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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보 마이 라이프 - 한국재활복지대학 수화통역과 조교수 허일(90수학)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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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진아 작성일07-04-23 16:36 조회22,9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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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받을 때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한국재활복지대학 수화통역과 조교수 허일(90 수학) 동문

‘수통과 허일입니다’ 전화를 받거나 교내 행정부서에 전화 걸때면 자연스럽게 건네는 인사말입니다. 서강옛집을 담당하는 서강대 후배의 원고 부탁 전화를 받고, 입에 붙어버린 이 인사말을 오랜만에 낯설게 느껴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학과 동기들이나 선배들은 수통과 교수로 있다고 하면(사실 지금은 조교수고, 실적 잘 쌓으면 2년 후에 부교수 재계약하게 됩니다), “‘아니 네가 수리통계학과에 있단 말이야? 그럴 리가’라고 하겠지”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저는 수화통역과에 재직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두 군데밖에 없는 아주 특수한 학과로, 농인을 위한 통역사(Interpreter for the Deaf)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2002년 장애인 고등교육 활성화 및 통합교육 모델 대학으로 설립된 국립 한국재활복지대학(2년제 전문대학)에서 수화통역과 교수로 재직한 지 벌써 5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서강옛집 담당자께서 전공과는 영 관계없는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 신기해서(?) 전화하셨다는 말씀에 저도 덩달아 내가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나, 제 직장과 인생을 잠시 낯설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수학 교사가 되겠다는 풍운의 꿈(?)을 안고 수학과에 입학했던 사람이 수화(농인의 언어, Sign Language)와 청각장애인, 그들의 삶에 대해 하루 종일 떠드는 사람이 되다니... (얼마 전에는 쉬는 시간 없이 3시간 내리 강의했다가 강의평가에서 지적받은 적도 있습니다) 저도 신기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평생, 하루 종일 이런 공부, 이런 일을 하고 싶어 했으니,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서강대 수화동아리 ‘손짓사랑’의 창립 멤버로, ‘참우리’ 회장까지 하면서 전공 공부보다는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을 위한 봉사활동을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국립맹학교에 4년간 매주 2-3일씩 학습봉사를 가고, 가톨릭 맹인 선교회에서 잣으로 묵주 만들고, 라파엘의 집에 3년 동안 매주 수요일마다 봉사가고, 인천 성동학교에 1년 동안 매주 금요일마다 학습봉사 가고, 시각장애 고등학생들을 위해 TV수능과외 교재를 점역하고(이거 할 때 학점이 0.7 이었습니다. 수학과 교수님들께 죄송할 따름입니다), 성이냐시오 야학에서 1년 동안 야학 교사하고, 장애인 야학인 작은자 야학에서 2년 동안 교사하고, 가톨릭 농아 선교회에서 매주 주말 수화 미사 함께 드리며 5년 동안 활동했습니다. 그러다 정말 제대로 돕고, 하루 종일 청각장애인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공부하고 연구하고 실천하고 싶어서, 4학년 때 세례 받으며 청원 드렸던 약속을 지키고자 단국대 특수교육학과에서 청각장애아교육 전공으로 석박사 과정을 이수하고,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처음 맹중복 장애인 생활시설인 라파엘의 집에 가서 4시간 동안 목욕시켜 드리고 똥 닦아 드리고 나오는 길에 벽을 잡고 토했던 대학교 1학년이, ‘어이 봉사자 새끼’라고 불리며 물 주전자 나르던 19살이, 강의와 실적 쌓기, 연구 프로젝트 따오기에 혈안이 된 36살이 되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제대로 된 여관집 주인이 되고 싶어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듣고, 남의 몸 같이면 몰라도 내 몸 같이는 사랑 못하겠노라고 개기는 장애인과 눈을 맞추며‘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다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눈을 보았기에 청각장애인을 위한 삶(for), 청각장애인에게 다가가는 삶(to), 청각장애인과 함께 하는 삶(with)을 공부하고 우리 학과 학생들과 함께‘길 없는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선해지기 쉬운 사회’를 외치셨던(?) 우리 선배이자 대부님의 뜻을 이어받아, 청각장애인을 ‘소리 듣지 못하는 사람’, ‘무능력한 사람’이 아니라 ‘볼 수 있는 사람(seeing person)’, ‘A방법보다 B방법으로 더 잘 의사소통하고 사회 참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세상을 꿈꾸며, 오늘도 책 사고, 아티클 복사하고, 몰아서 읽고, 떠들고, 글 쓰고, 월급날을 생각하며 ‘배워서 남 주는 삶’을 살아가고자 힘겹게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의원이 병자를 고치면, 병자가 의원을 고친다’고 합니다. ‘우주의 미래가 내 한 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한시도 접지 말되, 내가 하는 일이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 때마다 그걸 비웃으며 공부하라’는 어떤 책의 구절을 항상 떠올리며, 감히 청각장애인들이 제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리라 믿고 내달려온 제가, 하고 싶던 일과 공부를 직업으로 가진 행복한 사람임을 깨닫게 해주고 오랜만에 서강대와 수학과, 동아리, 지난 17년을 떠올리며 미소 짓게 해준 서강옛집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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