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과 정일우 신부 - #3 진정으로 예수를 따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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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1-08 10:19 조회19,42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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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서강 학생들은 정일우 신학생을 ‘작은 데일리’, ‘꼬마 데일리’라 불렀다. 동명이인 존 P. 데일리 신부님에 비해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는 학생들과 무척 친하게 지내 학생 이름을 다 외웠다. 만난 순간부터 ‘재선’이라고 내 이름을 불렀고 평생 그렇게 나를 불렀다. 내가 졸업 후 1967년 군복무를 마치고 학교에 왔을 때 그는 서품을 받아 신부님이 되어 있었다.
1973년 11월 예수회 수련장직과 학교 교수직을 떠나 빈민이 되어 있는 신부님을 청계천 판자촌 쪽방에서 만났다. “뭐 하세요?” “그냥 살아요.” 이듬해 11월 필리핀 마닐라의 빈민 지역 톤도(Tondo)에서 일주일 간 빈민 생활을 하고 나서야 신부님을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한국천주교회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모든 활동을 총괄 협의 조정하는 일을 하고 있었기에, 신부님을 계속 만났다. 1975년엔 양평동에서, 1977년부터는 시흥군 신천리 복음자리 공동체에서, 1979년에는 한독마을에서, 그리고 1980년대 초반기에는 목동과 상계동 빈민촌 철거 현장에서, 1985년에는 목화마을에서. 상계동 빈민촌 철거 현장은 전쟁터와 같았다.
그분은 검은 사제복도, 수단도, 로만칼라도 입고 달지 않고 빈민처럼 운동복이나 개량한복을 입었다. 그들과 같이 먹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노래 부르며 즐거울 때는 덩실덩실 춤추기도 했다. 그런 그분은 당국에 ‘빨갱이’로 취급당했고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 김수환 추기경님이 보증을 서신 문서를 지니고 계셨다. 그분은 도시빈민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1986년 도반 제정구와 함께 라몬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였다.
20년 간의 빈민생활을 끝내고 1994년 신부님은 충북 괴산에서 농민이 되셨다. 그곳에서 농민으로 살고 있는 김의열(84 종교) 동문을 만나 정착하셨다. 10년 농민살이 끝에 2004년 칠순을 앞둔 신부님은 63일간 단식을 하셔서 의식 불명 상태에까지 이르셨다. 이후 2014년 6월 선종하실 때까지 10년 동안 병상생활을 하셨다.
2009년 지인들이 신부님의 구술을 받아 자서전을 만들고, 신부님과 가까이 지낸 많은 분들의 회상을 모아 ‘정일우 이야기’라는 책을 만들었다. 다큐 영화계의 유명한 감독 김동원(74 신방) 동문이 2017년 ‘내 친구 정일우’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제작하였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신부님은 수도자로 예수회원이 된 이후 신부가 되고 교수가 되었지만, 가난한 사람이 됨으로써 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여정을 시작하셨다. 그분이 염원했던 것은 진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참사람, 인간다운 사람, 하느님이 만들어 놓으시고 스스로 “좋다”고 감탄하신, 하느님의 모상으로 하느님을 닮아 태어난 본래의 인간을 추구하셨던 것은 아닐까. 입으로만 복음을 사는 것을 버리고 복음을 삶으로 살아가기로 작정하고 가난한 이들에게서 희망을 보고 스스로 가난한 삶을 택한 것은 아닐까. 그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임재를 누리려 한 것은 아닐까.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자리를 버리고 인간이 되셔서 가난한 인간으로 살아가시고,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신 예수를 따르는 길이라고 신부님은 생각하셨던 것은 아닐까. 신부님의 제자로, 친구로,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투신의 삶을 살아온 동지로 신부님이 그립다. 나이가 들어가는 요즈음 더욱 그렇다.
글 최재선(60 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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