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 장의균(70 신방)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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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11-03 14:31 조회15,94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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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 간첩 딱지 30년 만에 뗍니다”
고문 조작 ․ 징역 8년 ․ 재심청구, 억울한 일 없어야
1987년 교토대학 유학 중 말도 안되는 간첩혐의로 투옥, 1995년 만기 출소한 장의균(70 신방) 동문에게 2017년은 어느 해보다 특별하다. 30년 만에 받아들여진 재심 선고가 11월 30일 내려지기 때문이다. ‘막걸리 간첩’으로 억울한 징역살이를 겪은 장의균 동문을 고등법원 판결을 앞두고 만났다.
‘막걸리 간첩’으로 알려졌습니다. 대체 무슨 말인지요?
1987년 7월 5일 느닷없이 검은 승용차에 실려 눈을 가린 채 끌려간 곳이 보안사였습니다. 처음에는 어디인지도 몰랐지요. 보안사에서 11일간 잠을 재우지 않으면서 고문을 해댔습니다. 25일 동안 조사 받았는데, 나중에 재판 받을 때 판사가 공소장을 잘 보라고 해서 그때서야 제가 간첩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대전교도소에 가게 되었는데 고문으로 몸을 잘 못 쓰는 걸 본 사람들이 “심한 고문 받은 걸 보니 막걸리 간첩이군” 하더군요. 진짜 간첩에게는 고문 안한다는 사실을 그들에게서 배웠습니다.
억울하고 비통하셨을 텐데, 어쩌다가 그런 일을 당하게 되셨는지요?
서강대 재학시절부터 고대사에 관심이 컸습니다. 군대 가서는 분단의 비극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수천년을 같이 살아온 동포들인데 북녘 동포를 무조건 적이라고만 가르치는 군사문화가 싫었습니다. 분단 역사는 수십 년뿐이지만 우리 민족 역사는 5000년입니다. 5000년은 우리 민족 진짜 역사이지만 분단 이후 수십 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남북대치를 원하는 소수의 사람들 때문에 왜곡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분단도 민족 동질성을 침해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같이 살아온 긴 시간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고대사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같이 살아온 역사를 잘 알아야 통일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고대사 전문 출판사인 개마서원을 설립했고 고대사 관련 서적을 출간했지요. 한국 고대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려고 교토대학교로 유학을 떠난 게 1985년입니다. 일본에 도착한 이후, 일주일 중 3일은 막노동으로 생활비와 학비를 벌고 나머지 시간엔 공부에 매달리는 생활을 했습니다. 이미 결혼했고, 자녀 셋을 한국에 두고 떠난 유학이었기에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2년을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간첩이 된 것이지요.
유학생으로 생활하다가 돌연 간첩이 된 거군요. 1987년이면 한국에서는 6월 민주항쟁이 한창일 때였는데요.
1987년 9월 5일 저는 대한민국에서 간첩이라고 발표됩니다. 일본 유학 시절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대남공작 조직과 접촉해 간첩교육을 받고 간첩활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조직도가 그려졌지요. 민주화 투쟁에 찬물을 끼얹고 5공화국 군사독재정권을 연장시킬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붉은 전사 장의균’이라는 TV 특집 프로가 방영될 정도였습니다.
고대사를 연구하고자 선택한 유학이었는데 갑자기 모든 것을 잃고 고문 끝에 간첩이 되었다니, 기억을 되내는 일조차 힘겹겠어요.
일본 유학 중 조총련이 운영하는 조선대학에 가서 조선왕조실록을 보고 온 적이 있습니다. 유학 중 담임 교수에게서 조선왕조실록 한글 번역본이 유일하게 조선대학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보러 간 것인데, 그 일이 빌미가 된 것이지요. 조선왕조실록을 보았다는 이유로 간첩이 되다니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막노동판과 학교를 오가는 저를 잘 알았던 이들이 제가 간첩이 아니라며 한목소리를 내주었고, 서강대에서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도 변호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고문으로 얻은 몸과 마음의 큰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못했겠습니다.
고문으로 무릎과 좌골이 망가지고 갈비뼈가 부러졌습니다. 십여 일을 눈도 한번 못 감게 했고, 고문기술자로 보이는 사람들로부터 온갖 고초를 당했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문과 학대는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들더군요. 보안사와 검찰을 거쳐 첫 재판정에 나갔을 때에서야 간첩죄로 기소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재판에서 간첩 소리를 듣고 증거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재판장이 “그러면 간첩이 아니라는 증거가 있느냐”라고 되묻더군요. 선량한 국민을 강제로 간첩으로 만들어 놓고는, 간첩질 안했다는 증거를 대라는 추궁에 대답조차하기 싫어졌습니다. 교도소에 들어가서는 자꾸 빠져버리는 무릎과 고관절 통증 탓에 1년 넘게 앉아서 자야 했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지금까지 이어집니다.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요. 옥바라지하는 아내는 저와 비슷한 처지의 막걸리 간첩들과 그 가족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전향서 작성을 거부하면서 8년을 복역하고 95년 만기 출소한 뒤, 2014년 10월에서야 재심을 신청했습니다. 재심 결정 과정도 쉽지 않았고, 비로소 지난달 재심이 시작되었는데 선고를 앞둔 심경이 어떠한가요?
