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이 아는 것에 대한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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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6-25 17:31 조회13,58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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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상순(90·국문) 모교 국문과 강사
겉보기에 사람들은 무언가를 탐구하여 진실을 캐내고자 하는 지식에의 욕망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역사를 추동하는 것 또한 진리의 베일을 벗기려는 욕망, 적나라한 진실을 끝까지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라캉의 정신분석학 이론에 따르면 실제로 사람들의 행동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너무 많이 아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판도라의 상자’가 암시하듯 너무 많이 아는 것은 불안과 혼란을 가중시키며 현실을 완전한 파국으로 이끌 수도 있는 일이다.
『식스 센스』나 『블레이드 러너』와 같은 영화들은 지나친 앎이 상황을 어떻게 파국으로 이끄는가를 보여주는 극명한 예일 것이다. 『식스 센스』의 심령학자 브루스 윌리스는 한 아이의 주위에 출몰하는 유령을 찾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며, 『블레이드 러너』의 미래 형사 해리슨 포드는 인간과 유사한 사이보그를 찾아내는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욕망과 임무를 전적으로 충족한 결과는 충격적인데,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찾던 바로 그 대상인 것으로 판명되기 때문이다. 브루스 윌리스는 자신이 유령인 줄을 모르고 있는 유령이었으며, 해리슨 포드 역시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고 있는 사이보그였던 것이다. 무서운 진실에 대한 무지나 간과가 그들의 최소한의 실정적 일관성을 지탱하는 기초임이 밝혀지며, 적극적인 욕망의 충족을 통해 이러한 무지를 상실하게 될 때, 그들의 동일성 자체가 붕괴되는 것이다.
이처럼 과도한 지식에 대한 두려움은 자신이 무지하고 무기력하다는 사실 그 자체를 은폐할 수 있도록 착각과 편견을 적극적으로 창출하기도 한다. 현진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운수 좋은 날」은 예견되는 비극적 현실에 대한 김 첨지의 대응 태도를 다루는데, 아내의 죽음에 대한 김 첨지의 태도가 갖는 핵심은 마치 그것이 모두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오인한다는 데 있다. 아내가 아픈 것은 자신이 아내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며, 아내가 바로 오늘 죽게 된 것은 자신의 운수가 오늘 유난히 좋았기 때문에, 심하게 말하면 아내의 운수를 자신이 강탈했기 때문인 것처럼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아내의 죽음이라고 하는 비극에 근본적인 죄책감을 느낌으로써 자신의 전적인 무능력을 전능성으로 바꾸고 있다. 속수무책으로 비극적 현실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 마치 스스로가 이러한 사태에 책임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김 첨지가 두려워하는 것은 아내의 죽음이라고 하는 비극적 현실이 아니라, 그러한 비극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운명적 우연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냉혹한 세계 속에서 자신이 차지할 수 있는 위치는 기껏해야 무력한 희생자나 관찰자의 입장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에 무지하기 위해, 김 첨지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착각과 오인을 행하는 것이다.
비록 김 첨지의 처지가 무척 안쓰럽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의 무지하고자 하는 안간힘이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태도를 윤리적으로 긍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과도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이러한 무지에의 욕망은 현실을 직시하여 정상적인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종종 독창적이고 생산적인 지식에 대한 강한 집단적 적대감으로 발전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황우석을 둘러 싼 숱한 논쟁들에서 보이는 히스테리적 반응과 맹목적 비난은 그것이 ‘판도라의 상자’일지도 모르리라는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현재 황우석 교수는 짐작조차 어려운 국부를 창출할 가능성이 있는 애국적 지식인이자 모든 장애인들의 희망으로 추앙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이름은 이미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자, 혹은 알아서는 안 되는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위험한 자의 상징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류에 미칠 영향을 가늠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급진적이며 복잡한 이러한 과학기술은 격렬한 논쟁의 원인이 되기 마련이다. 황우석의 줄기세포 배아복제 이론은 많은 이유로 공격을 받아왔으며, 문제가 없는 것으로 여겨져서도 안 된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 혹은 마르크스나 프로이트의 사례에서처럼 인류사의 중대한 진보로 결론난 대부분의 이론이 처음에는 우리 삶의 한복판으로 혼란과 두려움을 불러들이는 재앙으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은 이번 사태와 관련한 어떤 시사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겉보기에 사람들은 무언가를 탐구하여 진실을 캐내고자 하는 지식에의 욕망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역사를 추동하는 것 또한 진리의 베일을 벗기려는 욕망, 적나라한 진실을 끝까지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라캉의 정신분석학 이론에 따르면 실제로 사람들의 행동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너무 많이 아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판도라의 상자’가 암시하듯 너무 많이 아는 것은 불안과 혼란을 가중시키며 현실을 완전한 파국으로 이끌 수도 있는 일이다.
