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 편지 - 조진웅(87.철학)이 보수 형(86.철학 김보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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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7-01-28 23:58 조회13,38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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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형(86.철학, 김보수) 에게
"창랑의 물 맑으면 내 갓끈 씻으면 되고, 창랑의 물 흐리면 내 발 씻으면 되지" 올해 초 승진 선물로 김종승(87 철학, 힘든 시기 정신적 지지 고맙다.) 군이 저에게 난을 보내면서 보너스로 <창랑지수>라는 책을 보내왔습니다. 책에 등장하는 여러 인간 군상과 이러저러한 상황은 형과 제가 처음 만났던 그 시절을 자꾸 떠올리게 합니다. 책이 보여주는 세상은 처세와 권모술수, 현실과의 타협, 꿈의 좌절 등 제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상황과 많이 닮아있는 반면, 형과 제가 처음 만난 그 시절은 순수와 열정, 희망이 넘쳐났고, 그러한 시절에 대한 기억은 아직까지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버팀목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수 형을 처음 만난 곳은 X관 1층 철학과 과룸으로 기억됩니다. 과룸한가운데는 목재로 만든 둥근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둘레에는 여러 선배들이 있었죠. 그 한가운데에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쓰고 다소 이국적인 모습의 보수 형이 있었습니다. 형은 학교생활 내내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삶 자체가 운동이었고, 어떤 거창한 이념이나 사상을 설파하거나 주장하지도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올바른 삶의 자세를 간직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술은 그리 잘 하지도 못하면서 거의 모든 술자리는 다 참석하고, 과룸에 가면 항상 얼굴을 볼 수 있었던 보수 형! 아마도 대학 생활 내내 거의 붙어 지내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형은 처음에는 학교 주변에서 하숙을 했었는데 그하숙집은 철학과 사람들의 아지트나 다름이 없었죠. 거처를 화양리, 관악구청 앞, 잠원동 등으로 옮겨 보았지만 상황이 별반 나아지지는 않았죠. 물론 형의 거처 주이용 고객은 저였지만요… 아마도 집에 들어가서 잔날 보다 형네 집에서 잔 날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보수 형과 승구 형이 주축이 되어 만든 “통일산악회.” 첫 산행으로 간 곳은 춘천에 있는 삿갓봉, 그때 보수 형이 만들어 온 산악회 깃발이 얼마나 귀엽고 깜찍하던지 아직도 그때 장면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옵니다. 아주 무덥고 비가 오래도록 내리지 않던 어느 여름날 통일산악회 멤버를 비롯한 여러 선후배들이 4박5일 일정으로 지리산 종주를 한 적이 있었는데, 뱀사골에서 올라가 백무동까지 우리는 쉬지 않고 걷고 또 걸었죠. 가져 간 물은 초반에 바닥이 나고 산에는 약수도 모두 말라 물 한방울 나오지 않는 극한 상황은 우리를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늑대가 되게끔 만들고 말았지만 그 와중에도 보수 형은 인간다운 면모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죠.
그 당시 과룸 죽돌이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책을 좋아하고, 바둑을 좋아하고, 토론과 논쟁을 좋아하고, 술자리를 좋아했죠. 어느 날 의기투합해서 만든 “흑백논리회.” “흑백논리회” 다시 부활시켰으면 합니다. 기원에서 자장면 먹으면서 바둑을 두다가 호프집에서 생맥주 한 잔 하면서 우주와 인간에 대해서 열띤 논쟁을 벌이고 부림장에서 문화투쟁( ? )을 하던 그때처럼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용권, 태헌, 자로, 희성 모두 보고 싶네요. 제가 교육부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던 무렵 형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한국에 돌아 온 이후에는 여주에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얼굴 볼 기회가 없네요.
사람에 따라 정도 차이가 있겠지만 저는 세상 살아가기(견뎌내기)가 그리 녹록치 만은 않습니다. 초·중 등 교육과정에 처세술이란 교과가 있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어디서 세상 살아가는 비법을 터득했는지 그런 사람들과 부대끼며 생활하는 것이 많이 버겁네요. 자주 좀 봅시다. 저도 여주에 자주 내려갈테니 서울 좀 가끔 올라오세요. 형을 자주 보면 그런대로 세상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생길 것 같습니다.
학점은 좋지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책과 사람과 세상을 사랑했고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던 그 시절의 모든 철학과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 그리고 미래에도 계속 행복했으면 합니다.
조진웅(87·철학) 동문은 국립대학에서 교육행정에 종사하고 있다. 불꽃마린을 사랑하는 테란 유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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