고심 끝에 재심을 신청했습니다. 동기인 정훈(70 신방) 이가 재심 신청을 독려해 주었습니다. 무죄가 선고된다면, 막걸리 간첩들도 저의 선례를 발판으로 간첩 혐의를 벗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저 때문에 고생한 가족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재심이 결정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검찰은 재심 사유를 인정할 만한 명백한 증거가 없다며 재심 개시를 반대했습니다. 재판정에 나가서 기억조차하기 싫은 고문 과정을 토로하는 일이 힘들었습니다. 2015년 12월 서울고법에서 재심 개시를 결정했지만 검찰이 불복해 항고했고, 5차에 걸친 심의 끝에 2016년 5월 대법원에서 과거 판결이 보안사 불법 구금과 고문 수사에 의한 결과였다는 사실을 확인받아 재심 결정 판결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심 결정이 이루어지기까지 2년이 걸린 것입니다.
재심 첫 공판은 올해 9월 5일 열렸습니다. 재심을 신청한 지 3년 만에 이루어진 재판이었습니다. 이미 재심 청구 재판 과정에서 어떻게 간첩으로 조작되었는지,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 인간의 존엄이 어떻게 짓밟혔는지 등을 여러 차례 이야기했기에 그 부분을 길게 말할 필요는 없었지요. 다만 원숭이를 잡는 방법에 관한 중국 속담을 언급하며 심경을 밝혔습니다. 병아리를 잔인하게 죽이는 모습을 원숭이에게 보여주면 그 참혹한 장면에 원숭이가 놀라 나무에서 떨어지고, 그러면 원숭이를 쉽게 잡을 수 있다는 인간의 더러운 지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죽어가는 병아리를 보고 놀라 나무에서 떨어져 잡혀먹는 원숭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나 역시 병아리처럼 그냥 죽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 때문에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장의균은 간첩일 수 없다”라고 버텨준 친구들에게 진 빚,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시절 저를 믿어준 사람들에게 진 빚을 갚고 싶다는 제 마음도 털어놓았습니다. 고마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재심 기간 내내 서강의 화요가족(화가회) 식구들이 끝까지 재판과정을 지켜보며 응원해주었습니다. 특별히 가족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말이나 글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출소 후에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합니다.
출소 후 비전향 장기수라는 딱지가 붙어 취업이 불가능했습니다. 문화 예술인 단체에서 편집 주간을 맡기도 했습니다만 간첩이라는 이유로 이사회 인준을 받지 못한 채 일해야 했습니다.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를 만들어서 독립운동사를 남과 북, 해외 동포학자들이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는 학술 심포지엄을 기획하기도 했는데 이것 또한 우여곡절 끝에 좌절되었습니다. 2006년에는 진도로 내려가 옥주서당을 열어 학생들에게 한자를 가르쳤습니다. 교도소 생활 8년간 한자 공부를 열심히 했지요. 한글로 된 책은 일절 금지됐고, 한자로 된 고전, 중국판·일본판 한자사전은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방과 후 학교 교사로 일하기도 했지만, 이 자리에서도 쫓겨나고 말았지요. ‘비전향 간첩’이라는 딱지 때문이었습니다. 재심을 준비하며 서울로 올라왔고 지금은 경기도교육연구원에서 우리말 한자를 연구하고 교육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험난한 인생이지만 후회는 않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전할 말이 있다면 해주세요.
2016년 촛불집회를 보며 다시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 힘으로 ‘민주평화노인회’를 만들려고 합니다. 노인들도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서강대학교 재학 시절부터 지식인이라면 책임감을 가지고 끊임없이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재학 시절 만난 존P.데일리 신부님, 프라이스 신부님, 정일우 신부님에게서 나눔의 정신을 배웠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쳐준 사랑을 신부님들은 몸소 실천하고 있었지요. 고인 된 그분들의 삶을 보며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서강에서 보고 배운 소중한 가르침을 따르는 삶을 살 작정입니다.
<장의균(70 신방, 오른쪽) 동문과 정훈(70 신방, 왼쪽)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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