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서강옛집 창간인 안우규(60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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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3-05 13:34 조회18,71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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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옛집을 창간한 안우규 동문은 서강의 첫 입학생이자 첫 졸업생입니다. 모교 영문과 졸업 이후, 번브럭 신부님과 존P.데일리 신부님이 추천한 개신교 및 주립대 장학 프로그램 덕분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영시와 셰익스피어를 전공하며 영문과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77년 고향인 대구에 자리한 계명대학교에서 영문학과 교수로 강의를 시작했고, 1981년 한국외국어대학교로 옮겨서 영어과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된 안 동문은 현재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윈스턴 세일럼에서 살고 있습니다.
서강옛집 탄생 배경이 궁금합니다.
1963년 12월 1일부터 학생처장 비서로 일했습니다. 졸업을 앞두고 유학 준비하는 동안 교직원으로 취업한 셈입니다. 초대 학장이신 길로련 신부님께서 학생처장을 맡게 되면서 저를 비서로 채용하셨어요. 1964년 2월 8일 제1회 졸업식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졸업생을 대상으로 동문회지를 만들어보면 어떻겠냐고 길로련 신부님이 아이디어를 내셨어요. 신부님께서 초대 학장직을 물러나실 때, 한국 예수회 영문 소식지를 통한 모금 활동이 없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동문 모금 활성화를 위한 동문회지 발간을 제안하신 겁니다. 저로서는 처장 비서 업무로도 바쁜데, 가욋일이 추가되는 셈이라 부담스러운 면도 있었죠. 하지만 제가 고등학생 때 교회 유년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며 등사기로 주보, 악보, 크리스마스 카드 등을 만들어본 경험이 있어서 서강대 동문회지도 등사판으로 제작하면 되겠다 싶어서 해보겠다고 그랬습니다.
참고삼아 다른 대학 동문회지 현황을 조사해보니, 학교에 성금 내는 동문 명단을 모아서 전달하는 정도더군요. 일부에서는 우리나라 대학의 경우 졸업할 때 주소록 정도만 만들어서 나눠주면 그만이라며 동문회지 제작을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들께 외국 대학 동문회지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서양에서는 동문간 친목을 도모하고 애교심도 고취하는 내용을 담은 동문회지를 정기적으로 발행하더군요. 이를 참고해서 우리 학교 졸업생에게 도움 되는 내용으로 서강옛집을 만들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제작하셨는지요?
등사기를 사용했습니다. 밀초(파라핀) 먹인 종이(등사지)를 철로 된 줄판 위에 올려두고 철필로 긁었어요. 글자와 삽화도 넣고 본관 그림도 새겨 넣었죠. 서강옛집 내지 상단에 들어간 ‘SOGANG ALUMNI’ 글자는 길로련 신부님이 평소 작성하시던 영문 원고의 알파벳을 집자해서 따라 그렸습니다. 등사지에서 글자와 그림을 긁은 부분은 구멍이 나 있는 셈이죠. 작업한 등사지를 등사실로 가져가서 등사기 틀에 끼운 다음, 롤러에 잉크를 묻혀서 한 장씩 인쇄했죠. 창간호는 100부를 찍었고, 이듬해에는 졸업생이 늘면서 200부를 찍었습니다. 제가 1965년 5월까지 학생처장 비서로 근무하면서 매달 서강옛집을 발행했으니, 17호까지 만들었습니다. 취재, 기사 작성, 편집, 제작, 배포 등을 혼자 해낸 셈입니다. 그해 6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로 유학가면서 후배인 최일성(61 물리) 동문에게 서강옛집 제작을 맡겼습니다.
졸업생들이 모교에 후원금 낼 상황이 되려면 적어도 10년은 기다려야한다고 봤기에 동문회지 만드는 것을 동아리 활동하듯 생각했습니다. 당장의 성과를 내기 위한 게 아니라, 즐거운 의무감으로 꾸준히 발행하는 게 서강옛집 담당자여야 한다고 생각했죠. 월간지 전통을 만들어 놔야한다는 마음에 힘들어도 매달 만들었습니다. 도서관장이셨던 헙스트 신부님께서 기록의 중요성을 아셨는지, 매번 오셔서 서강옛집을 한부씩 받아 가셨어요. 창간호는 여분이 없었는데, 마침 주소불명으로 반송된 게 있어서 그걸 드렸습니다.
서강옛집 창간호
제작비는 어떻게 마련하셨는지요?
등사지와 인쇄지는 학교 비품을 활용했어요. 총무처를 방문해서 당시 총무처장이신 스킬링스태드 신부님께 등사지를 요청하면, 2장에서 많아야 3장을 주셨어요. 철필로 긁다보면 실수하곤 하는데, 등사지 여유가 없으니 정말 조심조심하면서 작업했습니다. 밀초를 먹인 등사지가 온도에 민감해서, 따뜻한 곳에서는 눅눅해져 철필로 긁기에도 불편하고 등사지에 프린트가 깨끗하게 안 나오거든요. 그래서 업무 시간 이후 난방이 꺼지면 학생처 사무실에 혼자 남아서 등사지를 철필로 긁었습니다. 절약 정신이 강하신 스킬링스태드 신부님은 인쇄지를 주실 때도 한 장씩 세어서 주셨어요. 200장을 요청하면 뭐가 그리 많이 필요하냐면서 저를 째려보시기도 했죠.
