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김의기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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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5-02 09:47 조회29,81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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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기, 진실을 밝히는 기억의 힘
영화 ‘택시운전사’는 광주민주항쟁의 진실을 목숨 걸고 알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영화가 큰 사랑을 받은 까닭은 그 진실이 한국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서강에도 진실에 목숨 바친 동문이 있다. 1980년 5월 30일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려다 세상을 떠난 故김의기(76 무역) 동문이다. 그로부터 39년 만에 사단법인 김의기기념사업회가 출범했다. 그 창립 주역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참석자 : 김의기기념사업회 박찬교(77 사학, 위 사진) 회장, 윤종화(78 경제) 추진위원장, 김성준(79 사학), 임정태(83 사회, 서강민주동우회 회장), 정선임(83 화학) 추진위원, 조민재(87 사학) 사무국장
진행 및 기록 : 권경률(90 사학) 서강옛집 편집위원
목숨 건 진실에 마음의 빚을 진 사람들
권경률 : 4월 22일 김의기기념사업회(이하 사업회)가 창립총회를 열고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그 창립 주역들이 이 자리에 모였다. 박찬교 동문이 초대 회장을 맡게 되었는데?
박찬교 : 1980년대에 서울을 떠나 산속에 사는 사람을 후배들이 이끌어줘서 여기까지 왔다. 과연 역사를 비껴 설 순 없다는 생각이 든다. 김의기와 개인적으로 친했고 죄책감도 있다. 마음의 빚을 갚는다, 여기고 사업회 초기에 조금이나마힘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
권경률 : 추진위원장으로서 사업회 창립에 앞장서온 윤종화 동문도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윤종화 : 드디어 체계적인 사업회가 발족되었다. 의기 형이 떠나고 40여년 만에 염원을 이룬 셈이다. 이제 시작이다. 꼭 해야 할 일들이 있다. 5.18 역사 속에서 김의기를 재조명해야 한다. 또 의기 형을 중심으로 선후배들이 공감하기를 바란다. 벌써 80년대와 90년대 학번 후배들이 활발하게 참여하기 시작했다. 출발선에 제대로 선 것 같다.
권경률 : 사업회를 창립하게 된 데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고 들었다.
임정태 : 201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촛불혁명으로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이 광주항쟁 희생자들의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 불렀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는데 광주 이외 지역의 희생자로 가장 먼저 불러줄 줄 알았던 의기 형의 이름이 빠졌다. 가슴 벅찬 감동은 어느새 서운함으로 바뀌었다. 한편으론 반성도 되었다. 우리 후배들이 의기 형을 널리 알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해 12월 체계적인 기념사업을 제안했다.
정선임 : 5.18민주화운동서울기념사업회에서 활동하는 사람으로서 김의기 열사가 제대로 조명되지 않는 게 안타까웠다. 요즘 광주항쟁에 대한 망언과 역사왜곡이 판치는데 김의기 선배의 죽음은 광주 이외 지역에서 광주항쟁의 진실을 밝히고자 한 최초의 투쟁이었다. 광주항쟁은 물론 한국현대사에서 고인의 위상은 중요하다. 그 역사적 위치를 똑바로 알아야 하고 기념사업을 통해 올바로 알려나가야 할 것이다.
사업회는 2018 년부터 본격적인 창립 준비에 들어갔다. 5월 의기제에서 준비위원회가 닻을 올렸고, 12월에는 추진위원회 체제로 전환하며 속도를 높였다. 사업회 창립에는 김의기 동문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분들이 적극 나섰다.
윤종화 : 1970년대에는 사복경찰이 학교에 상주해 있었다. 교내 시위도 유인물 뿌리고 잡혀가면 그걸로 끝이었다. 스크럼 한번 짜기도 힘들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의기 형은 농촌 활동에 열정적이었다. 1978~79년 형이 서강대 연합농활대를 이끌고 충청도로 농촌활동 갔는데 찬교 형이 늘 함께 했다. 당시 교내에서 의기 형과 가장 많이 어울린 게 이 형이었다. 전에 보니까 그때 사진들을 SNS에 많이 올리던데….
