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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과 정일우 신부 - #4 꾸밈없는 영혼의 참 자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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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1-15 09:51 조회24,8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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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정일우 신부, 김의열(84 종교) 동문, 김 동문의 아내 권영매

 

1993년 봄, 정일우 신부님은 농촌현장 실습차 우리 마을에 와 계시던 예수회 장석홍 수사님을 만나러 내려오셨다. 서울에 수박 배달을 하고 밤중에 마을로 돌아오자 신부님이 와 계셨다. 신부님은 나를 보자마자 반갑게 악수를 청하며 “안녕하세요, 정일우 신부입니다. 공기가 참 맑고 좋네요”라고 인사하셨다. 밤늦도록 술 마시며 이야기 나눴다. 신부님은 “너무 좋다. 공기도 좋고 주변 경치도 좋고 무척 마음에 든다”라고 말씀하셨다. 

 

다음날 신부님은 서울로 올라가시면서 말씀하셨다. “앞으로 매달 한 번씩 내려오겠다”라는 말씀이었다. 기뻤다. 그 뒤로 매달 빠짐없이 찾아오셨다. 오실 때마다 공소에서 미사를 하셨고 밤늦도록 술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1994년 11월 신부님은 아예 짐을 싸서 우리 마을로 내려오셨다. 신부님과 함께 살며 땀 흘려 일하고 먹고 마시고 이야기 나누고 웃고 놀고 지낸 8년 세월은 지금 생각해도 꿈같은 시간이었다.

 

신부님은 당신이 농부의 아들임을 자랑스러워하셨다. 고향인 일리노이주 시골마을에서 자라던 이야기를 자주 하셨고 또 미국에서 계속 농사짓고 계신 형님이나 조카들 이야기도 하셨다. 농부의 아들답게 건강한 몸을 타고나신 신부님은 어떤 농사일이건 마다 않고 젊은 농부들과 함께 하셨다. 1996년에 스물한 동이나 되는 비닐하우스를 농장 회원들이 함께 지은 적이 있다. 비닐하우스를 짓는 일은 중노동이다, 신부님은 젊은 사람들과 똑같이 일하셨다. 1996년부터 비닐하우스에 토마토 농사를 시작했다. 토마토를 기르고 따는 일도 신부님은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하셨다. 햇볕이 뜨거운 한여름 비닐하우스 안에 들어가면 가만히 있어도 곧바로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신부님은 옷이 땀에 젖으면 팬티차림으로 토마토를 따셨다. 토마토를 따시면서 한편으론 딴 토마토를 그 자리에서 맘껏 드시곤 했다. 우리는 토마토 따서 반은 신부님 뱃속으로 들어간다고 놀려드리곤 했다.

 

밭고랑을 사람이 끄는 쟁기로 일궜던 일도 있다. 내가 쟁기를 잡고 신부님은 앞에서 어깨에 멜빵을 메고 쟁기를 끌었다. 신부님은 쟁기를 끌고 가시면서 “내가 결국 한국 농촌에 와서 외국인 노동자로 학대받는 신세가 됐다”라고 농담하셨다. “이걸 찍어서 미국에 있는 내 조카에게 보내 외국인 노동자의 실태를 알려야 한다”라며 조카 이름인 ‘휴’를 부르며 “휴~ 휴~ 나 좀 구해줘~”라고 소리치시면서 쟁기를 끄셨다. 나중에 생각하니 노인 분께 참 못할 일을 맡겼구나 하는 송구한 마음이 들었다.

 

신부님은 영성체 시간에 “신자들은 예수님의 몸으로 받아먹고 비신자들은 나누어 먹는 음식으로 알고 먹어라”라고 하시며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성체를 나눠주셨다. 성체와 성혈을 누룽지와 막걸리로 하실 때도 많았다. 성가도 가톨릭 성가 보다는 주로 시대 모습을 반영한 노래들을 고르셨다. 정태춘 노래나 한돌의 노래를 좋아하셨다.

 

신부님은 교리나 제도나 어떤 외적 권위로부터 자유로웠고 내면과 영혼을 제약하고 속박하는 모든 것을 싫어하셨다. 사람들이 늘 당신을 ‘사제가 아닌 인간’으로 대해주기를 원하셨다. 신부님은 늘 나에게 ‘죄의식을 걷어낼 것’과 ‘교계제도라는 권위에서 해방될 것’을 원하셨다. 그에게는 선인과 악인, 신자와 비신자의 구분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나이와 성별과 직업과 신분과 종교와 이념으로 사람을 재단하는 일은 애초부터 가당치 않았다.

 

신부님은 생전에 “몸은 나이가 있으나 마음은 나이가 없다”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자신을 꾸미거나 사제의 권위로 포장할 필요가 없었다. 많은 이들이 신부님께 찾아와 삶의 어려움과 갈등을 하소연했고 당신은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셨다. 꾸밈없는 진실, 조건 없는 사랑, 그리고 집착을 벗어난 자유.

 

신부님은 자주 “할 일을 할 만큼 했으면 떠난다”라고 말씀하셨다. 노자의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와 통하는 말씀이었다. 그러면서도 신부님은 우리가 사는 곳에서 끝까지 여생을 보내고 싶어 하셨다. 신부님은 2002년 초 서울 무악동 한몸공동체 원장으로 소임을 받아 떠나게 됐을 때 매우 힘들어하셨다. 나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떠나시기 며칠 전, 담배 건조실을 개조해 만든 신부님 골방에서 단둘이 낮부터 술 마셨다.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신부님과 난 아무 말 없이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신부님이 말씀하셨다. “의열아! 이제 됐다. 이제 떠나도 될 것 같다.” 

 

쏟아져 내리는 햇빛, 파란 하늘 가운데 피어오르는 뭉게구름, 내 볼을 시원하게 스쳐가는 바람줄기, 땅을 촉촉이 적시는 빗줄기 속에 그 분이 살아있다. 그가 뿌려주고 간 씨앗들은 우리 마음 안에서 싹 틔울 준비를 하고 있다. 그분을 그리워만 해서는 부족하다. 우리 안에 자유와 진리와 사랑의 싹을 틔우고, 우리 삶 안에서 그분을 되살려야 한다. 우리 스스로가 정일우가 되어야 한다. 그게 곧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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