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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은 늘 청년이다, 박운양 동문의 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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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중 작성일10-01-12 15:43 조회12,7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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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운양(89 독문) 동문이 20년만에 다시 교지 '서강'에 글을 실었습니다. 이는 박 동문과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활동하던 08학번 후배와의 인연으로 이뤄졌습니다. 마침 교지편집위원을 맡고 있던 후배와의 만남이 박 동문으로 하여금 '서강 50주년이라는 뜻깊은 시기에 평소 생각하고 고민했던 것을 현재 캠퍼스에서 치열하게 학문에 정진하고 있는 후배들을 위해 글을 실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한 것입니다.

이에 총동문회에서는 박 동문의 동의를 얻어 교지에 실린 글 전문을 여기에 옮깁니다. 개교 50주년을 맞은 서강에 대한 박 동문의 성찰을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탁월한 것은 매우 드물고, 이루어지기도 힘들다
Ethica in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
스피노자 (Spinoza, Baruch de) [1632.11.24~1677.2.21]

이제 내년이면 서강은 개교 50주년을 맞는다. 한 달에 몇 번씩 모교 정문을 들리면 알바트로스 조형물 옆에서 앞으로 며칠 후에 50주년을 맞이하는 지 카운트다운을 알려주는 전광판이 깜박이고 있다. 동양적 사고에서는 특히 인생의 주기를 강조한다. 10년을 터울로 인생의 여정을 통찰한 논어와 예기를 살펴보자 .

지학(志學): 15세(학문에 뜻을 두는 나이)--논어
과년(瓜年): 16세(혼기(婚期)에 이른 여자의 나이)
방년(芳年): 20세를 전후한 여성의 나이. (방령(芳齡),묘년(妙年),묘령(妙齡)과 같은 뜻)
약관(弱冠): 남자 나이 20세.(약년(弱年/若年),약령(弱齡)이라고도 한다)--예기
이립(而立): 30세(모든기초를 세우는 나이)--논어
불혹(不惑): 40세(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논어
상수(桑壽): 48세(桑: 十이 네개, 八이 한개로 봄)
지천명(知天命): 50세(천명을 아는 나이, 지명이라고도 함)--논어
이순(耳順): 60세(예순, 육순, 인생에 경륜이 쌓이고 사려와 판단이 성숙하여 남의 말을 받아 들일줄 아는 나이)--논어
환갑(還甲): 61세(태어난 간지(干支)의 해가 다시 돌아왔음 뜻하는 생일)
(환갑(回甲),화갑(華甲),수연(壽宴,壽筵)
진갑(進甲): 환갑(還甲)의 다음해인 62세 때의 생일.
미수(美壽): 66세
희수(稀壽): 70세,고희(古稀).
종심(從心): 70세(뜻대로 행하여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나이)--논어 

지천명은 한마디로 천명을 아는 나이를 말한다. 하늘이 자신에게 부여한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시기이다. 필자는 서강이 모든 기초를 세운다는 이립(而立)의 30주년-1990년을 한해 앞두고 입학했다.(독어독문학 89학번) 당시 서강의 가장 큰 변화는 드디어 정문이 새롭게 바뀌었다는 것의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 이전의 정문은 말 그대로 여느 고등학교정문과 다름없는 도저히 대학교정문이라고 볼 수없는 국제고등학교(IHS) 정문이었다.

필자는 새내기 가을학기 내내 오전수업이 끝나면 오후에는 정문 신축공사를 비롯한 교내정비공사에 아르바이트생으로 참여했다. 나름대로 모교의 30주년을 준비하면서 온 몸으로 따가운 가을 햇살과 씨름하며 땀 흘렸던 기억이 새롭다. 그리고 알바트로스가 서강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선정되었다. -알바트로스에 대해서는 약간의 오해가 있다. 글을 마치면서 소개하겠다.