정선임 : 박찬교 선배님이 사진 올리신 거 보고 연락 드렸다. 사업회 회장에 추천했으니 꼭 맡아 주십사 하고…. 아까 마음의 빚을 갚고 싶다 하셨는데, 그 마음으로 사업회를 이끌어주시면 후배들이 따르겠다고 생각했다.
김성준 : 마음의 빚이라는 말씀에 공감한다. 나는 1980년 5월 30일 의기 형의 죽음을 처음으로 교내에 알렸다. 79학번에서 형을 직접 아는 사람은 드물다. 나도 의기 형을 알고 지낸 기간은 짧았다. 1980년 1월 감리교 청년회 전국대회가 열렸는데 형이 진행위원장을 맡았다. 의기 형은 형제교회 출신이고 나는 양광교회에서 활동했는데 거기서 안면을 텄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장례를 주관한 감리교 청년회에서 나한테 연락한 것이다. 학교에 알리면서 의기 형에게 얼마나 미안했는지…. 광주 참상을 목격하고 형 혼자 고뇌하고 결단했을 그 시간에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그 마음의 빚이 가시지 않는다.
윤종화 : 당시에는 알았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전두환과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학교는 폐쇄되었고 그 앞에 탱크가 서 있었다. 저들은 학생운동과 재야세력을 대대적으로 잡아들였다. 나도 학생회 부활을 주도했기 때문에 검거의 표적이 되었다.
박찬교 : 우리 모두 도망 다녀야 했다. 숨어 있거나 잡혀가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 와중에 김의기가 광주민주항쟁을 목격하고 용감하게 투쟁의 불길을 일으키려 했다. 신군부의 거짓과 음모에 맞서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목숨을 던졌다. 그러니 살아남은 우리에게는 마음의 빚인 것이다.
권경률 : 그렇다면 기념사업이 마음의 빚을 갚는 길인가? 어떻게 갚으려 하는가?
조민재 : 작년에 사업회 준비위원장을 맡았던 박종부(78 화공) 선배는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의 친형이다. 매년 1월 박종철 열사 추모제가 열린다. 모란공원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진행하는데 유가족협의회 분들과 함께 한다. 그때 민주화 운동 희생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소개한다. 대부분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분들이다. 박종철, 이한열 열사는 워낙 유명해서 영화도 나오고 사과도 여러 번 받았다. 그럼 켜켜이 쌓인 무명의 죽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기억해야 한다. 기념사업은 결국 기억하는 일이다.
권경률 : 김의기 기념사업도 다르지 않다는 말인가?
조민재 : 그렇다. 서강에는 김의기뿐 아니라 이윤경(82 사학), 정재경(82 사학) 등 민주 열사들이 많다. 우리가 잊지 않고 간직해야 할 이름들이다. 김의기를 기억함으로써 그 빛바랜 기억들도 되살려야 한다. 그 기억들 속에서 진실을 밝히는 힘이 나온다.
권경률 : 기념사업, 그러니까 기억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서강대 재학생과 동문들은 매년 5월 ‘의기제’를 개최해서 고인을 기린다.
윤종화 : 그동안 의기제가 후배들을 중심으로 면면히 이어져왔다. 한편으론 미안하고 한편으론 대견하다. 누가 알아주는것도 아닌데 해마다 기획단을 꾸려 꾸준히 해왔다는 게 대단하지 않나. 올해부터는 사업회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다. 이 친구들도 다 우리 회원이라는 생각으로 밀어줄 것이다.
