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은 “서강 사학은 나를 일으켜 세운 채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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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2-25 11:15 조회25,53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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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창과 60주년을 맞은 사학과에서 기념 서적 ‘서강사학 60년의 발자취’ 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책에는 가수 양희은(71 사학) 동문의 인터뷰가 특집으로 게재됩니다. 개교 60주년과 사학과 창과 60주년을 널리 알리고 기념하기 위해, 양 동문의 인터뷰를 서강옛집이 발췌했습니다. 양 동문과의 대담은 최병찬(73 사학, 사학과 동문회 고문), 권경률(90 사학, 서강옛집 편집위원) 동문이 공동으로 진행했고, 인터뷰 정리는 권 동문이 맡았습니다. 전문은 사학과 창과 60주년 기념 서적에 게재됩니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양희은 선배 앞에서 까마득한 후배가 인생노래라며 ‘한계령’의 한 소절을 불렀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 후배의 ‘팬심’에 그는 빙긋 미소 지으며 화답한다.
“가슴을 통과하면 자기 노래가 되는 겁니다. 나도 그냥은 안 불렀어요. 내 마음에 들어오기 때문에 불렀습니다. 노랫말이 나한테 스며들어야 내 것이죠.”
어느덧 50년! 한국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역사가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아침 방송을 진행하며 하루하루 값진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사학과 71학번 양희은에게 서강사학은 어떤 기억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을까? 2020년 1월 10일 양희은 동문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학생 가장, 양희은
서강과의 인연은 서강대학교 주최 전국 고등학생 영어웅변대회에서 1등, 최우수상을 수여하면서 시작되었다. 수상자에게는 서강대 입학 시 전액 장학금 혜택이 주어졌는데, 어머니 홀로 가계를 꾸리는 집안의 맏이로서 책임감을 발휘한 셈이다.
신문방송학과에 지원했다 떨어진 양희은은 이듬해 ‘방송을 제대로 하려면 역사를 잘 알아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사학과에 입학했다. 1971년, 사학과 정원이 20명이었고, 남학생 4명과 여학생 16명이 들어온 해였다.
“그땐 사학과가 셌어요. 무엇보다 교수진이 뛰어났죠. 이광린, 이기백, 전해종, 이보형… 그야 말로 기라성 같은 선생님들이 제자들을 길러냈습니다.”
대학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입학 직전인 1970년 12월 집에 큰불이 나는 바람에 형편이 어려워진 것이다.
“돌이켜보면 결핍이 나의 에너지였어요. 멀쩡하던 집이 곤두박질쳐서 아무 것도 없으니…. 그래도 울거나 괴로워하지는 않았습니다. 흥! 이러고 말았죠. 오히려 굉장히 코믹하게 느껴졌어요. 허허, 회수권도 없으니 학교 못 가겠네, 그러면서….”
그는 난데없는 결핍 앞에 주눅 들기는커녕 어머니를 대신해 가장이 되기로 결심했다. 앳된 가장은 무작정 노래시켜달라며 트윈폴리오의 또 다른 멤버 송창식을 찾아갔다.
먹고사는 일이 바쁘다보니 학업은 부침이 심했다. 저녁에 업소에서 노래하고, 밤에는 방송국에서 일하고, 다음날 아침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학교를 왔다. 마음먹고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백지 답안지를 내는 일도 있었다.
서강 언덕에 서면 눈물이 났다
양희은은 휴학과 복학, 자퇴와 재입학을 거듭하며 힘겹게 학교를 다녔다. 때로는 한국 포크음악의 대명사라는 위상이 대학생활의 시름과 상처가 되기도 했다.
1970년대에 반(反)독재 집회를 할 때면 대학생들은 양희은의 ‘아침이슬’을 불렀다. 노래가 시위 현장에서 즐겨 불리자 ‘운동권 가수’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때 들었던 ‘아침이슬’을 잊을 수 없습니다. 무시무시했어요. 내가 부른 그 노래가 아니었죠. 거기 어영부영 있는데 이기백 선생님이 자네 왜 여기 있냐고, 빨리 가라고, 하셨어요. 염려해주신 거죠.”