『식스 센스』나 『블레이드 러너』와 같은 영화들은 지나친 앎이 상황을 어떻게 파국으로 이끄는가를 보여주는 극명한 예일 것이다. 『식스 센스』의 심령학자 브루스 윌리스는 한 아이의 주위에 출몰하는 유령을 찾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며, 『블레이드 러너』의 미래 형사 해리슨 포드는 인간과 유사한 사이보그를 찾아내는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욕망과 임무를 전적으로 충족한 결과는 충격적인데,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찾던 바로 그 대상인 것으로 판명되기 때문이다. 브루스 윌리스는 자신이 유령인 줄을 모르고 있는 유령이었으며, 해리슨 포드 역시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고 있는 사이보그였던 것이다. 무서운 진실에 대한 무지나 간과가 그들의 최소한의 실정적 일관성을 지탱하는 기초임이 밝혀지며, 적극적인 욕망의 충족을 통해 이러한 무지를 상실하게 될 때, 그들의 동일성 자체가 붕괴되는 것이다.
이처럼 과도한 지식에 대한 두려움은 자신이 무지하고 무기력하다는 사실 그 자체를 은폐할 수 있도록 착각과 편견을 적극적으로 창출하기도 한다. 현진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운수 좋은 날」은 예견되는 비극적 현실에 대한 김 첨지의 대응 태도를 다루는데, 아내의 죽음에 대한 김 첨지의 태도가 갖는 핵심은 마치 그것이 모두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오인한다는 데 있다. 아내가 아픈 것은 자신이 아내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며, 아내가 바로 오늘 죽게 된 것은 자신의 운수가 오늘 유난히 좋았기 때문에, 심하게 말하면 아내의 운수를 자신이 강탈했기 때문인 것처럼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아내의 죽음이라고 하는 비극에 근본적인 죄책감을 느낌으로써 자신의 전적인 무능력을 전능성으로 바꾸고 있다. 속수무책으로 비극적 현실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 마치 스스로가 이러한 사태에 책임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김 첨지가 두려워하는 것은 아내의 죽음이라고 하는 비극적 현실이 아니라, 그러한 비극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운명적 우연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냉혹한 세계 속에서 자신이 차지할 수 있는 위치는 기껏해야 무력한 희생자나 관찰자의 입장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에 무지하기 위해, 김 첨지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착각과 오인을 행하는 것이다.
비록 김 첨지의 처지가 무척 안쓰럽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의 무지하고자 하는 안간힘이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태도를 윤리적으로 긍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과도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이러한 무지에의 욕망은 현실을 직시하여 정상적인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종종 독창적이고 생산적인 지식에 대한 강한 집단적 적대감으로 발전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황우석을 둘러 싼 숱한 논쟁들에서 보이는 히스테리적 반응과 맹목적 비난은 그것이 ‘판도라의 상자’일지도 모르리라는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현재 황우석 교수는 짐작조차 어려운 국부를 창출할 가능성이 있는 애국적 지식인이자 모든 장애인들의 희망으로 추앙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이름은 이미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자, 혹은 알아서는 안 되는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위험한 자의 상징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류에 미칠 영향을 가늠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급진적이며 복잡한 이러한 과학기술은 격렬한 논쟁의 원인이 되기 마련이다. 황우석의 줄기세포 배아복제 이론은 많은 이유로 공격을 받아왔으며, 문제가 없는 것으로 여겨져서도 안 된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 혹은 마르크스나 프로이트의 사례에서처럼 인류사의 중대한 진보로 결론난 대부분의 이론이 처음에는 우리 삶의 한복판으로 혼란과 두려움을 불러들이는 재앙으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은 이번 사태와 관련한 어떤 시사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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