당시 필자는 30주년을 기념하면서 출간된 교지 서강에 부탁받은 글을 게재했었다. 어설프게 니체의 글을 인용하면서 늘 Orchestranger로 지냈던 필자의 글은 학생운동의 영향력이 상당했던 당시 니체를 인용했다는 자체만으로 선배들에게 적지 않은 질책을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서강은 외형적으로 많은 변화를 보였다. 정문과 후문의 청년광장과 삼민광장은 사라졌고, X관과 K관을 제외하면 모든 단대건물들이 새로 지어졌다. 하지만 대한민국사회에서 서강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아직도 독보적으로 유효하며 모교를 바라보는 동문들과 재학생의 관점의 차이는 있으나, 이제 서강의 정체성에 대해서 ‘도대체 대한민국 사회에서, 서강에서 공부한다는 의미’ 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성찰해 보는 데에 관심을 집중하고 중지를 모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지천명을 앞두고 있는 서강의 자리매김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 지 정리한 몇 가지 생각들을 함께하고자 한다.

서강의 이미지는 크게 그 공과는 뒤로하고 대한민국역사의 결정적인 변곡점의 시기에 대학교의 명칭 자체가 학파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그 어느 대학도 ‘서강학파’라고 지칭될만한 독창적인 학문적인 평가를 받는 곳은 없다. 흔히들 70년대를 전후해서 서강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던 교수들이 테크노크라트를 형성한 것을 지칭하는 한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데, 사실 이것은 크게 오해된 것이다.

서강의 교수진은 인문사회계열 이공계열을 떠나서 초장기부터 가장 우수한 대학교육을 질적으로 확보하고 있다고 인정받아왔다. 또한 타 유수한 대학들처럼 선후배간의 어설픈 인정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실력으로 평가받는다는 근성이 강했다. 늘 서강 앞에는 ‘청년’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것은 서강의 역사가 타 대학들과 비교해서 길지 않다는 여러 가지 단점들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필자는 50주년을 앞두고 다시 ‘청년서강의 정체성’이 새롭게 해석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서강은 개교시기부터 지금까지 양과 질의 선택의 기로에서 항상 질의 가치를 우선시해왔다. 서강은 결코 큰 대학교는 아니지만, 소수정예의 대학인들의 학문의 전당으로 인정받아 왔다. 이제 초창기 동문들의 손녀·손자들이 서강캠퍼스를 거닐고 있지만, 서강의 원형질의 핵은 ‘청년서강’이다. 필자의 주장으론 늘 청년서강이어야 한다.

밀레니엄에 서강이 불혹의 나이 40주년에 접어들면서, 여기저기서 ‘서강의 위기’가 제기되었다. 서강하면 자연스럽게 떠올랐던 청년의 이미지, 소수정예의 이미지, 무엇보다도 자기 실력으로 평가받는 이미지들이 비판적인 평가의 도마 위에 올랐고, 이제 5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그 양 갈레 길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만일 서강이 여기서 현상유지에 만족한다면 우리는 아마도 대한민국사회에서 적당한 수준에서 평가받는 그렇고 그런 대학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 뼈를 깎는 비판적인 성찰을 통해서 단기적인 목표와 장기적인 목표를 제대로 설정하고 서강 본래의 가치에 충실한다면, 서강은 재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양과 질의 평가에서 적지 않게 인용되는 두 가지의 법칙이 있다. 386세대들에겐 교과서처럼 받아 들여졌던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제기되는 ‘양·질 전환의 법칙’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하인리히 법칙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서강후배들의 20대로서의 최고의 관심사일 수 밖에 없는 연애와 관련해서도 이 두 법칙은 아주 적지 않은 인싸이트를 준다.

