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시 신부 추모특집 - 추모의 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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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7-03-18 22:25 조회13,15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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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을 저희를 위해 헌신하시다가 영면하신 트레이시 신부님,
저희 '서강'과 서강의 아들딸들을 위해 천국에서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온 저에게 모교의 미국신부님들은 생전 처음 보는 외국인들이어서인지 도무지 얼굴도 구별하기 어렵고, 나이는 더더욱 알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저희가 신입생 시절인 1961년도에 중년신사 같으신 신부님께서 저희 앞에 나타나셨을 때, 저희는 ‘고향의 봄’을 부르면서 환영하였습니다. 금번 추모미사 때 신부님 약력소개를 통해 신부님이 당시 30대 중반의 젊은이셨음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신부님은 청년으로 오셔서 거의 반백년동안 서강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신부님은 대학원에서 ‘학사행정’을 전공하신 정통 행정가로 한국의 어느 대학에서도 없었던 새로운 학사행정의 기틀을 마련하셨고, 15년간 교무처장으로 고집스럽게도 원칙을 지켜나가셨습니다. 엄격한 학사제도는 저희 학생들에게만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던듯 싶습니다. 신부님 추모미사 때 김인자 명예교수님께서 신부님의 그 엄격하고 ‘융통성’ 없으신 학사제도운영이 교수님들을 얼마나 피곤하고 고통스럽게 만드셨는지 원망을 많이 하셨습니다. 180명이 입학했던 저희 61학번도 졸업하기까지 ‘생존’한 것은 100여명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고통스러운 단전의 과정을 거쳤기에 우리 ‘서강’은 단기간에 한국의 학사행정을 선도하는 대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 시작하신 서강 SLP사업은 이제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초등학생으로부터 중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영어학습 열풍이 불고 있는 우리나라에 훌륭한 교육인프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추모미사 때 전국에서 온 많은 SLP원장들을 보면서 신부님의 족적이 전국 방방곡곡에 남겨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신부님은 항상 온화하신 미소로 저희를 대했지만, 강의실에서 가까이에서 뵙지 못했기 때문인지 저희에게는 외경(畏敬)의 대상이셨습니다. 제가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에 석사학위과정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신부님께서는 미국 본토로 출장가시는 길에 잠깐 호놀룰루에 내리셔서 저희 집을 방문해 주셨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신부님을 아주 가까이에서 뵈었는데, 저희가 내놓은 홍시를 아름답게 먹는 방법을 말씀하시는 모습에서 다정다감하신 면을 보았습니다. 제가 신부님을 하와이 미군부대 안에 있는 훌라쇼장에 모시고 갔을 때, 정문의 헌병이 부대 패스 ID카드를 보여달라고 하자, 무엇을 보여달라는지 모를리 없으신 신부님께서 능청스럽게도 운전면허증을 내보이셨습니다. 헌병조차도 껄껄 웃게 만든 해프닝으로부터 신부님의 유머감각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일에 중독되셨었습니다. 제가 모교 A관 현관에 있는 교환대에서 밤 8시부터 10시반까지 거의 2년간 야간교환수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때, 맞은 편 방에서 신부님은 거의 매일 밤 10시까지 일하셨습니다. 걸려오는 전화도 별로 없는 협소한 교환대에서 밤늦도록 심심하기 짝이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던 저에게는 혼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는데, 신부님이 방에 계시는 동안에는 노래를 부를 수 없는 것이 고통이었습니다. 어느날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혼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신부님께서 교환대를 노크하시면서, 저에게 와우산에 가서 노래를 부르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 일중독에 걸리시지 않아 일찍 일찍 퇴근하셨더라면, 지금 동기들과 버스대절하여 야유회갈 때 ‘여학생'들 앞에서 노래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원망도 많습니다.
일생을 저희를 위해 헌신하시다가 영면하신 트레이시 신부님, 저희 ‘서강'과 서강의 아들딸들을 위해 천국에서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물론 야근하시면서까지 기도해 주십사 부탁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아멘!
손정식(61·경제) 한양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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