조민재 : 사업회 실무를 맡으면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바로 이런 후배들을 아우르는 것이다. 현재 사업회 창립멤버들을 보면 70, 80년대 학번 위주다. 앞으로는 의기제 기획단과 김의기 장학회 후배들, 90년대와 2000년대 학번이 주역이 돼야 한다. 의기제 기획단만 해도 지난 20년간 많은 후배들이 참여했다가 뿔뿔이 흩어졌는데 이제 다시 커뮤니티로 묶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내가 사무국장이 된 건 그 가교 역할을 하기 위해서다.
권경률 : 그럼 기존의 김의기 동문 추모사업, 이를 테면 의기제나 장학회가 사업회로 통합되는 것인가?
윤종화 : 올해는 사업회를 발족시키고 틀을 갖추는 데 초점을 맞출 계획이다. 내년 40주기에 맞춰 대외적으로 통합하며 외연을 확장할 것이다.
조민재 : 사업회에 5개의 실무 분과를 두려고 한다. 의기제, 장학사업, 대외협력, 홍보, 평전 분과다. 의기제 분과는 의기제 기획단 중심으로 계속해 나갈 것이다. 기획단이 사업회와 같이 한다고 보면 된다. 장학사업 분과는 김의기장학회가 사업회를 통해 커지는 것이다. 현재 논의 중인데 원활하게 통합되리라 생각한다. 대외협력 분과는 외부 기관, 단체, 기념사업 등과 연계하는 것이다. 홍보 분과는 홈페이지, SNS 등을 관장한다. 그리고 평전 분과가 중요하다. 1985년 추모집이 나오기는 했는데 내용도 단편적이고 세월이 많이 흘렀다. 새로운 버전이 절실한 시점이다.
김의기 열사 추모집은 1985년에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다. 박찬교 동문과 누나 김주숙, 그리고 교회와 학교에서 그와 가까이 지낸 지인들이 참여했다. 약력, 추모시, 추모글, 전기, 일기 등으로 구성돼 있다.
권경률 : 김의기 동문에 관한 콘텐츠가 매우 빈곤하다. 내년이 40주기인데 평전이 나오나?
조민재 : 이제 사업회가 창립되었으니 정식으로 작가에게 의뢰할 것이다. 개인 평전을 넘어 김의기 사후 40년의 기록을 풍부하게 담을 것이다. 무엇보다 의기 형에 대한 기억들을 모아야 한다. 동문들에게, 가족들에게, 동료들에게, 한국사회에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지 취재해보면 우리가 몰랐던 사실들도 밝혀지고 김의기 콘텐츠도 풍성해질 것이다.
윤종화 : 얼마 전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내 근황을 이야기하니 동문이 아님에도 사업회 회원으로 가입했다. 평전이 나와 의기 형의 진면목이 외부에 알려지면 회원 수도 늘 것이다. 박종철이나 이한열 기념사업회도 외부 회원들이 많다고 들었다.
조민재 : 현재 회원수가 188명에 이르렀다. 68학번 선배님부터 2010학번 후배까지 세대를 폭넓게 아우르고 있다. 그런데 이 중 세 분은 동문이 아니었다. 궁금해서 여쭤보니 고향이 광주라고 했다. 납득이 됐다. 김의기 정신은 학교 안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
박찬교 : 처음에 김의기가 묻혔던 곳이 경기도 일산의 기독교 공원묘지였다. 초창기에는 추모라는 게 그냥 묘지에 가서 우는 것이었다. 의기 형 어머니가 우시면 따라서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때는 학생들이 추모하러 가면 ‘짭새’들이 기차 타고 같이 갔다. 80년대 후배들을 알게 된 곳도 그 묘지였다. 의기형이 선배들과 후배들의 다리를 놔준 셈이다.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누이도 고향 누이처럼 가까웠고 형도 친형 같았다. 사업회도 그렇게 넓혀갔으면 좋겠다.
윤종화 : 의기 형의 두 누나(김의숙, 김주숙)가 이 사업에 애정을 갖고 있다. 둘째 누나의 남편인 박철 목사도 부산에서 진보적인 목회를 하고 있다. 유족 분들도 사업회 고문으로 모셨으면 한다.