양·질전환의 법칙을 소개하기 전에 탁월한 교육심리학자인 샐리그먼(Seligman)이 제창한 개념인 <학습된 무력감(Learned helplessness)>의 예를 들어 보기로 한다. 서커스단의 코끼리는 실제로 말뚝을 쓰러뜨릴 힘을 가지고 있는데도 도망가지 않는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말뚝에 매여 자랐기 때문에 자란 다음에도 도망칠 힘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아래 그림처럼 컵 안에 벼룩을 넣으면 벼룩은 우습게 컵을 탈출한다. 벼룩에겐 컵의 높이가 너무 낮기 때문이다. 그런데 컵 위를 막아 놓으면 벼룩은 밖으로 나가려하지만 나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막혀있으니까. 물론 벼룩이 살아 갈 수 있는 여러 가지 환경(호흡 및 먹이)은 잘 조절된 상태에서의 실험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난 후 컵 위에 덮어 놓은 장애물을 치워도 벼룩은 도망가지 못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벼룩은 난 컵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길들여졌기에 더 이상의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샐리그먼의 학습된 무력감은 배움과 교육의 현장에서 그대로 적용된다. 이러한 무력감은 물리적인 힘 앞에 굴복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과거의 어느 시기에 큰 실패를 겪고서 이후 반복적인 실패를 경험하게 되면 이후로는 실패의 두려움에 갇혀 작은 시도조차 하기 힘들어한다. 그러다보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도전도 영영 시도조차 못하게 된다. 청년이 도전하지 않는다면 청년인가? 도전하지 않는 청년은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올 가을 한국사상계에 귀한 공헌을 한 책이 서강동문이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효형출판에서 나온 ‘공동체론’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서강 정외과에서 20여년이 넘게 연구하고 강의하시는 분이시다. 필자가 80년대 말 서강의 새내기로 대학생활을 시작했을 때, 가장 큰 지적호기심과 자극을 주셨던 분이시기도 하다.

대학로에서의 이 분의 대학생활은 유신독재와 치열하게 싸우는 것으로 점철되었기에, 학부의 성적은 형편없었으며 유학을 당시 결심하기에는 너무나 열악한 상황이었다고 회고하셨다. 결국은 입양기관 홀트아동복지재단에서 아이를 받아서 비행기를 타고 독일에 도착한다. 베를린을 선택한 것도 일단 도시가 크기에 일자리를 잡기가 수월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말씀을 하셨다. 공부를 하려면 오랜 시간을 앉아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자신의 체질에 배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무작정 오래 앉아 있기 훈련을 한 학기 내내 하셨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5~6시간정도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고, 나중에는 도서관이 문을 열고서 닫을 때까지 생리적으로 어쩔 수 없이 보내야 하는 때를 제외하고는 잠자고 일하는 시간 외의 모든 시간을 공부하는데 에 전념할 수 있는 체질로 자신을 바꾸셨다고 회고하셨다. 도전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양·질 전환의 법칙은 양적으로 꾸준히 발전하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질적인 변화가 있어 한 단계 성숙한 단계로 올라간다는 의미이다. 물은 아무리 끓여도 100도가 되기 전까지는 액체 그 상태에서 질적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물을 끓이면 99도 까지는 물이지만 100도가 되기 전까지는 액체, 그 상태에서 질적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물을 끓이면 99도까지는 물이지만 100도가 되면서 수증기라는 새로운 質로의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될 때까지의 무명 시절, 나비가 되기 전까지의 알과 애벌레 그리고 번데기로 존재하는 시간, 지진이 발생할 때까지의 에너지 축적 등 눈에 보이는 모든 결과는 일정기간 축적된 양적인 투자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대가가 지불되지 않고 얻어지는 결과는 없다. 따라서 의도했던 결과가 아니라고 성급하게 화를 내거나 포기할 것이 아니라 기대하는 결과를 만들어질 만큼 충분한 양적 축적이 있었는가를 살펴야 한다.

현재의 상황이 다소 어렵다 할지라도 양·질 전환의 개념을 생각하면서, 좀 더 노력하는 자세가 요청될 수 있다. 현재의 상황이 다음 계단을 올라가는 아래 계단의 마지막 부분이며, 양적변화에서 질적 변화로의 전환점에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연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연애에 성공하는 것은 곧 연애에 실패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 연애에 실패하는 이유는 뭘까? 답은 간단하다. 하나는 모자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나친 것이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너무 앞서나가는 것은 모두 편향이며 안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법이다. 연애를 잘하기 위해서는 둘 사이의 관계를 정확히 규정할 줄 알아야 하며 그에 맞게 적절한 대화와 만남의 계기를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여기서 양적축적 없이 질적 변화를 이루려는 것을 좌편향(조급주의)이라 하고 양적 축적이 충분한데도 질적 변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을 우편향(소극주의)이라고 한다.

