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상생’ 길을 만들어 갑니다 - 박영기(89 종교)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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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3-05 11:58 조회19,48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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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사는 신뢰를 바탕으로 ‘사람’을 중시 ‘남을 위한 삶’ 가치를 일깨워준 서강
박영기(89 종교) 한국공인노무사회 회장
박영기(노무법인 ‘사람’ 대표) 동문이 1월 1일 한국공인노무사회 17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박 동문은 2017년 11월 18일 치른 회장 선거에서 다른 두 후보들과 경선한 끝에 808표 중 405표(49.6%)를 득표해 당선됐다. 박 동문은 공인노무사회 사무총장, 부회장을 지냈고 참여연대 노동사회위원회 실행위원,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상임위원, 서울시 근로자권익보호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 늦었지만 회장으로 당선되고 취임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회장 경선이 치열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당선 요인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1986년 공인노무사 제도가 제1회 시험과 함께 시행되기 시작했죠. 이듬해 공인노무사회가 창립됐고요. 제가 2008년부터 2년 간 공인노무사회 사무총장으로 봉사했고 또 부회장으로도 일했습니다. 당시 제 활동을 좋게 평가해주신 것 같습니다. 노무사회 재정 기반을 확충하면서 흑자로 전환시키고 안정을 가져왔거든요. 살림꾼으로 평가해주셨다고 봅니다.
4년 전부터 노무사회 일과는 다소 거리를 두고 노무법인 일에 전념했습니다. 그러다 촛불 정국이 급작스럽게 펼쳐지면서 그냥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어요. 2016년 11월 18일 공인노무사 501명이 시국선언을 했죠. 불과 나흘 만에 511명이 선언 서명에 동참했는데, 공인노무사회 창립 이래 사실상 처음 이뤄진 시국선언이었습니다. 이후 대선 때는 당시 문재인 후보 지지 선언에 501명이 동참했습니다. ‘노동 존중 사회’라는 대의에 공감한 거죠. 회장 선거 출마는 작년 9월 쯤 결심했으니까 경선을 두 달 정도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 현재 우리나라 노동 문제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어느 하나를 가장 중요하다고 꼽기 어려울 만큼 많은 문제, 이슈가 있지만 지금으로선 아무래도 최저임금 문제가 중요합니다. 30인 미만 고용사업주에게 지원하는 일자리안정자금 지원 정책은 논란이 되기도 하지만, 최저임금 문제의 본질이 아니에요. 일자리안정자금 문제를 최저임금 문제 전반과 뒤섞어 싸잡아 비판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건 타당하지 못해요.
그리고 일자리안정자금을 지원 받기가 상당히 까다로운 면이 있어요. 아직까지도 지원 대상자들에게 정확하게 널리 알려지지 못한 상태고요. 고용사업주들도 형편이 어려운 분들이 적지 않죠. 공인노무사는 노동자와 고용사업주의 현실에 모두 깊이 공감해야 합니다. 고용사업주가 노동 관련 법규를 준수하면서 노무관리, 나아가 기업 활동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노사는 기업의 양 날개라고 할 수 있는 데, 어느 한쪽 날개가 처지거나 하면 제대로 날 수 없으니까요.
현장을 가보면 노든 사든 ‘나쁜 사람’은 없어요. 다만 협상이나 쟁의 과정에서 감정이 상한 나머지 극한 대립으로 치닫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다보면 본래 양측 모두 원하지 않던 상황이 펼쳐집니다. 결국 법정 다툼으로 가버리곤 하는데, 가장 바람직한 건 법정까지 가지 않고 서로 타협하고 합의하는 겁니다. 노무사의 역할도 바로 그 지점에 있어요. 일종의 협상가이자 조정자 역할을 해야죠. 그래서 노무사는 노나 사측의 요구만 들어주는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양측에 해야 할 말을 해야 합니다.
>> 공인노무사라고 하면 노동자나 노조 편에 서지 않을까 하는 선입견도 없지 않습니다만.
공인노무사 제도 초창기에는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한 분들이 많은 편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일찍부터 사회현실과 그 문제점에 눈을 뜬 분들, 노동 문제를 깊이 인식한 분들이 공인노무사가 된 경우가 많았던 겁니다. 이 점에서 다른 전문 직능 분야와는 다르죠. 또 우리사회는 아직까지도 노동자의 권익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면이 큰 것도 현실입니다.
하지만 대다수 공인노무사들은 어느 한 편을 일방적으로 편들지 않습니다. 노사 양측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기업이 노무사를 신뢰하고 함께 문제를 풀어나가는 경우도 대단히 많아요. 노무사는 한 마디로 말해서 ‘노사 상생’을 추구합니다. 노무사들이 노동자 편을 든다는 선입견은, 아무래도 우리사회에서 노동자 측이 약자인데다가 제도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겠지요.
>> 공인노무사 동문들의 친목과 유대 관계가 끈끈하다고 소문 나 있는데요.
그렇습니까? 이노하(84 사학) 선배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선배님은 공인노무사 시험으로는 저와 동기지요. 서강노무사회가 매년 신입 동문 노무사 환영회도 열고, 신년회와 송년회도 거르지 않습니다. 매년 5~7명 정도 신입 노무사 동문들이 탄생합니다. 그러니까 한 해 두세 번 정도는 노무사 동문들이 꼭 만날 수 있는 거지요. 직능별 동문 모임이 적지 않지만, 서강노무사회는 꾸준함이 장점인 것 같습니다. 규모는 100명이 안 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끈끈하다고 할까요.