김성준 : 의기 형이 학교 다닐 때 유네스코학생회(KUSA) 활동을 했다. KUSA 후배들도 의기제가 열리면 모금해서 비용으로 전달한다. 1988년 교내 로욜라동상 앞에 추모비를 세울 때도 KUSA가 앞장섰다. 앞으로는 사업회에 참여해 함께 할 수 있도록 하겠다.
권경률 : 모교 동문회관 2층에 사업회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학교에서 도움을 준 건가?
임정태 : 박문수 서강대 재단 이사장님이 사업회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 4월 창립총회, 5월 의기제 발족 선포 등 최근의 진행상황도 체크하셨다.
권경률 : 개인적으로 ‘진리에 순종하라’라는 모교의 교훈과 ‘진실에 목숨을 건’ 김의기 동문의 행적이 결이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임정태 : 모교와 논의할 때 그 부분을 질문했다. 예수회 교육이념으로 세워진 서강이 한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한국의 민주화 역사 속에서 서강이 어떤 발자취를 남겼는가? 그렇다면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한 서강인에게 서강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나는 예수회 학교로서 한국사회에 기여하려고 했던 부분과 한국의 민주화 역사를 예수회 학교가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측면, 그것들이 김의기를 통해 하나로 통합된다고 본다. 김의기라는 존재로 인해 모교와 사업회가 서로 이어지는 개념이다. 동문회관 206호 이 공간을 사업회가 사용할 수 있도록 모교와 총동문회가 배려한 것도 그래서다.
권경률 : 말씀하신 대로 서강의 예수회 교육이념과 한국의 민주화 역사가 만나는 접점에 김의기가 있고,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동문 선배들과 후배들을 잇는 가교로서 김의기가 있다. 서강대와 한국사회의 접점, 선배들과 후배들의 가교인 김의기의 위상을 사업회가 제대로 자리매김 시켜주기 바란다.
서강인에게 김의기란? 현재적 의미를 묻다
“당신에게 김의기란?” 이번에는 참석자 한 분 한 분에게 김의기가 어떤 의미인지 묻고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해를 돕기 위해 김의기 동문의 간략한 인물사를 곁들였다.
임정태 “22살의 안타까운 삶, 22살의 청년 김의기다.”
권경률 : 임정태 동문에게 김의기란?
임정태 : 22살의 안타까운 삶, 22살의 청년 김의기다. 의기 형이 기독교회관에서 떨어진 게 22살의 일이다. 지금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보면 당시 형은 앳된 청년이었다. 시대 상황 때문에 무한한 가능성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22살에 생을 마감했다. 사업회가 너무 비장하고 무거운 일에만 매달리지 말고 일상에서 청년 김의기가 펼치고자 했던 것들을 찾아 삶의 갈증을 해소해나갔으면 좋겠다.
조민재 : 그것이 김의기 문화상을 제정한 이유다. 당시 22살 청년이 짊어져야 했던 시대의 무게를 지금 청년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문화적 상상력을 발휘해 공감해보자는 취지로 지난해 김의기 문화상을 만들었다.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제2회 김의기 문화상(시, 수필, UCC 작품)을 공모했는데 5월 15일 의기제 때 발표한다. 총상금이 550만원이다. 가급적 많은 후배들에게 상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겠다.
권경률 : 22살 하니까 생각났다. 김의기 동문이 초등학교에 일찍 들어가서 76학번 동기들보다 두 살 가량 어렸다던데?
박찬교 : 내가 77학번인데 나이는 김의기보다 한 살 위다. 우리 둘 다 경북 영주 출신이다. 김의기는 고향 후배라며 나를 챙겼다. 가족과 함께 거주하는 서울집, 그러니까 제기동 한약방 맞은 편 집에 종종 데려갔다. 식탁 두 개뿐인 학교 앞 노부부의 구멍가게에서 같이 라면도 많이 먹었다. 둘 다 고무신 신고 학교 다녔다.