스승의 걱정은 당연했다. ‘세노야’, ‘백구’, ‘작은 연못’ 등 발표하는 노래마다 사랑을 받으며 이른바 ‘청맥통 세대’(청바지, 맥주, 통기타로 대변되는 포크음악 전성기)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한 시절이었다. 학업을 중시하던 서강에서도 질타의 목소리가 나왔다.
“1학년 마칠 무렵이었나? 차하순 교수님이 말씀하셨어요. 왜 평균을 낮춰가며 학교 다니느냐, 이 학교에서 나가라…. 내가 가장 노릇 하면서 공부한다니까 그럼 서라벌예술대학 같은 데 가라, 거긴 어서 옵쇼 할 거다…. 그 말들을 잊을 수 없었죠. 아주 뼈에 새겼어요.”
기타 메고 책보 들고 서강 언덕에 서면 눈물이 났다. 학교 다니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갔다. 휴학을 두 번 했고 5학기 마치고 학교를 자퇴했다. 하지만 서강과의 인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용띠 선배, 12살 선배 언니들이 있었어요. 각양각색의 직업을 가진 분들인데 나를 깍두기로 끼워줬죠. 그 언니들이 5학기 했으니까 3학기 마저 마치라고, 자퇴로 끝나면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군대 간 셈 치고 젊을 때 후다닥 해치우라는 거였죠. 그때는 나도 일이 익숙해졌고, 그래서 재입학 했어요.”
그는 독한 마음을 먹고 열심히 공부하며 예수회 장학금을 탔다. 그런데 또 차하순 교수님이 부르는 게 아닌가. 장학금을 더 가난한 학생에게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통기타 가수가 무슨 돈이 있냐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장학금을 떠나 인간적으로 서운했을 터.
“나중에 서강대에서 콘서트 하자, 총장이랑 밥 먹자, 여러 차례 제안이 왔는데요. 한동안 다 거절했어요. 기억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어떤 의미에선 (서강의) 안티였죠.”
71학번 양희은에게 서강 사학이란?
설움을 삭인 채 양희은은 1978년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8년만의 졸업을 자축하기 위해 그는 김민기와 손잡고 의욕적으로 새 앨범을 준비했지만 ‘늙은 군인의 노래’가 문제였다. 국방부는 이 노래가 국군 사기를 저하시킨다는 이유로 금지했고 양희은은 방송에서 하차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82년 양희은을 기다린 것은 암이었다.
시한부 판정을 받았지만 병원 항암치료를 뒤로하고 식이요법을 통한 자연치유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삶을 얻었다. 이후 1983년 ‘하얀 목련’을 발표했고, 그 후 또 하나의 명곡 ‘한계령’을 내놓았다. ‘뜻밖의 만남’이라는 프로젝트로 젊은 음악인들과 공동 작업을 하며 2019년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내년이면 내 나이도 70입니다. 이제 마무리를 향해 가고 있죠. 나이를 먹으니까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긴 해요. 보이지 않는 손이랄까.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고마운 분들이 나를 지켜주셨어요. 서강 사학도 그렇습니다.”
71학번 양희은은 ‘서강 사학’ 하면 막강한 교수진이 떠오른다고 했다. 이광린, 이기백, 전해종, 이보형 등 훌륭한 선생님들께 배웠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
“역사의식이 없는 세태가 안타깝습니다. 역사교육의 일선에서 수고하는 후배들이 있다면, 한국사를 열심히 재미있게 가르쳐 줄 것을 당부 드리고 싶어요. 아이들이 즐겁게 배우면서 마음에 심지를 세울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는 2014년에 ‘자랑스러운 서강인’ 상을 받았다. 학생 가장으로서 아등바등 살던 시절, 그에게도 설움이 있었지만 이제 세월과 더불어 녹아내리는 것 같단다.
“차하순 교수님은 유난히 나한테 모질게 했죠. 대학 입학하고 스물 한두 살인데 내가 뭘 알아요? 따뜻한 말 한 마디에 얼마나 목말랐겠어요? 너 참 힘들게 사는구나, 할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그랬으면 졸업을 못했을 수도 있어요. 나는 누가 칭찬하면 흐트러져요. 반대로 채찍을 치면 무서운 힘으로 일어나죠. 그런 면에서 차 교수님도 고마운 스승입니다. (웃음) 서강 사학이 나를 일으켜 세운 채찍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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