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86철학)기고-신해철은 죽어서도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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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11-04 14:21 조회16,33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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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김성수(86 철학) 동문이 '민중의 소리'에 故신해철(87 철학) 동문에 대한 글 '신해철은 죽어서도 싸운다'를 기고했습니다. 철학과 1년 선배인 김 동문이 기억하는 신 동문과 그의 음악 세계, 그리고 그가 사회에 미친 영향 등을 정리했습니다.
김 동문의 동의를 얻어 기고문 전체를 아래에 옮깁니다.
[기고] 신해철은 죽어서도 싸운다
27년 동안 함께한 그와 음악을 기억하며 - 문화평론가 김성수
신해철, 그가 쓰러진 22일, 나는 종편의 한 예능프로그램을 녹화하는 중이었다. 일단 녹화가 시작되면 거의 네 시간이 넘도록 스마트폰을 보지 못하니, 신해철이 쓰러졌다는 속보를 바로 보지 못했다. 밤늦게 SNS를 통해서 그 소식을 접하고는 한동안 황망했다. 오죽했으면 방송을 하는 사람으로 생명과 같은 스마트폰을 분실했을까. 다음날에도 그가 깨어나지 않자, 간단한 소회를 SNS에 밝히고 처음으로 그를 위해 기도를 했다. 그를 살려달라고, 아직 그를 보낼 수 없다고, 우린 아직 마왕이 필요하다고.
거침없고 자신만만하던 자유로운 영혼
그를 처음 만난 건 1987년 1월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파마머리에 선글라스처럼 보이는 색 짙은 잠자리 안경을 끼고, 롱코트 패션에 기타까지 둘러멘 채로 그는 내 앞에 나타났다. 예비 신입생들을 위해 철학과 학생회에서 마련한 학과 설명회 자리였다. 그는 시종일관 까불었고, 킥킥댔고, ‘똥폼’을 잡았다. 그래서 난 당연히 그가 합격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오리엔테이션에서도 얼굴을 내밀었다.
그의 합격을 내 여친은 무척이나 반겼다. 나와 과 커플이었던 그녀는 감히 내가 따라갈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 탁월한 식견과 안목이 있는 천재 독서광이었다. 그런데, 내게 스승과도 같았던 그녀가 신해철을 애지중지하는 것 아닌가. 하필이면 또 난 학과 신입생들의 교육 담당자였기에 스터디에 나오지 않는 그를 쫒아 다니며 속을 끓였기에 씹을 거리가 무궁무진했다. 난 그녀에게 “스터디엔 안 나오면서 투쟁과 학습의 공간인 과방을 대중가요로 물들이고, 밴드 오디션 후일담이나 떠들며 록 콘서트 포스터를 붙이고 다니는 ‘팝송’이나 듣는 놈”이라 씹었지만, 그녀는 그의 이런 무례함(?)이 그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라며 두둔했다.
대학 시절의 신해철
사실, 그걸 몰랐던 것이 아니다. 강요되는 선택을 거부하는 그의 강력한 멘탈이 너무나 부러웠기에 솔직히 꼬여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난 선배라면 사상적으로 철저해져야 한다면서 자본주의 문화와의 결별을 선언하고는, 애장하던 조용필과 이문세, 퀸과 알란파슨스프로젝트의 전 음반, 심지어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오리지널 버전까지 불태우고 난 뒤였으니! 그의 도발 앞에서 멘붕이 온 것은 나였을 뿐이었다.
항상 그랬다. 멘붕은 선입견과 강요에 익숙한 자들의 몫이었지 신해철은 ‘생긴대로, 하던대로 지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 지가 듣고 싶은 수업은 제법 열심히 들었고, 듣기 싫은 수업은 땡땡이를 치고 낮술을 마셨다. 음악을 만들었고, 소개팅도 했고, 축제에도 참가했다. 누구와도 토론하기를 거부하지 않았고, 모든 시위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문무대 반대 시위나 6.10 민주화 항쟁, 전방입소거부투쟁은 같이 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가요제 준비를 했다. 88년 봄 강변가요제에서 그가 탈락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난 당연한 일이라면서 코웃음을 쳤다. 사실 술자리에서 가끔 들었던 그의 노래는 단언컨대 킨젝스(서강대 록밴드) 보컬 오디션에서 떨어질 만한(?) 실력이었다. 내가 잠시 몸담았던 서강합창단에는 그보다 노래 잘하는 선수들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그는 “한 번 떨어져 보니 어떻게 해야 상을 탈 수 있는지 알았다”며 다음 대학가요제에선 대상을 먹겠다고 했다. 난 그의 자신감 넘치는 탈락 소감을 비꼬며 후배들에게 “그 녀석이 대상을 타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고 호언했다. 그 과감한 장담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과방에서 꽤 많은 사람들에게 “그대에게” 데모버전을 들려주었는데, 전혀 대학가요제 풍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대상을 탔고, 난 한동안 과방에 갈 수 없었다.