김의기 동문은 1959년 경북 영주의 농촌마을에서 4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6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가족의 이주에 따라 중학교 때 서울로 전학했다. 1976년 서강대 경상대학 무역학과에 입학했다. 6남매 중 혼자 대학에 들어갔기에 집안의 기대가 컸다. 김 동문은 다정하고 유쾌한 대학생이었다. ‘신입생의 날’에는 예쁜 남성 선발대회에 참가해 여장하고 CM송을 코믹하게 불렀다. 국방색 면바지에 고무신을 신고 캠퍼스를 활보했는데, 취직한 누나(김주숙)가 그 꼴이 뭐냐면서 양복과 구두를 사줬다. 하지만 그는 사양했다. 좋은 옷 입으면 편해지고 싶고 편해지면 더 편해지려고 도둑 같은 마음이 생긴다는 이유에서다.
대학생 김의기가 가장 열정을 쏟았던 건 농촌봉사활동, 즉 농활이었다. 대학 시절 무려 10차례나 농활을 다녀왔다. 3~4학년 때는 서강대 연합농활대를 이끌며 후배들을 가르쳤다. 농촌 출신인 그는 열심히 농사지어도 빚만 늘어나는 농업 현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이중삼중으로 고통 받는 농민들에게 깊이 공감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새로운 사회를 김의기는 꿈꾸기 시작했다.
윤종화 “피우다 남은 환희 담배꽁초를 나눠주던 형”
권경률 : 윤종화 동문에게 김의기란?
윤종화 : 피우다 남은 ‘환희’ 담배꽁초를 흔쾌히 나누던 따뜻한 형이다. ‘환희’는 당시 농민들이 피우던 싸구려 담배다. 1979년 농활을 의기 형과 같이 갔다. 그 전에 준비학습이라는 걸 다녀왔는데 농촌 현실부터 생활 수칙까지 형이 가르쳤다. 심지어 아동반 활동에 필요할 거라며 동요와 율동까지 가르쳐줬다. 농활 현장에서는 의기 형이 규율을 엄하게 잡았다. 민폐 끼치면 안 된다고 농민들에게 어떤 음식도 받지 못하게 했다. 하루 종일 일했는데 밥도 못 먹고…. 그래서 사중창으로 ‘밥줘’ 노래를 부르면서 형한테 반항 아닌 반항을 했다.
박찬교 : 그 노래 기억난다. “해는 중천에 떴는데 / 밥줄 생각은 안 하네 /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 밥줘 밥줘 밥줘 밥줘.” 그리고 김의기는 ‘고래사냥’ 노래가사를 바꿔서 불렀다. “농약값 비료값 모두 올라도 농민들의 쌀값은 오르지 않네 / 농민 위한 농협은 장사만 하니 억울한 건 농민뿐 설움만 당해 / 자 올려라 쌀값 올려라 / 올려 올려 쌀값 올려 쌀값 올려라.”
윤종화 : 그때는 농활도 군사독재와 유신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의 일환이었다. 대학생들은 교회 봉사활동을 가장하고 가명을 썼다. 의기 형의 가명은 ‘병태’였다. 교내에 경찰이 상주하고 ‘선구자’ 노래만 불러도 잡혀가던 시절이었다. 학생운동은 움츠러들었지만 언더에서 학습모임을 꾸려가며 끈질기게 이어갔다. 학습모임 교재로는 이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그리고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많이 읽었다.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도 빼놓을 수 없다. 일본 사회과학 도서를 읽기 위해 일어공부도 열심히 했다.
박찬교 : 그때는 대학생들이 단체로 군사교육을 받았다. 1977년 가을에는 교련 도중에 우발적인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얼마 후 학습모임 ‘황토회’가 주도한 시위도 있었다. 그래봤자 유인물 몇 장 뿌리고 잡혀가는 게 전부였지만….
