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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편지 - 이경순 (12002.영문) 동문이 곽영미(89.영문) 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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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6-10-01 17:29 조회15,4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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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곽영미(89.영문)에게

 

비 온 다음날,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10년 만에 열렸다는 북한산 상장능선을 걸으며 네가 나에게 물었다. “그럼 이번에는 네가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야 하는 거야?” <서강옛집>의 릴레이 편지를 두고 한 말이었고, 그때까지도 난 누구에게 편지를 써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었다. 선생님께서도 그러셨지만, 매일 보는 사람에게 공공연한 편지를 쓴다는 것이 여간 쑥스러운 일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이번 기회를 빌어 새삼스런 친근감을 표현할 사람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수다를 떨며 산행을 하는 동안 우리는 몇 번씩이나 서로를 친구라고 칭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끄러지면 죽는다는 아슬아슬한 바위를 벌벌 떨며 겨우 올라선 나에게 네가 내 친구지만 정말 잘했다고 넌 칭찬을 해 주었고, 너의 겁없음에 대해서 난 내 친구지만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자주 보면서도 우리는 아직도 서로에게 낯선 친구인 것이다.  


내가 대학원에 들어오던 해에 넌 논문을 쓰고 졸업을 했다. 목소리나 외모가 많이 닮은 후배가 들어왔다는 동기들의 말을 듣고 학교에 왔던 날, 너의 첫인사는 “하나도 안 닮았네!” 였다. 그 실망감과 더불어 두 살이 많다는 이유로 언니라고 부르라던 너. 얼마동안 언니로, 대학원선배로 대하며 조언도 많이 구하고, 의지도 많이 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그냥 친구로 지내자는 합의가 이루어졌고(아니면 나의 일방적인 통보였던가?) 너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나는 너에게 가장 친한 친구로써 무사(無思)라는 작위(?)를 주었고(어쩜 그렇게 아무 생각이 없을 수가 있는지 경이로웠지), 너는 나에게 second 자리를 내주었지(너에게는 이미 가장 친한 친구가 존재했으므로). 뭐, 그 정도면 만족할 만했어. 우리가 너무 늦게 만났고, 그리고 둘 다 인정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어려서 만났더라면 결코 친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넌,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일을 나에게 해 주었어. 어디 부모에게 상처받지 않은 젊은 영혼이 있다더냐! 어리석게도 난 그때까지도 깨닫지 못했단다. 내 부모님에게 어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그 끝없는 애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부모님들은 다 그래” 라고 말하는 누구의 말로도 마음을 다 잡지 못했고, 분노와 무기력증을 반복하며 우울증에 시달리곤 했지. 그러다가 널 알게 됐어. 아무렇지도 않게 너의 열악했던 유년시절에 대해서 얘기를 해 주었고, 아직까지도 부당한 어머니를 너무나 잘 봉양하는 너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철이 없는지를 깨달았단다. 내가 부모님의 답답한 잔소리에 화를 내면, 넌 아주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하지, “어쩌겠니, 젊고 많이 배운 우리가 이해해 드려야지.” 그게, 그렇게 쉽니? 덕분에 나도 좀 쉬워졌다.  

 

너의 생각 없음이 얼마나 강한 힘인지, 얼마나 분명하고 자유로운 의지인지를 난 알아, “옳다고 생각한다면, 해야 한다면, 하고 싶다면, 그러면 해라. 그러나 힘들면? 그래도, 해라, 뭐든하다보면, 좀 쉬워진단다." 너무나 상투적인 메시지 같지만, 네가 얘기하면 난 믿을 수 있어. 네가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지. 쓸데없이 생각만 많고, 머리만 복잡한 과민한 내가, 모든 잡다한 생각들을 단 칼에 잘라내 버리는 너의 행동주의 노선을 따라가려 해. 같이 가자, 친구야!

 

이경순 (12002·영문) 동문은 현재 모교 영문과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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