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과 정일우 신부 - #1 ‘참 사람’ 정일우 신부의 삶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1-03 13:19 조회17,890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인생의 진짜 목표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제대로 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참사람이 되는 것이다. 처음 판자촌에서 살기로 했던 것도, 내가 진짜 사람이 되고 싶어서다. 제대로 된 사람이 되고 싶었고, 참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곳에서 살았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이 진짜 사람은 공동체를 통해서 된다. 혼자, 따로 내 혼자의 힘으로 참 사람이 되지 않는다.” - 정일우(1935~2014)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故정일우(John Vincent Daly·사도 요한, 1998년 귀화) 신부는 미국 일리노이주 파일로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리노이주 샴페인 카운티의 어바나에서 남쪽으로 20㎞ 정도 떨어져 있는 곳으로, 2010년 인구 통계로 1466명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이들은 정 신부를 가리켜 “재미있는 친구”라고 했다.
18살 때인 1953년 8월 8일 예수회에 입회, 예수회 위스콘신 관구 수련원과 주니어 레이트 과정을 거쳐 세인트루이스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25살 때인 1960년 9월 신학생 신분으로 한국에 와서 1961년 3월부터 3년 동안 서강대에서 가르치다가, 미국으로 돌아가 세인트루이스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966년 사제서품을 받고 돌아와 예수회 부수련장과 수련장을 맡으면서 철학과 영성신학을 가르쳤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도쿄까지 10일 걸렸다. 고베로 이동해 다시 배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1960년 9월 21일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한 화물선 벽에 한국말로 ‘감사합니다’라는 낙서도 있었다. 10일 동안 계속 연습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부산 분도수녀회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첫 밤을 보내는데 내방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인줄도 모르고 쳐다보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계속 말했다. 도둑은 그냥 나갔다. 나를 찾아온 첫 번째 한국 손님이었다.”
“그럼 내가 왜 여기 있나요?” 한국 현실에 눈 뜨다
정 신부는 1969년 9월 12일 명함에 “대한아 슬퍼한다. 언론자유 시들어간다!”라고 쓰고 가슴에 달았다. 상주(喪主)가 오른 팔에 차는 베천을 차고 명동으로 갔다. 명동 구둣가게에서 구두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마침 시위가 있던 날이었다. 종로 쪽으로 가다가 연행됐다. 경찰이 이유를 묻자 정 신부가 답했다. “한국에는 언론의 자유가 없고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이에 경찰이 “한국에는 언론자유가 있어요”라고 말했다. 정 신부는 이렇게 다시 말했다. “그럼 내가 왜 여기 있나요?”
남대문 옆에 있는 그랜드호텔에서 조사받다가 당시 총장 존 P. 데일리 신부가 와서 학교로 함께 돌아왔다. 데일리 총장이 정 신부에게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명령을 내렸다. 그 미국 신부 내일 모레 글피까지 미국으로 쫓아버리라고.” 데일리 총장이 요로에 진정하여 겨우 추방을 면했다. 당시 외국인은 2년 마다 거류증명을 갱신해야 했는데 이 사건 이후 정 신부는 2개월마다 갱신해야 했다.
빈민의 삶 속으로 들어가 빈민과 하나 되다
정일우 신부는 자신이 복음을 입으로만 전하고 있다는 강한 의심이 들어 1973년 11월 청계천 판자촌으로 들어갔다. 이후 몇 번이나 강제 추방 위기를 맞았다. 그때마다 “정든 한국과 벗들을 떠난다고 생각하면 생명이 끊어지는 것 같았고,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라고 회고했다. 이곳에서 제정구(1944~1999)를 만났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정구에게 두 가지를 요구했다. 하나는 ‘판자촌에서 나가라’, 하나는 ‘저 외국 신부 정일우와 살지 말라’ 이 두 가지를 들어주면 좋은데 취직 시켜주겠다고 했다. 여기서 정구가 하느님의 어떤 징표를 느꼈다. 그것은 바로 ‘저 사람들이 하라고 하는 것 반대로 하면 된다’였다. 정구는 “나는 하느님한테 취직할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정구는 1976년 9월 1일 성경책을 사가지고 거기다가 ‘취직기념 하느님께’라고 썼다.”
양평동 판자촌 생활을 시작으로 철거민 집단이주 마을인 복음자리, 한독주택, 목화마을을 건립했다. 1980년대는 목동, 상계동 등 강제철거에 맞서 도시빈민운동에 함께했다. 1986년 판자촌지기 제정구와 함께 막사이사이상을 공동 수상했다.
“슬퍼하지 말고 즐겨라. 내 장례를 축제처럼 지내라.”
1994년 11월부터 정일우 신부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로 내려가 농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농약은 논밭의 생명, 뿌리는 농부, 먹는 사람 모두를 죽이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당시로서는 생소하기 그지없던 우렁이농법 같은 유기농법을 시도했다. 그러면서 ‘농부들은 돈을 못 벌고 그 주위에 붙어 있는 업자들만 돈버는 현실’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도 쉬지 않았다. 이제는 헛간으로 변해버린 허름한 농가의 단칸방에서 생활하면서 말이다.
정 신부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슬퍼하지 말고 즐겨라. 내 장례식을 축제처럼 지내라.” 선종한 지 49일째 되는 2014년 7월 20일 추모미사에 모인 100여 명은 유언을 따랐다. 이야기꽃과 웃음과 떡과 막걸리와 풍물장단과 노래가 어울린 잔치였다.
글 표정훈(88 철학) 편집인 | 사진 이창섭(84 국문) 사무국장, 제정구기념사업회, 시네마달 제공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