권경률 : 이 자리에 계신 분들 모두 마포경찰서 블랙리스트에 올랐을 것 같다. 마포서 학점이 어떻게들 되시나?
조민재 : 찬교 형은 군대에 강제징집 당하고 녹화사업까지 했으니 A학점이었을 것이다.
윤종화 : 다른 경찰서에 잡혀가면 관할서인 마포서에서 데리러 왔다. 자기네 ‘물건’이라면서….
박찬교 : 김의기는 성동서 형사들이 집에 드나들었다. 막내아들이 ‘문제학생’이니 잘 단속하라고 부모님을 위협했다고 한다.
윤종화 : ‘황토회’ 선배가 쓴 글을 보면 의기 형은 학교보다는 교회 활동 때문에 요시찰 대상이 된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에는 종교계가 사회운동의 보호자 노릇을 했다. 김의기 동문은 2학년 때인 1977년부터 형제감리교회에 다녔다. 이후 그는 감리교청년회와 기독교청년협의회(EYC)에서 활동하며 농촌, 농업, 농민 문제를 본격적으로 파고들었다. 1979년 4학년이 되자 김 동문은 치열한 자기성찰에 들어갔다. 부모님의 기대와 형제들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경찰의 감시와 압박 속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인생을 사회운동에 걸기로 결심했다.
“인간이 사회의 주인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싸우는 이유는 이데올로기나 당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이다.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서도 인간은 도구나 수단이 될 수 없다. 인간은 그 자체가 바로 목적이다. 사람이 보다 더 사람스럽게 살 수 있는 세상, 그것만이 진실이다. 인간지상을 위한 싸움만이 성전(聖戰)이다.” - 일기, 1979년 2월 28일자
김성준 “김의기는 평생 가장 아픈 이야기다.”
권경률 : 김성준 동문에게 김의기란?
김성준 : 김의기는 내 평생 가장 아픈 이야기다.
권경률 : 1980년 5월 30일 김의기 동문의 사망 소식은 어떻게 알고 전달했나?
김성준 : 그 다음날인가. 장례를 주관한 감리교 청년회에서 교회 선배들을 통해 내게 알려줬다. 당시 나는 서강대 기독학생회를 만들려고 했는데 학생회 쪽과 연락이 가능했다.
윤종화 : 의기 형은 원래 1979년 10월 28일 유인물을 뿌리고 잡혀가기로 돼 있었다. 혹시 후배들이 피해를 입을까봐 형은 일부러 우리와 거리를 뒀다. 그런데 이틀 전 10.26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시위 계획이 무산됐다. 의기 형은 졸업을 미루고 학교에 남았다. 그 무렵 내가 서강대 써클연합회장으로 학생회 부활에 앞장서고 있었다. 1980년 3~4월에는 학생회관을 점거해서 가마니 깔고 철야농성을 벌였다. 형은 농촌사업으로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농성장에 찾아와 후배들과 함께 했다.
박찬교 : 김의기는 달변가였다. 1980년 5월에 계엄철폐와 민주화를 촉구하는 교내 시위가 있었는데 선배가 연설을 해서 분위기를 뜨겁게 달궜다.
권경률 : 1980년 2~5월 김의기 동문은 서울과 전남을 오가며 농촌사업을 펼친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광주항쟁을 어떻게 목격했는지 궁금하다.
윤종화 : 신군부가 5월 17일부터 학생운동과 재야세력을 잡아들이고 그날 밤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기 때문에 우리 모두 도망가야 했다. 그런데 의기 형은 고구마 관련 집회가 있다고 광주로 갔다. 그곳에서 학살극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임정태 : 원래는 농활 지역장 전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갔다. 함평 고구마 투쟁 보고대회를 겸해 5월 18일 전후로 광주에서 열렸다. 의기 형이 학살과 항쟁을 목격하고 광주를 빠져나온 시기는 5월 22일 경으로 보인다. 그때 계엄군의 부대이동으로 봉쇄가 잠시 느슨해졌으니…. 광주에서 벗어난 형은 여러 곳을 우회해 서울로 돌아왔다.