89년 세쌍동이 동생들이 한꺼번에 대학에 들어가는 바람에 휴학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화운동의 길에 뛰어들었던 나는 이후 철학과와도 소원해지고 신해철과도 멀어졌다. 신해철 역시 라디오프로그램 DJ를 맡게 되면서 철학과와 멀어지게 된다. 하지만 대동제와 같은 큰 행사가 있을 때에는 마치 명절날 집에 오는 자식들처럼 과방을 들르게 되는데, 그 때가 마침 철학과 노래패의 공연이 있다면 그냥 갈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거기서 난 눈이 휘둥그레지는 장면을 목도했다. 제대로 된 공연장도 아닌 계단식 강의실에서 공연을 하는 과 노래패가, 수백만원짜리 악기들에 제법 알찬 음향장비들까지 갖추고 리허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서 돈이 나서 이런 무리를 했냐고 걱정하는 나에게 그들은 말했다. 신해철이 빌려 준 거라고. 이 대책 없는 인간들이 공연은 잡아놓고 악기와 음향장비를 빌릴 돈이 없으니까 그에게 무작정 전화를 한 것이다. 그저 키보드나 하나 빌려보자는 심보였단다. 그런데 신해철은 자기 작업실로 오라고 해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장비들을 다 챙겨서 보냈단다. 음악을 하려면 갖출 건 갖추고 해야 한다고. 그래서 그날의 공연은 서툴렀지만 사운드 하나는 꽉 차 있었다. 그 후 몇 달 뒤 신해철이 대마초에 연루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난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사람마다 사이즈가 있는 법. 대마초 두 모금에 발목 잡힐 그릇이 아니었다, 그는.
정상적이었다면 한 학기 휴학을 했다고 해도 90년에는 졸업을 해야 했지만, 학교 수업과 문화운동을 병행한다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출근하듯이 타 대학을 돌아다녀야 했던 89년 2학기에는 정말 충격적인 성적을 받아들기도 했다. 과 후배로 학부 조교를 하던 김 모는 내가 기말시험이라도 볼 수 있게 출석부를 만지다 교수님께 불호령을 당하기도 했다. 선동렬 방어율 같은 학점은 과에서 신해철과 나 둘만 받았다며, 해철이는 TV에라도 나오는데 뭐하느라 학교에 안 오냐며 따지고 드는 그 후배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우울했지만 보람 있었던 90년은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의 해였다. 난 그 낯간지러운 발라드보다는 ‘안녕’을 좋아했는데 중독성이 강한 후렴구와 세련된 랩 때문에 알게 모르게 따라 부르고 있던 노래였다. 그의 솔로 2집이 나오던 91년은 공부와 극단 수습 단원 생활로 정신이 없었다. 그 지친 하루를 씻어주는 노래가 ‘재즈카페’였고, 불안하기만 한 예술가의 길 초입에서 ‘내 마음 깊은 곳의 너’는 사정없이 감정 이입되는 노래였다. 문화운동을 한다는 알량한 자존심이 그의 팬으로 자리매김하게는 못했지만, 난 그렇게 신해철의 음악 속으로 젖어 들어갔다.
그가 92년에 넥스트를 결성하고 밴드 록음악를 선택했을 때, 그답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이 자유주의자로 포장된 목적지향의 구도자는, 자기 소신과 믿음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엉덩이에 뿔이 나는 체질의 소유자였으니, 그 해 4월 서태지가 혜성처럼 등장, 이미 멜로디 중심의 음악 소비 행태를 리듬과 비주얼의 소비행태로 바꿔 놓았다는 사실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신해철은 10대 가수에 선정될 만큼 최고 스타의 자리에 올라놓고도 자신이 연예인으로 취급받는 게 죽기보다 싫어 록 밴드를 통해 새로운 음악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청개구리도 이런 청개구리가 없다. 그는 방송 출연도 제대로 안하면서 1집을 성공시켰다. 서태지가 방송과 언론의 관심을 등에 업고서 음악 산업 시장의 빅뱅을 일구어 내었다면, 넥스트는 또 한 차례의 대마초 파동을 겪으면서도 오로지 음악 그 자체에 몰입하여 당시 록 밴드가 할 수 있는 최고치의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넥스트 1집의 ‘인형의 기사’나 ‘도시인’도 인상적이었지만, 2집 The Being의 음악들은 정말 충격이었다. 9분 53초짜리 경악할만한 넘버 ‘껍질의 파괴’를 보라. 암울한 포스에 선명한 메시지는 핑크플로이드가 부럽지 않았고 쉼 없이 내달려가는 사운드는 딥 퍼플이 떠오를 정도였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좌절과 분노를 내게 다오
영원히 마르지 않을 눈물을 함께 하고
고독의 늪에서 헤매이게 하라
그럼으로써 내가 세상에 온 이유를 알게 하고
내게 주어진 시간이 다 가기 전에
내가 누구인지 말하게 하라
서늘한 비수로 파고들던 그의 음악
예언처럼 그는 세상의 모든 고통과 좌절과 분노를 차근히 맞닥뜨리게 된다. 하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음악적 성장만은 멈추지 않았다. 넥스트의 3집은 음악의 자신감을 통해 강력한 사회비판의 메시지를 담아서 록 스피릿이 무엇인지 확인해 주었다. ‘Money’는 동명의 핑크 플로이드 곡보다 더 좋았고, ‘The World We Made’는 시원한 샤우팅으로 삼풍과 성수대교 붕괴를 까대었다.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처럼 섬세한 록 발라드에 잘못된 관습을 비판하는 노래도 담아 이미 일본에서 팬들이 생길 만큼 성장했다.
