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용(77정외) 한겨레기자의 손학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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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9-02 10:25 조회17,701회 댓글4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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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성한용(77 정외) 선임기자(前 편집국장)가 민주당 손학규 대표를 ‘야권의 유력한 대선주자’로 9월 1일 다뤘습니다. 손 대표는 1990년부터 1993년까지 모교 정치외교학과 전임교수로 재직한 서강가족입니다. 손 대표의 두 딸과 큰 사위가 서강대 동문이라는 인연도 있습니다. 정치전문기자로 활약해온 성한용 동문의 양해를 얻어 기사 전문과 사진을 총동문회 홈페이지에 게재합니다. 앞서 성한용 동문이 처음으로 다룬, 여권의 유력한 대선주자 박근혜(70 전자) 전 대표에 관한 기사 전문(全文) 역시 총동문회 홈페이지에 8월 12일에 전재한 바 있습니다.
‘범생이 카리스마’ 그늘에 가린 진정성
성한용 선임기자의 대선주자 탐구 손학규
‘사람좋은 손학규’ 요즘 부쩍 버럭대는 이유
정치인으로서 손학규 민주당 대표의 가장 큰 강점은 ‘진정성’이다. 그는 소탈하고 성실하다. 정치인 중에 이런 성품은 보기 드물 정도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손학규 대표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별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는 젊은 시절 학생운동이나 빈민운동을 할 때 ‘정말 열심히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학교수를 할 때는 제자들을 무척 아꼈다. 지금도 많은 제자들이 그를 따른다. 보건복지부 장관, 경기지사를 할 때는 그 까다로운 공무원들로부터 ‘일 잘한다’고 인정을 받았다.
둘째 강점은 결정적인 순간에 발휘하는 결단력과 실행력이다.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면모다. 그를 오랫동안 보좌한 한 측근은 이렇게 설명했다.
“손 대표는 평소 너털웃음을 잘 터뜨린다. 그렇다고 사람이 마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2007년 그가 한나라당을 탈당할 때 대부분의 지인은 만류했다. 탈당하지 못할 것으로 본 사람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손 대표는 확신이 서면 무모할 정도로 가차없이 결행하는 사람이다. 지난 4·27 재보선 과정에서 보여준 분당 출마 결심, 그리고 순천 무공천 선언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2008년 국회의원 선거 패배의 책임을 스스로 걸머지고 춘천에 칩거한 것도 쉽지 않은 처신이었다.”
최근 여름휴가 이후 손학규 대표의 어투가 훨씬 단호해졌다. 원내 현안을 챙기며 의원들을 불러 무섭게 질책하는 모습도 보인다. 야권통합의 발언 강도는 점점 강해지고 있다. 그를 겪어본 ‘경험칙’에 따르면 뭔가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아져 가고 있다는 것이 주변의 관측이다.
세번째, 손 대표는 합리성을 추구하는 철저한 의회주의자다. 보수 성향 유권자들이 그에게 거부감이 적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손 대표는 영국에서 유학하며 모든 문제를 의회에서 다루고 해결하는 시스템을 목격했다. 희망버스를 타지 않고 거리의 정치에 나서기를 주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어쩌면 그가 철저한 의회주의자이기 때문일 수 있다. 정치인은 현장에서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손 대표의 소신이다.
네번째 강점은 바로 그의 ‘과거’다. 그는 젊은 시절 공동체와 사회 정의를 위해 몸을 던졌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인생을 살지 않았다. 손 대표를 대학시절부터 오랫동안 지켜본 인사는 이런 말을 했다.