이제, (역)하인리히 법칙을 살펴보자. 하인리히(H. W. Heinrich)는 1930년 초 미국 보험회사의 관리 감독자였다. 그는 고객 상담을 통해 사고를 분석해 1:29:300의 법칙을 발견했다. 1번의 대형 사고가 발생할 경우 이미 그 전에 유사한 29번의 경미한 사고가 있었고 그 주변에서는 300번의 이상 징후가 감지되었다.

일이 잘못될 때는 어느 순간 한꺼번에 터지지 않는다. 일정기간 동안 대형사고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시그널은 계속해서 보내지고 있는 것이다. 큰 재난이 일어 날 때에는 29건의 경미한 재난과 300건 이상 징후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후  이 징후를 먼저 발견하는 것은 보험회사의 관리 감독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가 되었다.

그럼, 이제 발상을 역전시킨  역하인리히 법칙을 살펴보자. 각자의 성공을 위한 300개의 성공씨앗은 이미 뿌려졌었고 그 중에 29개의 성공의 싹이 돋아났는데도 모르고 지나간다면 어쩌면 자신의 인생에는 ‘하인리히 법칙’ 밖에는 없다. 적절한 예가 있다. 아메리카 어느 인디언 부족의 성년식은 소년·소년에게 바구니를 들고 옥수수 받을 걷게 한다. 긴 밭고랑을 걸으며 가장 크고 탐스러운 옥수수, 딱 하나만 골라 바구니에 담는다. 단, 이때 이미 지나온 길로는 절대 되돌아 갈 수 없으며 이미 딴 옥소소를 다른 것으로 바꿀 수도 없다. 정말 마음에 든 옥수수 딱 하나만을 골라야 한다. 다들 어떤 옥수수를 골랐을까?

소녀·소년들의 바구니는 비어 있거나 맨 마지막에 급하게 딴 초라한 옥수수 하나가 담겨있기 일쑤였고, 아주 드물게 튼실한 옥수수를 담은 소녀·소년은 그 부족을 미래를 염두해 두면서 소수정예로 교육시켰다고 한다. 이제 이 역하인리히법칙을 연애에 적용시켜보자. 나를 사로잡을 사람 하나를 기다리는 우리는 어떤가? 충분히 좋은 사람인데도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느라 인연을 놓치고 있지는 않는가? 나를 사로잡을 일 하나를 기다리는 우리는 어떠한가? 충분히 좋은 일인데도 끊임없이 다른 일과 비교하느라 계속해서 기회를 놓치고 있는 않은가?

이제, 글을 정리해야 할 시점이다. 우리는 100점 만점이라는 스스로 내면화시켜 놓은 한계의 주술을 부셔버려야 한다. 왜 100점이라는 한계를 설정하는가? 120점을 넘어200,300.400.500.... 얼마든지 우리는 질적인 도약을 통해서 창조적인 소수가 될 수 있으며, 단기적으로 현실적인 목표가 필요하지만, 그 목표가 한계로 작용해서는 우리는 창조적인 소수가 될 수 없다. 인간의 의식이 어디까지 높아질 수 있는 관점에서 현존하는 세계 3대 사상가 캔 윌버에 의해서 정리된 통합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심신을 유기적으로 설명하는 인도 아유르베다철학에서 제시하는 마음의 속성에 관한 통찰로 글을 마치려 한다.

인간의 마음은 사트바(sattva), 라자스(rajas), 타마스(tamas) 세가지 속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가지는 물질과 생명, 마음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자연의 가장 섬세한 성질들이다. 우주 만물은 이들 세 가지 속성의 여러 가지 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주의 진화 또한 이들 세 가지 속성의 상호작용과 전환으로 이루어져 왔는데 이것은 생리적이거나 물리적인 역동성보다 한 층 더 깊고 심오한 차원에서 인간의 행동과 정신세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 세 가지는 다음과 같은 성질을 띈다.