이 어림에 발매한 싱글 ‘Here I Stand For You’를 난 특별히 기억한다. 첫 애를 갖게 되어 극단 생활을 정리하고 학원선생이 되어 있던 때, 이 노래는 서늘한 비수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 입시교육의 언저리에서 잘도 밥벌이를 해 먹고 있던 나에게 신해철은 외쳤다. “난 나를 지켜가겠어 언젠간 만날 너를 위해/세상과 싸워 나가며 너의 자릴 마련하겠어/하지만 기다림에 늙고 지쳐 쓰러지지 않게/어서 나타나줘” 이제는 스스로 득음을 해내어 4옥타브의 능란한 샤우팅을 구사하는 그의 앞에 난 얼마나 초라했는지 모른다. 그가 약속, 헌신, 운명, 영원, 그리고 사랑 이 낱말들을 영원히 믿는다고 할 때, 차를 바꾸고 아파트를 늘리는 짓을 하면서 제자들의 코 묻은 돈으로 난 얼마나 행복했던가?
98년 그가 넥스트를 해체하고 공부하러 떠날 때 난 모교에서 후배들과 록 뮤지컬을 무대에 올린다. 그리고 99년에는 다시 연극판으로 돌아왔고 아직까지 그 판 언저리에서 버티고 있다. 힘들어도 버티는 자들이 있어야 자리가 마련된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사실 두 번 다시 그렇게 도망가서 쪽팔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혼자만의 자격지심도 아니고 열등감 작렬도 아니다. 원래 신해철은 그의 노래를 듣고 나와 같이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길 원했다. 그렇게 변화한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길 원했다. 그것을 위해 그 곳에서 당당히 버티고 서서 때로는 악플에, 때로는 사찰에, 때로는 사법기관에 시달렸던 것이다.
28일 홀로 빈소를 찾아 헌화하고 밥을 먹을 때도 사실 그의 부재가 피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빈소에서 나와 차에 올라 습관처럼 스마트폰의 SNS 타임라인을 확인하다 노무현 추도 문화제의 그를 보고 통곡하고 만다. 신해철은 내가 죽였는지도 모른다. 그가 외롭게 싸울 때 곁에서 지켜주지 않고, 그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러 들어갈 때 함께 들어가지 않아서 그가 죽었는지 모른다.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할 말이 있느냐고 물을 때마다 ‘미안하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던 이유를 나는 그제서야 발견하고 있었다.
죽어서도 싸우는 신해철
그가 죽고 일주일. 그는 죽어서도 세상과 싸워나가고 있다. 사실 그의 죽음은 여러 가지 비상식과 전문 지식인들의 방관 혹은 협조, 그리고 자본과 의료행위의 결탁이 만들어낸 구조적인 적폐다. 방송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이미지를 팔아먹기 위해서 몸을 상품화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들은 상품 가치를 높이기 위해 몸을 정련할 수 있는 전문가들을 늘 필요로 하고, 그 전문가들 중 가장 대접받는 직업군이 의사다. 게다가 의사들마저도 실적 쌓기에 등 떠밀리면서 방송과의 유착을 통한 안정적인 환자 재생산(?) 사업에 내몰리고 있는 상황이니, 어쩌면 신해철의 죽음은 잘못된 구조 아래 자행된 사회적 살인일지도 모른다.
발인식을 다 마치고 화장장 앞에서 부검이 결정된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신속하게 국립과학수사본부의 부검 결과를 받아든 피해자도 그가 유일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우연이 아니다. 신해철이 세상과 싸워나가면서 만들어 준 자리 덕에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아직 보내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런 허무맹랑한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해철은 죽어서도 싸우고 있다. 잘못된 방송산업관행과 유착된 민영병원, 그리고 피해자가 증명해야 하는 의료사고 관련법의 독소 조항들과. 그리고 그 싸움에서 반드시 신해철이 이길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아하, 어쩌나. 그렇게 그가 승리하면 그 혜택은 결국 살아있는 모두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니, 어쩌면 이렇게 우리 모두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고 가는 것은 아닐까? 그가, 그의 노래가, 그의 진솔한 돌직구가, 오늘 이 시간, 못 견디게 사무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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