그러면 저는 허투루 쓰는 게 아니니까, 의심스러우시면 제가 인쇄할 때 옆에서 지켜보시라고 말씀 드렸어요. 200장을 한 장씩 세어서 주실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했던 기억이 납니다. 창간 당시 신부님들이 공식 편지나 중요 서류에 쓰는 종이는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외제 고급 종이였답니다. 등사 프린트가 말끔하게 나왔고, 두껍고 빳빳했기에 접어서 스테이플로 고정시키면 엽서장 모양이 되니까 동문 슬로건 홍보까지 사치를 부린 셈입니다. 그래도 제 나름대로 학교 비품을 비롯한 등사 비용과 우송비를 절약하려고 노력했지요.
현재는 4만 3000부를 인쇄해서 발송하는데, 우편요금이 상당합니다.
그럴 겁니다. 우리 때야 첫 졸업생이 60여 명이니 그리 큰 부담은 아니었습니다. 1964년 국내 우편요금이 4원이었어요. 서강옛집은 엽서 크기로 접어서 봉투 없이 보냈기에 한 부당 4원 미만으로 보낼 수 있었어요. 다해봐야 큰돈이 아니다보니 배송비는 제 사비로 부담했답니다. 매달 서강옛집 제작을 끝내면, 진창길을 걸어서 이화여대 옆에 위치한 신촌 기차역 근처 우체국까지 간 뒤 부쳤어요.
예수회 영자 신문을 비롯한 미국으로 보낼 우편물은 신부님들이 사용하던 미8군 사서함을 활용하거나 경복궁 옆에 있었던 미국 대사관 영내 우체국을 방문해서 미국 우표를 붙여서 보냈습니다. 7센트짜리 우표를 붙여서 발송하면 미국 국내우편요금으로 발송이 가능했거든요. 3일 만에 미국으로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속도도 빨랐어요. 우편물 보낼 때는 길로련 신부님이 운전하는 소형 밴을 타고 함께 다녔답니다. 신부님께서 우편요금을 줄일 수 있도록 애쓰신 거였죠.
길로련 신부님과 인연이 깊으십니다.
좋은 인연과 나쁜 인연을 모두 나눈 분입니다.(웃음) 학창 시절 김태관 신부님이 주도하신 뉴먼 클럽 관련한 성명서에 사인했다가 길로련 신부님이 대노하셨죠. 따로 저를 부르시더니 자네가 졸업은 할 수 있어도 유학은 못 갈 것이라고 다그치셨죠. 제가 공부를 꽤 잘한 편이어서 신부님이 저를 아끼셨는데 실망하셨나 봐요. 처음에 철학과로 서강에 입학했지만 외국 유학은 물론 직업 구할 기회가 더 나은 영문과로 전과하기를 데일리·번브럭 신부님과 함께 원했던 분이기도 하니까요.
벨기에 루뱅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일본 상지대에서 공부하신 김태관 신부님은 유럽식 교육 방식이 옳다면서 교양, 철학, 신학 등을 중요시하셨기에 실용 학문을 중히 여겼던 미국인 신부님들과 자주 부딪치셨어요. 사실 저는 뉴먼 클럽에서 활동하지 않았고, 성명서에 사인해달라는 친구 부탁을 들어준 것인데 말이죠. 그래도 졸업 앞두고 저를 비서로 채용해주시고, 학교 기숙사의 캡틴으로 임명해주셨으니 화해의 제스처를 먼저 취해주신 셈입니다.
제 생각에 길로련 신부님이 제자와 결혼해서 사제직을 물러나지 않으셨다면 학교 본관 앞에 게페르트 신부님이 아닌 길로련 신부님 동상이 세워졌을 것이라고 봐요. 게페르트 신부님은 학교 설립 직후인 1961년 일본으로 떠나신 반면에, 길로련 신부님께서는 서강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맡으시며 학생들과도 무척 가깝게 지내셨으니 우리가 느끼는 친밀도가 남달랐으니까요. 서강으로서는 아까운 인물이었죠.
기숙사가 서강옛집 제호 탄생 밑거름이라 들었습니다.
본관 뒤편, 지금의 로욜라도서관 건물 아래쪽에 예수회 수련생들의 숙소가 있었어요. 이곳을 지방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로 1962년 하반기부터 같이 쓰게 되었습니다. 길로련 신부님이 저를 기숙사 캡틴으로 임명해주셔서 일종의 규율 사감 역할을 했죠. 기숙사내 식당이 따뜻하다보니 학생들은 식당에 한데 모여서 이불을 펴고 잠들곤 했죠. 신촌에 살았던 최창섭(60 영문) 동문은 몰래 놀러 와서 자주 어울렸죠. 팔도 사투리를 다 들으면서 동기랑 후배들이랑 지내다보니 무척 친해졌어요.