‘사트바’는 지식의 질, 창조성, 윤리, 선함, 균형과 조화를 이뤄 안정성을 주는 가볍고 투명한 설질을 가지고 있다. 내적으로나 영적으로 정신을 일깨우는 역할을 담당하며 인간에게 행복과 만족을 가져오게 한다. 이러한 사트바는 밝고 넓고 평화스러우며 모든 것을 사랑으로 융합하는 힘과 원칙이다.

‘라자스’는 변하고 활동적이며 격동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균형을 깨뜨리고, 행동의 동기를 부여하며, 적극적으로 목표물을 찾고, 분열과 분해를 유도하는 행동을 유발케 한다. 그러므로 내적보다는 외적 행동에 치우치게 만든다. 한마디로 라자스는 즐거움을 찾기 위해 행동하고 자극한다. 이러한 불균형한 성질때문에 결국 아픔과 고통과 비탄을 가져다주게 된다.

사트바가 만족이라면 라자스는 집착이다. 마지막으로 타마스는 무디고 어두우며 무기력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행동을 무겁게 하고, 시야를 좁게하고 방해한다. 모든 것을 더디게 하고 제한된 곳에 가두며 시들게 하고 분해시킨다. 또한 무관심과 망상을 가져다주고 무감각, 태만, 무지를 증가시킨다.

1960년부터 대한민국의 역사와 함께 해온 서강의 역할을 이 세 가지 관점에서 통찰할 수 있다. 60년대 절대빈곤에 시달리던 대한민국은 타마스(tamas)의 에너지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였다. IMF이후 공과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있으나, 서강은 서강학파를 통해서 대한민국의 타마스의 암울한 기운을 걷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농촌에서는 새마을 운동을 통해서 비약적인 라자스(rajas)의 에너지가 분출하기 시작하면서 88올림픽을 전후로 불과 30년 만에 선진국에 대한 꿈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단계에 까지 진입했다.

그러나, 라자스의 에너지는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공생 공존할 수 없는 위험한 요소들이 대단히 많은 에너지다. 라자스의 에너지는 외부 지향적이기 때문에 결국은 무한경쟁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은 매일 36명 이상 스스로 목숨을 끊는 타마스의 에너지가 다시 암울한 그림자를 드러내고 있다.

이런 결정적인 시기에 서강은 50주년 지천명의 시기를 맡고 있다. 결국 라자스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살려내면서도 타마스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극복하기 위해선 사트바(sattva)의 에너지를 끌어 오는 수 밖에 없다. 바로 이 창조적 소수가 해야 할 역할이 서강에게 주어졌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사트바의 에너지는 창조적일뿐만이 아니라 조화와 균형을 통해서 평화를 이루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에너지이다.

해방 이후 가장 독창적이면서 탁월한 사상가로 인정되는 함석헌선생님은 씨알의 소리를 통해서 먼저, 세상을 바꾸기 전에 내면에서 자기를 혁명하지 않으면, 역사는 더 큰 모순과 직면하게 되며 테크놀로지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편리함은 증가하겠지만, 더 치명적인 고통이 한민족에게 초래될 것이라고 갈파하셨다.

서강의 상징물 알바트로스를 언급하면서 글을 마친다. 보통 커다란 흰 날개를 펼치며 가장 멀리 가장 높게 하늘로 비상하는 바다새 ALBATROSS 정도로 생각하지만, 알바트로스에는 더 깊은 의미가 숨어 있다. 골프의 규칙에 약간의 이해가 있는 이들은 보통 더블 이글이라고 지칭하는 알바트로스가 어떤 의미인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골퍼가 평생동안 알바트로스를 경험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알바트로스는 바로 탁월함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한자로 신천옹이라고 표현되는 알바트로스는 평생 단 한 짝과만 짝짓기를 한다. 이것은 바로 서강의 모토인 진리에 순종하라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하고 있다. Obedire Veritati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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