>> 공인노무사가 되신 동기나 계기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재학 시절 군 복무 마치고 복학한 다음 ‘아! 이런 제도가 있구나’하고 공인노무사에 깊은 인상을 받긴 했지만, 졸업한 뒤 생명보험회사에 취직했어요. 1997년 IMF 위기가 닥치면서 해고 칼바람이 제가 다니던 회사에도 불어 닥쳤습니다. 결국 쟁의가 일어났고 저도 참가했다가 인사 상 불이익을 받기도 했죠. 입사 동기 80명 가운데 20명도 남지 않았더군요. 1999년 봄에 사표를 냈습니다.
일반적인 직업보다는 뭔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직업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준비 끝에 2002년 제11회 공인노무사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예전 직장 다닐 때 동료, 선후배들과 가끔 만나기도 하는데 옛 직장에 노무 자문을 해주기도 했어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맺는 인연이라는 게 정말 돌고 도는 것 같습니다. 공인노무사는 사람들과의 신뢰 관계가 대단히 중요한 직업입니다.
>> 노무사 활동을 하면서 ‘내가 서강 출신’이라는 걸 느낄 때가 있습니까?
사실 우리 서강 출신들이 인맥이나 모임 같은 데 익숙하지 않은 편이죠. 동문들만 끼리끼리 뭉치고 으쌰으쌰 하는 스타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고려대 스타일이 그렇다고들 하지요. 고용노동부의 임무송(81 경영) 선배님이 우리 분야에서 대표적인 선배님이신데요. 서울지방고용노동청장, 고용정책실장, 근로개선정책관, 노사협력정책관,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친 분이죠. 일처리가 참 꼼꼼하고 철저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분입니다. 고용노동 행정과 정책의 최고 전문가 반열에 드는 선배님입니다.
제가 노무사로 활동하다보니 노동 정책이나 이런저런 일 관계로 임 선배님과 만날 때가 제법 있었어요. 처음엔 서로 동문인줄 몰랐죠. 이것도 서강 스타일인가요?(웃음) 서로 동문인 걸 알게 된 후로도 그걸 내색하거나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실력과 인품을 확인하는 게 먼저죠. ‘선(先)실력 후(後)인맥.’ 이게 서강 다운 거 아닌가 싶어요. 저 사람 실력도 인성도 괜찮다 느꼈는데 알고 보니 서강이더라, 이런 경우가 많죠.
>>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박영기 학생’은 어떤 학생이었습니까?
일단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한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공부를 완전히 등한시한 건 아니에요. FA가 무서우니까요. 그래도 공부 자체는 좋아했어요.
>> 서강옛집에서 인터뷰한 동문들의 공통점입니다.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한 건 아니었다.’
다행입니다.(웃음) 당시엔 학원자주화와 등록금 인상 반대가 이슈였죠. 종교학과 학생장으로 활동했습니다. 1991년에는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시위 도중 폭행을 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죠. 시위도 많이 했고. 통일 관련 학생운동에도 참여했습니다. 전공인 종교학도 좋아했어요. 학교 때 현실 참여와 공부를 병행할 수 있다는 게 좋았습니다. ‘제3세계 신학회’ 활동도 했는데, 현실과 신학을 접목시키는 차원이었죠. 옛날로 돌아가 다시 대학을 택하라 해도 저는 두말없이 서강을 택할 겁니다. 사실은 제가 신학교를 가서 사제의 길을 걸으려 했어요. 서강대학교에 종교학과가 있는 걸 알게 되면서 종교학을 공부하고 사제가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대입 지원할 때 1지망부터 3지망까지 모두 종교학과를 썼어요.
>> 회장님에게 모교 서강은 어떤 의미입니까?
종교학과에서 공부한 것이 참 좋았습니다. 공인노무사들 가운데 경영대, 법대 출신이 많습니다. 하지만 인문적 소양이랄까, 교양이랄까요, 그런 것이 정말 필요하다는 걸 많이 느낍니다. 결국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사람들과 상대하고 함께 하는 일이니까요. 인간에 대한 이해가 가장 중요합니다. 전문가로서의 업(業)의 바탕에는 결국 사람에 대한 이해가 있습니다. 제가 노무법인 이름을 ‘사람’이라 한 것도 그런 뜻입니다. 제가 모교에서 배운 것 가운데 ‘남을 위한 삶’이라는 모토가 가장 깊이 남아 있습니다. 공인노무사 일을 하는 동안 그 모토가 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요. 아! 그립네요. 제가 학교 다니던 시절엔 대다수 학생들이 공부 걱정, 학점 걱정 하지 않고 놀고 싶으면 놀고, 각자 추구하는 걸 열심히 추구했는데 말이죠.(웃음)
>> 동문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해주세요.
‘서강’이라는 것,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자랑이 되고 자부심이 되고 힘이 됩니다. 그 이름을 떠올리면 어딜 가도 든든해집니다. 아마 동문 여러분 모두가 그러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다시 도전한다면 합격하지 못할 것 같다고 느끼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로 모교인 서강대학교, 또 하나는 공인노무사, 그리고 제 아내입니다.(웃음) 이 인터뷰가 나갈 때쯤이면 봄소식이 들려오고 있겠지요. 유달리 추운 날이 계속 이어졌던 겨울이 가고 새봄이 오고 있는데, 동문 여러분 모두 각자의 소망을 활짝 펼쳐나가시길 기원합니다. 또 우리 사회가 어느 분야에서든 갈등과 대립보다는 타협하고 상생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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