“정치인의 과거는 곧 그 사람의 자질이요, 인격이다. 그런 면에서 손 대표는 정치 지도자로서 훌륭한 소양을 갖췄다. 이건 뒤늦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젊어서부터 불의에 맞서 싸웠다. 평범하게 살다가 정치를 하면서 갑자기 정의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손학규 대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손학규 대표의 과거를 알면 알수록 그를 지지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합리성·조화를 추구하며 성실하고 열심이다. 장관·경기지사 때도 일 잘한다는 인정을 받았다. 의회주의자로 현장싸움도 중요하지만 문제를 실제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이런 여러가지 강점에도 불구하고 손학규 대표는 요즘 ‘시련의 시기’를 맞고 있다. 정치적 리더십과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비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4·27재보선 뒤 올라갔던 개인 및 당 지지도는 다시 주저앉고 있다.
손 대표는 최근 서울시장 후보 문제를 둘러싸고 정동영·천정배 최고위원과 공개석상에서 거의 멱살잡이 수준의 논쟁을 벌였다. 누가 옳고 그르고를 떠나 손 대표도 상당히 손해를 봤다. 당 대표로서 권위에 손상을 입었고 장악력에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손 대표의 당내 리더십과 관련해 민주당 의원들은 4·27재보선 직후 터진 한-유럽(EU) 자유무역협정 (FTA)합의 번복, 지난 6월 한국방송 수신료 합의 번복, 두 가지 사건 얘기를 많이 한다. 정국의 흐름을 좌우할 수 있는 주요 사안을 당 대표가 치밀하게 챙겨보지 않았다가 ‘사고’가 터졌다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손 대표는 그동안 당내 정치를 거의 하지 않았다. 과거 야당 총재들처럼 ‘자기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내가 대표면 됐지 다른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다 보니 최고위원이나 의원들 중에 확실한 ‘손학규 편’이 별로 없다. 의원들로부터 ‘당과 겉돈다’는 비판을 많이 받는다.
손학규 대표와 직접 부대끼며 일하는 의원들은 김진표 원내대표, 박영선 정책위의장, 박선숙 전략홍보본부장, 정장선 사무총장, 김동철 비서실장, 신학용 특보단 간사, 이용섭 대변인 등이다. 그러나 이들을 ‘손학규 사람’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들은 ‘민주당 사람들’이다.
한나라당에서 왔다는 ‘족보’의 문제도 여전히 그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가 한나라당 출신이 아니었다면 ‘종북진보’ 발언은 별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의 참모들은 종북진보 발언으로 지지자의 10% 정도가 순식간에 이탈한 것으로 보고 있다. 민주당 주요 당직자는 “손 대표가 중도 성향 유권자들을 향해 다가갈수록 기존 민주당 지지자들의 외면을 받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분석했다.
당내 리더십만이 아니다. 손 대표는 대중적 리더십도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은 대선후보로서 지지도가 높다면 당내 리더십이 다소 부족해도 별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정치인으로서 대중적 리더십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민주당과 손 대표 주변 사람들을 만나 이 부분에 대한 토론을 꽤 오랫동안 해 보았다. 손 대표의 ‘캐릭터’에 다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범생이(모범생) 기질 탓이다. 손 대표는 지나치게 합리성과 균형, 조화를 추구한다. 대중은 단순 명쾌하고 치고 나가는 정치인에게 희열을 느끼는데, 손 대표는 그렇지 못하다. 대중의 언어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능력도 좀 떨어진다. 말이 너무 길고 장황하다. 국민들은 손학규가 뭘 하려는 사람인지 잘 모른다.”
“왜 정치를 하는 것인지 선명하지가 않다. 총론에 강하지만 각론에 약하다. 각 분야에서 현안으로 제기되는 문제를 정면으로 끌어안지 않고 자꾸 우회한다. 핑계만 있으면 직접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건 원내대표 권한이야’라거나, ’내가 ○○○와 그런 것으로 다툴 필요가 있나’라고 말한다. 당 대표로서 당연히 해야 할 과제를 외면하니 국민들도 손 대표를 외면하는 것이다.”
손 대표와 가까운 민주당 사람들의 진단이다. 애정이 깊은 만큼 비판도 날카롭다.
