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장영희(71 영문) 10주기 #4.늦된 제자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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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5-02 10:19 조회19,84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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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한 번도 선생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없는 제가 제자 문집에 글을 쓸 자격이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샘터에 입사했을 때가 선생님이 척추암 투병을 마치고 강단에 복귀하시던 때였지요. 선생님을 처음 뵈었던 것도 《문학의 숲을 거닐다》 출간 기념 사인회 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처음에는 사인회 보조로, 다음은 월간 <샘터>에 쓰시던 칼럼 ‘새벽 창가에서’의 담당 기자로, 그다음은 단행본의 담당 편집자로 선생님과 함께했네요. 원고 마감일 확인 연락을 드리고, 사인회나 강연 일정을 함께하고, 책의 편집 방향을 상의하고…. 그렇게 4년이 넘는 시간을 선생님과 함께했습니다.
언제나 저는 선생님 한 발짝쯤 뒤에 서 있었던 것 같아요. 곁에 조용히 서 있다 필요하신 걸 챙기거나 이동하실 때 선생님의 물건을 들어드렸지요. 선생님은 늘 지시를 명확하게 하셨고, 필요 이상의 도움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늘 제가 서강대 제자라 “편하다”고 하셨지요.
선생님이 돌아가시고도 저는 슬퍼할 틈조차 없었습니다. 출판사로 신문·방송기자들의 연락이 빗발쳤고, 서점에서도 막 인쇄가 끝난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보내달라고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말도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언론사에 자료를 보내고, 서점에 나갈 홍보물을 만들어야 했지요.
선생님의 발인 날, 회사에서는 저의 건강 상태를 염려해 장례미사만 다녀오는 게 어떠냐고 했습니다. 저는 “그럴 수는 없다”라고 고집을 부렸지요. 선생님이 가시는 모습을 직접 보고, 배웅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사실 제게는 선생님께 진 큰 마음의 빚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투병으로 계획했던 출간 일정이 계속 미뤄지자, 회사는 출간이 무산되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담당자인 제가 원고 독촉 연락을 드릴 수밖에 없었고, 선생님은 “내가 원고 안 주고 죽을 것 같아 그러느냐”라며 크게 화를 내셨지요.
천안공원묘원에 가서 선생님을 보내드리고 온 날, 생전 처음 선생님이 제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꿈속에서도 저는 조금 먼 발치에서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었지요. 선생님은 하얀 원피스를 입고 환히 웃는 얼굴로 목발 없이 제 앞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때 비로소 저는 얹힌 것처럼 제 가슴 한 구석에 있던 마음의 빚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었지요.
돌아보면 참으로 신기한 건, 선생님의 계속된 투병에도 제가 한 번도 선생님이 돌아가실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의 저자 교정지가 손댄 흔적 없이 돌아왔을 때도 저는 ‘몸 상태가 안 좋으신가 보다’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인쇄소에서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의 견본이 나오던 날, 동생분이 영정 사진에 쓸 이미지를 보내달라고 하셨습니다. ‘위독하시구나’ 생각했지만, 그래도 저는 선생님이 더 버티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장영희 선생님이니까요.
살짝 딴 길로 새자면, 선생님 저는 늘 늦된 아이였어요. 공부머리를 깨친 것도 중학교 때였고, 남들이 선행 학습을 할 때, 후행 학습을 했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몸소 보여주신 ‘인생 수업’도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에야 깨달았던 것 같아요.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 출간되고 몇 개월이 지났을 때, 편집실로 전화가 왔습니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란 책을 사서 읽었는데, 너무 훌륭한 분인 것 같아 만나 뵙고 싶으니, 연락처를 좀 알려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그 책의 저자 분은 지난 5월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왈칵 눈물이 났습니다.
제가 곁에서 본 선생님은 어느 누구보다 삶을 치열하게 사시는 분이었습니다. 칼럼에 쓸 문장 하나를 두고 벽에 머리 부딪으며 고민하셨고, 연구실로 찾아오는 학생을 한 명도 허투루 대하시는 법이 없었습니다. 서강대학교 신입생을 대상으로 한 강연회였던가요. 무대 뒤에서 중간중간 인공호흡기를 쓰면서, 강연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너무 속이 상했습니다.
열정적으로 짝사랑하라, 희망은 세상에서 공짜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 이 모든 말이 공허한 울림으로 끝나지 않고 마음을 흔드는 한마디가 되는 이유는 선생님이 몸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선생님의 온 생애로 보여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그거 아세요? 선생님이 돌아가신 날이 제 생일이라는거. 2009년 생일은 미역국 대신 선생님 빈소에서 육개장을 먹었고, 2010년 생일에는 1주기 행사를 치렀습니다. 그 뒤로도 쭉 선생님 추모미사를 드리는 것이 제 생일날의 빼놓을 수 없는 일상이 되었지요.
추모 행사를 여러 차례 도맡아 치르면서,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느끼게 되었답니다. 저는 이번 문집이 그간 제가 준비했던 것들 중에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실 선물이 아닐까 생각해요. 척추암 투병을 마치고 강단에 복귀하셨을 때 했던 인터뷰 내용 기억나세요?
“마음속 시계는 항상 학교에 맞춰져 있었어요. 중간고사 기간인데… 곧 축제도 하겠구나… 머릿속에는 온통 시끌시끌한 학교 생각뿐이었어요. 결국 제가 죽으면 제 관을 들어줄 이도 제자들뿐이잖아요. 학생 때문에 울고 웃고, 가르치는 일이 제 삶의 전부인걸요.”
선생님 삶의 전부였던 제자들이 드리는 이 문집이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언젠가 하늘나라에 가면, 그때는 멀찍이 떨어져 있지 않고 선생님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걷고 싶어요. 그리고 “선생님, 저 잘했죠?” 하고 물어보려고요. 그럼 선생님은 “미현 씨는 뭐 그런 거 가지고 생색이야?” 그러실 것 같지만요.
이미현(96 사학) 프리랜서 에디터
* 글 목록
#1.여전히 제 안에 살아 계신 선생님 : 왕선택(84 영문) YTN 기자
#2.내 인생의 나침반 : 한정아(88 영문) 번역가
#3.문학의 힘을 보여주신 선생님 : 정원식(92 영문) 경향신문 기자
#4.늦된 제자의 고백 : 이미현(96 사학) 프리랜서 에디터
#5.‘우리 모두의 스승’이 되신 ‘나의 선생님’ : 이남희(98 영문) 채널A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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