채지 못했어요. 아침에 등교할 때도 마치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행동했고 특히 정재관(60 영문), 김인기(60 경제), 문정재(60 사학) 등과 다섯 명이 늘 붙어 다녔기 때문에 더더욱 눈치 채지 못했을 겁니다. 당시 사회분위기가 아무리 여대생이라도 누구와 사귄다는 소문이 나면 좋지 않으니까 아내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제가 조심한 부분도 있고요. 무슨 이야기였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둘이서 수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신촌에서 광화문까지 무던히도 많이 걸었지요. 그래도 전혀 힘들거나 지치지 않았어요.
정 귀하게 자란 딸이 형편이 어려운 동기생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집안의 반대는 없었나요?
하문자 어머니께서 가톨릭 신자냐고 물으셔서 그렇다고 하니 별 반대가 없으셨어요. 남편은 서강에서 저를 만나 영세를 받았어요. 그리고 남편이 졸업 후 군에 입대했기 때문에 집에서 혼기가 찬 제게 다른 사람과 결혼하라 할까봐 남편 군 입대 기간 동안 저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서 남편이 제대할 때쯤 돌아왔습니다. 이수조 씨를 기다리기 위해 피신을 한 셈이지요.
이수조 저는 정말 서강에서 하문자라는 인생 최대, 최고의 선물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문자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원래 수녀가 되려고 했었어요. 경제학과에 입학한 것도 아는 수녀님께서 당가수녀가 필요하니 제게 경제학을 공부하고 수녀원에 입회할 것을 권유하셔서 그 뜻에 따른 거예요. 입학한 후 동기 여학생들과 광안리에 있는 수녀원을 방문하기로했는데 출발 당일 아침에 오빠가 여자들이 함부로 지방으로 놀러 가면 안된다고 야단을 치며 못 가게 해서 저만 못갔어요, 그때 갔던 동기 여학생들은 수녀원에서 입회 번호표를 받고 졸업 후 모두 수녀가 되었어요. 제 동기 여학생 14명 중 8명이 수녀가 되었으니까요. 나머지는 졸업 후 해외로 나갔고…. 아무나 수녀가 되는 건 아닌가 봐요,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그 후 저는 이수조 씨를 만나 연애하고 경제학 대신 제가 좋아하던 사학과로 전공을 바꿨습니다.
표 캠퍼스 커플이라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무엇일까요?
이수조 나쁜 점은 모르겠고 동기라서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와 추억도 많고 공감대 형성이 잘 돼요. 한마디만 해도 서로 금세 알아들으니까. 우린 20대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평생 친구잖아요. 제가 한동안 신장이 좋지 않아서 병원에 입원했었는데 그 때 아내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어요. 아내가 없었으면 지금의 저도 없는 거지요.
조광현(이하 조) 언제부터 이곳에서 지내신 거예요? 집이 외진 곳에 있는데 무섭진 않나요?
이수조 무섭다기 보다 조용하고 아늑해서 좋아요. 이곳을 저는 글라라수도원이라고 부릅니다. 아내가 원장이고 저는 보조원이고(참고로 글라라는 하문자 동문의 세례명이다). 둘만 있다 보니 서로 이야기도 많이 하고 서로 의지하고. 하문자 제가 전원생활을 원했어요, 급속히 변해가는 도시 생활에 제 노후를 맡기고 싶지 않아서 잠 안 오는 밤이면 거실에서 두꺼운 지도책 펴놓고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의 이곳저곳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혼자 상상속의 여행을 다녔어요. 그런 제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던 남편이 결혼 30주년 기념 선물로 원하는 곳에 집을 사주겠다고 제안했어요. 1여 년의 수소문 끝에 이 집을 찾아냈고 주말마다 내려와 집을 가꾸며 준비하다 결국 내려왔지요. 남편은 제가 곧 적응에 어려움을 느끼고 다시 도시로 나갈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수녀는 못 되었지만 다 내려놓고 수도자 같은 생활을 하고 싶었어요. 이제 조금이나마 그 꿈을 이룬거지요.
이수조 저는 사실 전원생활을 원하진 않았어요. 그러나 아프고 난 이후 이곳에서 생활한 덕분에 제가 건강을 많이 회복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맑고 깨끗한 공기에 아내가 제 건강을 염려하여 유기농으로 직접 먹을거리를 심고 가꾼 덕분이에요. 유리창 너머로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을 보고 있노라면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어요. 결혼한 아이들과 손자들에게도 좋은 고향이 되고 있고요.
표 자녀들도 모두 서강 동문이지요?
이수조 아이들을 모두 서강에 보내고 싶었어요. 딸 셋이 모두 동문인데 첫째인 경진(90 종교)이는 서강 외에 다른 대학은 없는 줄 알았고 남편 권승욱(89 화공)도 서강에서 만났어요. 둘째인 승연(95 컴퓨터)이는 건축학과 가려는 것을 설득해서 서강인으로 만들었고 연년생 막내인 경아(95 영문)는 영어를 잘해서 자연히 서강으로 왔고. 제 동생 이명조(64 경영)도 동문입니다.
하문자 제 조카인 양홍조(76 정외)와 이석원(90 경영)도 동문이고요. 우리 부부 소원은 손녀도 서강인으로 만들어 3대째 서강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고등학교 2학년인데 서강대 들어가라고 늘 기도하고 있어요.
정 하문자 선배님의 서강사랑은 유별나지 않나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1984년에 동문회가 대학 동문회 중 최초로 전산화를 시작할 때 선배님께서 여자부회장으로서 전산화 기금 마련에 발 벗고 나섰던 것으로 아는데요.
이수조 특히 예수회 후원회장으로 오랫동안 활동했었지요. 서강이 부르면 늘 달려가니까….
하문자 제가 먼저 나서는 건 싫어하지만 일이 생기고 부르면 가요. 서강이니까. 저는 서강이 개교하기 전인 고등학교 시절부터 서소문 예수회에서 미국 신부님들의 후원 요청 편지 발송 작업을 도와드렸어요. 재미있고도 보람 있었어요. 그리고 그 학교가 개교하면 나도 꼭 그 학교를 가리라 마음먹었지요. 서강에 원서를 내려고 했을 때 담임선생님께서 말리셨어요. 아직 인가도 안 난데다 알지도 못하는 학교를 왜 가려 하느냐고…. 저는 서강이 꼭 문을 열거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겁 없이 인가도 안 난 학교에 원서를 넣었어요. 서강은 4월18일에 개교했잖아요. 저희들 입학하고 나서 개교한 거예요.
표 긴 시간 재미있는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서강에 대해 새롭게 느껴집니다. 서강의 맏이로서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지요?
하문자 서강인은 요란하고 특출 나진 않지만 다른 대학 출신들에 비해 훨씬 우수하고 모두들 성실하고 겸손해요. 이런 전통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더불어 주위의 이웃과 가진 것을 나누고 베풀고.
이수조 하문자 씨처럼 살면 되요. 우리 동네가 모두 27가구인데 마을 노인 회장 맡아서 열심히봉사하고 있어요. 그전에는 시립병원과 결핵환자후원회 회장도 했었고. 또 3년간 원어민 강사 없는 우리 동네 초등학교에서 영어강사로 봉사도 했었고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는 어디나 가요. 동네생활에 잘 적응하는 하문자씨 덕분에 제가 덕을 봐요. 그래서 우리 동네에서 저는 “이씨”이고 아내는 “선생님”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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