손 대표는 이처럼 매우 많은 강점과 매우 많은 약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의 미래는 그래서 불투명하다. 하지만 그의 과거는 매우 투명하다. 장면마다 수많은 증인이 있다. 그를 직접 겪은 사람들의 체험을 모아 책을 펴낸 일도 있다. 베일에 싸여 있는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와는 많이 다르다.
모든 정치인들이 그렇듯이 손 대표의 삶도 한국 현대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의 인생은 학생운동과 빈민운동, 뒤늦은 공부와 짧은 교수 생활, 그리고 정치인의 세 단계로 이어진다.
손 대표는 편모 슬하에 7남매의 막내로 자랐다. 경기중고 시절에는 밴드와 연극을 했다. 낭만주의자였던 것이다. 덕분에 지금도 트럼펫 연주를 잘한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부터 시국과 정치에 관심이 높았다. 서울대에 진학하면서 정치학과를 선택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가 대학에 들어간 1965년은 한일협정이 체결된 해였다. 그는 누구보다 ‘데모’(시위)를 열심히 했다. ‘경기고 출신 3인방’으로 ‘법대 조영래, 상대 김근태, 문리대 손학규’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손 대표는 선배들이 만든 서클에 가입하지 않고 ‘후진국문제연구회’(후문연)를 결성했다. 서울대 유기천 총장에 대한 배척운동을 하면서 동맹휴학 결의를 주도했고 이 때문에 무기정학을 받은 일이 있다.
이 시절 손 대표는 단식투쟁을 철저히 한 것으로 유명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래 음식이나 주스를 먹었는데 진짜로 물만 먹고 버텼다. 뭐든지 일단 했다 하면 철저히 하는 스타일은 젊은 시절부터의 모습이다.
손 대표는 1969년에 군대에 갔다. 본래 해병대를 지원했지만 평발이라 떨어지고 육군에 입대해 35개월 동안 전방에서 근무했다. 그가 72년 제대하고 나서, 공군장교였던 형에게 한 말은 “데모는 데모고 국방은 국방이다”였다. 손 대표는 군생활을 통해 ‘겸손’을 배웠다고 했다. 고급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 중에도 얼마든지 능력있고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군대가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공동체와 사회정의를 위해 몸던져 학생·빈민·노동운동으로 수배와 투옥을 당했다. 그러나 정작 정치는 1993년 자신을 아껴주던 김영삼 정부의 여당인 민자당에서 시작했다
이후 구로공단에서 노동운동을 했고, 지인들의 권유로 박형규 목사가 있던 제일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박형규 목사는 이때부터 평생 동안 손 대표의 ‘정신적 멘토’가 된다. 손 대표는 박 목사의 권유로 1973년 기독교 빈민 선교 활동에 뛰어들었다. 손 대표와 빈민운동을 함께했던 김성재 교수(김대중도서관장)의 회고다.
“손 대표는 ‘수도권 특수지역 선교위원회’에 ‘실무자’로 참여했다. 이철용, 권호경, 김동완, 허병섭 등이 같이 활동한 것으로 기억한다. 청계천 판자촌에서 빈민들과 함께 살면서 권리를 깨우쳐 주고, 철거 저지 운동을 했다. 손 대표는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 인상적이었다.”
손 대표는 1973년 ‘남산부활절연합예배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에 의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일도 있다. 가택수색에서 나온 몇 가지 책과 자료를 경찰이 문제삼은 것이다.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지만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 감옥에 간 덕분에 1974년에 터진 ‘민청학련 사건’엔 연루되지 않았다.
손 대표는 75년 수배를 피해 이창우 제세산업 대표의 ‘합정동 철공소’에 1년 이상 숨어서 일을 한 적이 있다. 이때 김권이라는 가명을 썼는데, 당시 철공소에서 나이 어린 동료들이 그에게 용접을 가르쳤다. 그 뒤 20년이 지나 손 대표가 민자당 대변인이 됐고 텔레비전에 나왔다. 철공소 동료들은 “철공소에서 일하던 ‘권이형’하고 똑같이 생겼다”고 놀랐고, 이어 “알고 보니 ‘권이형’이 바로 손학규 의원이다”라고 또 한 번 놀랐다고 한다. 손 대표는 2005년 경기지사 시절 동티모르 ‘평화 메신저’ 봉사에 동참했는데, 30년 전에 배운 용접 기술을 발휘해 놀이터에 철봉을 만들어 준 일도 있다.
