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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브람스 레코딩, 바이올린 여왕 정경화의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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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6-25 17:28 조회12,1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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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태형(91·국문) 월간 객석 수석기자


지난 2001년 국내 클래식 음반계 최대 화제의 주인공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였다. 사이먼 래틀(베를린 필 음악감독)이 지휘한 빈 필하모닉과 드디어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레코딩해 EMI에서 발매했기 때문이었다. 차이코프스키와 시벨리우스 협주곡으로 데뷔음반을 발매했을 때 쌩쌩 부는 찬바람같이 날카로운 운궁을 품고 뜨거운 열정의 템포로 나아가는 정경화의 연주에 넋이 빠진 서구인들은 그녀를 '동양의 마녀'라고 불렀다. 이후 정경화는 베토벤, 멘델스존, 브루흐, 랄로, 드보르자크 등 거의 모든 바이올린 협주곡 레퍼토리를 녹음했지만 유독 브람스만은 레코딩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30년을 별렀던 녹음이었으니, 큰 화제가 될 만했다.

정경화의 브람스는 예상외로 점잖았다. 예전에 비해 한결 무뎌지고 굳은살이 톡톡한 듯하게 다가왔다.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저 역시 젊었을 때는 거장들의 연주를 들으면서 '나라면 좀더 강하게 연주하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연주 스타일은 인생과 같아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과거의 몰아치던 열정이 그동안 내 안에서 서서히 익어갔던 것이 아닌가. 그래서 연주할 때도 여유가 생기고 느긋해지는 것이 아닌가 해요." 당시 정경화는 그렇게 말했다. 30대가 되었을 때 뒤를 돌아보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게 됐다는 그녀는 40대에 들어서는 연주가와 어머니, 아내의 1인 3역을 해내야 한다는 부담에 짓눌렸고, 50대가 되어서 비로소 행복하다며 제대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됐다고, 압도하기보다는 조화를 도모하게 됐다고 말했다. '레테의 강'을 비유로 들며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넘어갔다던 그녀는 따사로운 오후의 거울 앞에 선 누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올해 8월, 수화기 너머로 듣는 정경화의 이야기는 많이 달랐다. 무엇보다도 건강이 좋지 않아서 녹음이나 연주회를 고르는데 가뜩이나 까다로운(그녀에게 들어온 레코딩 제의는 발매된 레코딩의 10배에 이른다) 그녀가 자신이 설 무대를 고르는 데 더 신중해졌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이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 녹음한 브람스 협주곡 이야기를 하는 대목에서 그녀는 사뭇 쓸쓸한 목소리로 '후회'라는 말을 꺼냈다. 바이올린의 여왕에 걸맞은 고결함이나 자신감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물론 나이가 들면 원숙해지긴 하겠죠. 그러나 오케스트라와 리허설을 한도 끝도 없이 오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체력 면에서나 비즈니스 면에서 그렇죠. 브람스 협주곡 녹음을 내가 기다리고 기다린 게 후회될 때도 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도 부딪혀서 하는 게 안한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 것은 실패든 성공이든 그것을 통해 배우게 되니까…."

그 순간, 불이 번쩍했다. 시간은 거꾸로 달음박쳐 리와인드되는 듯했다. 깊은 깨달음의 여운을 남긴, 대가의 회한이었다.

누구에게나 각자 정경화의 브람스 협주곡 같은 지상과제가 있을 것이다. 오래 묵혀서 혹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키워서 비로소 착수하고 싶은 그런 꿈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금고에서 그 과제를 꺼내어 먼지를 한 번 털어 보면 어떨까. 부딪혀서 해 보고 후회하는 것이 안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다면, 달리는 나의 호흡이 강철같은 허파에서 나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지금, 지칠 줄 모르고 달릴 수 있다고 믿는 바로 지금.

하긴, '그래도 해보는 것이 낫다'야말로 정경화가 긴 기다림 끝에 얻은 교훈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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