또, 1회 동기들은 유달리 동아리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합창단, 뮤지컬, 서강타임스, 연극, 서예반, Sodality, Promenaders(길로련 신부가 교습한 사교춤반) 등 관심사에 따라 같이 해보자는 친구들이 서로 똘똘 뭉쳤습니다. 비록 동아리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제가 학문적 논문 발표 및 발간과 지도자 훈련 등에 관심 있는 각과 모범생들을 10여 명 정도 모아 ‘아테네 논문 클럽’을 조직해서 활동한 적도 있습니다. 당시 교무처장이신 트레이시 신부님께서 ‘불순한 모임’으로 오해하시고 정식 동아리로 승인을 안 해줘서 길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동문회지를 만들 때 제목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서강옛집’을 떠올렸어요.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였던 친구들이 졸업 이후 동문회지를 읽으면 언제라도 학창시절 끈끈했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도록 ‘옛집(old house)’이라 이름 지었죠.
그런데 기숙사는 1년 6개월 만에 폐쇄되었어요. 1963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길로련 신부님이 파티 비용으로 쓰라면서 돈을 주셨는데, 기숙사생들은 그 돈을 모조리 술 사는 데 썼어요. 고요한 겨울밤 기숙사 마당에서 술 마시고 수련생 숙사와 바로 이웃 동네서 들릴 정도로 유행가를 불러대며 파티를 벌인 사건이 들켰답니다. 예수회 수련생들이 다음 날 신부님께 고자질한 것도 있지만, 신부님께서 밤새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를 다 들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기숙사를 폐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기숙사 캡틴으로서 엄격하지 못했던 게 기숙사 문 닫는 데 기여한 것 같아서 무척 미안했습니다.
‘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 슬로건도 만드셨습니다.
처음에는 영문으로 ‘Be proud to be part of Sogang, as Sogang is proud of being part of you.’라고 만들었습니다. A4 용지보다 세로는 짧고 가로는 약간 긴 사이즈인 레터지를 인쇄지로 썼는데, 이를 3단으로 접어서 앞면은 표지가 되도록 ‘서강옛집’ 제호와 본관 그림 및 발신자와 수신자 주소를 적고 우표를 붙였습니다. 뒷면에다 영문 슬로건을 적어 완성된 동문회지 느낌으로 디자인 요소를 고려했습니다. 영문 슬로건은 훗날 길로련 신부님의 제안으로 ‘to be part’ 부분은 삭제하고, ‘as’를 ‘Be’ 뒤에 넣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슬로건을 만들 때 애교심을 고취할 의도는 없었어요. 처음 생긴 학교의 첫 졸업생이다 보니 사회에서 학교 명성에 기댈 게 없는 망망대해에 띄워진 조각배 심정이니까요. 그래서 졸업생인 우리끼리라도 서로를 잊지 말고 응원하면서 지내자는 의도를 담은 슬로건입니다. 슬로건과 관련해서 잘못 알려진 내용이 있는데 이는 바로잡는게 좋겠습니다. 길로련 신부님이 슬로건을 만들고 졸업식 때 처음 선보였다는 설이 있던 데, 이는 틀린 내용입니다. 길로련 신부님은 졸업식 때 맥아더 장군이 미리 보내온 축하 편지를 대독하셨을 뿐이고, 축사를 남기지는 않으셨답니다.
기사 거리는 어떻게 모으셨는지요?
동문들이 알려주는 근황은 모두 뉴스였죠. 군대 간 친구에게 편지 보낼 수 있는 주소도 적고, 취업 현황도 알리고, 유학 자격시험에 합격한 동문도 널리 알렸습니다. 교내 소식도 최대한 전했습니다. 신부님들이 외국에서 장학금 모아온 성과도 자랑하고, 학교 체육대회라든가 사은회 후일담도 넣고, 은사의 말씀과 소식도 전했습니다.
앞으로 계획이 궁금합니다.
앞으로 바랄 게 더 없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자연환경이 좋아서 책 읽고 산책하는 즐거움이 큽니다. 가끔 한국에 와서 친구들과 식사하고 수다 떠는 게 좋았는데 이제 힘들 것 같아요. 지팡이를 짚는 데도 조금 걸으면 다리가 많이 아파요. 60학번 강일회는 서로 막역하기로 유명합니다. 지금도 친구들을 보면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요. 이문형(60 경제) 동문은 얼마 전에 미국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며칠 지내다 갔고, 한국에 오면 엄정식(60 철학), 최창섭(60 영문), 이우진(60 사학), 김융부(60 영문), 안철(60 물리) 동문을 비롯한 친구들을 많이 만나려고 애씁니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 동기들이 하늘나라로 자꾸 떠나네요.
계획이라면, 사라진 초창기 서강옛집 자료를 갖추고자 이곳저곳 수소문하고 다닙니다. 사실 이렇게 오랫동안 서강옛집이 나올지는 몰랐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발간되면 좋겠습니다. 서강옛집과 동문회 역사가 곧 서강대 역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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