1977년부터 79년까지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운동 간사를 했다. 1979년 부마항쟁 때는 진상조사를 위해 부산에 내려갔는데, 보안사에 붙잡혀 며칠 동안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 “내가 박정희와 싸우다가 이렇게 죽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0·26으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서거하는 바람에 극적으로 풀려났다.
1980년 ‘서울의 봄’이 왔지만 손 대표는 더 넓은 세상을 체험하고 싶었다. 33살 늦깎이로 영국 브리스톨 대학 신학부로 유학을 갔지만, 신학공부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손 대표는 지도교수에게 요청해 옥스퍼드로 옮겨 갔고 열심히 공부해 1987년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옥스퍼드 박사 학위는 대학교수직을 보장해 주었다. 손 대표는 인하대와 서강대에서 1993년까지 교수를 했다. 대학교수 시절 손 대표는 학생들에게 매우 개방적이었고 대화를 많이 했다. 당시 서강대 제자 중에서 지금 손 대표를 보좌하고 있는 인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서강대에서 처음 강의를 했을 때 토마스 쿤(미국의 과학사학자 겸 철학자)의 ‘패러다임 쉬프트’를 얘기했다. 무척 인상적이었다. 미리 결론을 내놓고 공부하는, 당시 학생운동권의 학습 풍토를 손학규 교수는 지적했다. 또 손 교수가 ‘소련 사회주의는 이미 수명이 다했다. 한국의 발전모델이 아니다’라고 말했는데, 얼마 뒤 소련이 진짜로 무너져 깜짝 놀란 일도 있다.”
1993년 광명 보궐선거로 정계에 입문한 뒤의 일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비화가 있다면, 민자당 대변인 시절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차남 김현철씨를 해외로 내보내라고 건의했던 일이다. 당시 박관용 비서실장이 대통령에게 김현철씨 문제를 제기했다가 비서실장직에서 물러났는데, 손 대표는 지인의 만류에도 위험을 무릅썼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손 대표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를 내치지도 않았다. 그만큼 손 대표를 아꼈던 것이다.
손 대표는 93~98년 약 5년 동안 이명박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같이했다. 98년 이명박 대통령은 선거법 위반 재판 도중 의원직을 사퇴했고, 손 대표는 경기지사에 도전하느라 의원직을 사퇴했다. 두 사람은 99년 워싱턴에 함께 머물며 지인들과 한 달에 한 번꼴로 세미나를 할 정도로 가까이 지냈다. 그리고 2002년 나란히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서울시장과 경기지사가 됐다.
손 대표는 경기지사를 할 때 자신이 가진 역량을 모두 쏟아 부었다. 73만개의 일자리를 만들고 경기도 경제성장률 7.2%를 달성했다. ‘신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손 대표의 업적은 이명박 대통령의 ‘청계천’이나 ‘서울시 교통체계 개편’만큼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우여곡절 끝에 2007년 한나라당을 탈당했고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5년 만에 재도전의 기회를 다시 잡았다.
유약한 리더십, 박근혜에 뒤떨어지는 대중성, 자기사람 없는 당내정치라는 약점, 그리고 한나라당에서 민주당으로 입당했다는 족보가 총·대선을 앞둔 그에겐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손 대표는 서너개의 산을 더 넘어야 한다. 10·26 재보선, 야권통합, 4·11 총선, 당내 후보경선, 12·19 대통령 선거 등이다. 하나라도 실패하면 정치인생을 접어야 할지 모른다. 리더십이 취약하다는 당 안팎의 비판, 박근혜 전 대표에 비해 뒤떨어지는 대중성,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정치 환경을 극복하고 손학규 대표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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