박찬교 : 그 후 김의기는 친구 집에 숨어있었다. 집에는 보안사, 계엄사, 중정 요원들이 상주해서 가족과 연락하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5월 31일 종로 기독교회관에 나타났다.
조민재 : 의기 형이 기독교회관 6층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뿌리고 뛰어내렸다고 하는데 그걸 본 사람이 없다. 가족 분들은 형이 투신할 만큼 모진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 또 형에게는 애인도 있었다. 한 마디 말도 안 남기고 스스로 뛰어내렸을 리 없다.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전두환과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특히 광주에 공수부대를 파견해 민간인들을 대거 학살하고 저항하는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했다. 신군부 쿠데타의 명분을 확보하고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집권 음모였다. 당시 서강대 4학년생이었던 김의기 동문은 기독교청년협의회(EYC) 농촌분과위원장을 맡아 서울과 전남을 오가고 있었다. 5월 18일을 전후해 농촌 활동가 회의 참석차 광주에 들어간 김 동문은 계엄군의 끔찍한 만행과 광주시민들의 항쟁을 목격한다. 며칠 후 광주에서 빠져나온 그는 신군부의 은폐와 흑색선전 속에서 진실을 알릴 기회를 모색했다.
5월 30일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금요기도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자 김의기 동문은 목숨을 걸고 행동에 나섰다. 그날 기독교회관 6층 EYC 사무실에 나타난 김 동문은 ‘동포에게 드리는 글’ 원본을 관계자에게 전하고 홀로 등사기를 밀어 유인물을 만들었다. 그가 6층에서 회관 앞 탱크들 사이로 떨어져 숨진 것은 오후 5시 무렵이었다. 그 시각 사무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열사의 외침은 귀에 쟁쟁하다.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화발 소리가 우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팍과 머리를 짓이겨 놓으려고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 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 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공기가 유신잔당들의 악랄한 언론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 김의기, ‘동포에게 드리는 글’ 중에서
박찬교 “벗이다. 지금도 함께 살고 있는 친구다”
권경률 : 끝으로 사업회장 박찬교 동문에게 김의기란?
박찬교 : 벗이다. 지금도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친구다.
권경률 : 박찬교 동문은 1995년 서울을 떠나 귀농했다. 괴산을 거쳐 현재 문경에 거주 중이다.
윤종화 : 찬교 형은 강제징집에서 풀리자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노동운동 하겠다고 청주로 갔다. 거기서 형수를 만나 귀농했다. 자기는 농부 체질이라고.
김성준 : 찬교 형은 제가 아는 선배들 중에 의기 형과 가장 닮은 사람이다. 농촌, 농업, 농민을 위해 살고자 한 의기 형의 삶까지 찬교 형이 살아주고 있는 것 같다.
임정태 : 의기 형은 후배들에게 친근하고 소통이 잘 되는 선배였다고 한다. 찬교 형도 그렇다. 또 한 분의 김의기다. 김의기기념사업회에는 김의기가 있다. 그리고 22살 청년부터 백발의 농부까지 수많은 김의기들이 앞으로 함께 할 것이다. 바로 여러분!
김의기 동문은 1980년 6월 경기도 일산 기독교 공원묘지에 묻혔다. 2000년에는 정부에서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로 인정받아 광주 5.18묘역으로 이장됐다. 그가 알리고자 한 광주의 진실은 마침내 온 국민을 움직이는 힘이 되어 이 땅에 민주주의를 꽃피웠다. 김의기는 그렇게 살아있는 역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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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덕(사회)
비동문
기 일, 장병기, 장훈열
김의기 기념사업회 준비위원회 첫 회의
박문수 재단이사장 예방
박종구 총장 예방
이상웅 총동문회장 예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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