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기억합니다 - 故 이현손 (61.사학, 단고재 대표. 도예가) 동문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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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6-09-02 15:41 조회25,48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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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기억합니다
지난 8월 4일 전통 생활자기 <단고재> 의 대표이자 도예가인 이현손(61․사학) 동문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예술에 대한 열정과 모교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그의 영전에 정 훈(70.신방) 동문이 바친 글을 싣습니다. <편집자주>
사람됨과 예술혼의 만남 -이현손(61․사학) 선배가 남긴 사랑-
속된 눈으로, 탈속한 사람의 이야기를 쓴다. 현세 속에서도 미망을 벗어나지 못한 머리로, 헌신과 예술혼으로 점철된 사람을 말한다. 이승에서 한번도 뵌 적 없는 분을, 떠나시고 난 뒤에 만났다.
이현손 선배는 8월 4일 금요일에 타계하셨다. 나는 그 분을 뵌 적이 없다. 그런데 그 주 수요일에 동문회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이현손 선배 병문안을 다녀왔는데 가슴이 아프다. 정신적으로 예술적으로 훌륭한 분일 뿐 아니라, 모교 후배들을 위해 또 프라이스 신부님 기념사업을 위해 많은 성금을 내셨는데 모두 익명으로 하신 분이다. 행정절차에 따라 기부금 증서를 부쳐드렸더니, 왜 알게 했냐고 사모님께 성내셨다더라. 그런 분이 더 못 사신다하여 학교에 돌아와 신부님 흉상에 기도를 드리는데, 신부님이 무심히 먼 하늘만 쳐다보고 계셔서 심술이 나 신부님 코를 힘껏 비틀어주고 왔다.”
돌이켜보니 프라이스 신부님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사학과 제자가 70년대에 신부님과 협의하면서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하다가, 80년대 후반에 도자기를 굽겠다고 경기도 여주 근처 시골로 조용히 들어갔다고 했다. 아끼던 제자여서 어렵사리 찾아갔더니 길 입구에 커다란 환영 플래카드를 내걸어서 깜짝 놀랐었다지. 그땐 부부가 셋방살이를 하고 있더라고... 환영 플래카드 부분에선 신부님 특유의 부끄럽지만 그러나 유쾌한 발가스러운 얼굴, 그러면서“단고재(丹古齋)”란 낙관이 선명한 분청을 들어 보여주실 땐 퍽이나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나는 당시“미대나
도예과도 없는 학교에서 도예가가 나오다니 감사한 일일세.”하는 정도로 잊어버렸다.
그런데 동문회로부터 8월 5일 아침 전화를 받은 것이다. 어제 돌아가셨다고. 이젠 떠나셨으니 알려도 되겠는데 익명으로 내신 모교 발전기금이 1억, 프라이스 신부님 추모집 지원금이 300만원 이었다고 했다. 나는 마음을 고쳐먹고 여주로 향했다. 찻길은 막힐 시간이었으나 내 마음은 약간의 의무감과 의리심으로 견딜만했다. 그도 그럴것이 때가 때인지라 서강대 지인들이 오늘 못가면 내일 새벽 발인일텐데, 나라도 대신 가서 인사를 하고 여러 사람이 왔었다는 흔적을 남기고 와야지. 조의금 봉투를 몇 개 준비해야지. 그리고 대화 나눌 사람도 없을테니 기록을 남기고 얼른 나와서 이천 쌀밥 식당에서 밥이라도 잘 먹고 와야지.
내 세속적 계산은 장례식장에 들어서면서 깨졌다. 우선 방문록이 없었다. 조의금도 사절이었다. “그 분이 폐끼치는걸 싫어하셨고 저도 따르고 싶어서요. . .”미망인이 말끝을 흐리며 오히려 날 위로하는 듯 했다. 둘러보니 접대실 평수는 넓었지만 사람은 별로 안보였다. 그래서 한 사람이라도 보태자는 꼼수로 주저앉아 육개장을 받게 되었고, 결국 출발 전 세웠던 알량한 내 계획들은 수포로 돌아갔다.
밥을 먹으면서 속물적인 나를 십고 있을 때, 지원군 몇 분이 오셨다. 이우진 선배, 정영애, 한징택 동문을 보니 반가웠다.“ 연락은 열 한 분께만 했어요. 하늘이 꺼졌는데 전화기 돌린다는게 낯설더라구요. 거래처엔(폐끼친다고) 연락하지 마라고 하셨어요.”그 다음 말이 더 철학적이었다. 왜 꼭 익명으로 돕는가, 하는 뜻의 질문에 “개인의 이름으로 남을 도우면 그 사람도, 또 도운 사람도 버려요. 돕는건 공적 기관에서 공적으로 시행해야지요.”나는 속으로 내가 장기이식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주고 받은 사람이 알려진다면 어느 한쪽이 행복하지 않을 경우에 생길 수 있는 불상사를 떠올렸다. 한 가지 더 창의적인 도예가의 유가족에게 궁금한 속된 의문이 있었다. “비법 전수요? 메모는 만드셨지만 저는 받지 않았어요. 저는 우리 영감님이 떠나시지 않을 줄로 믿었거든요.” 이현손 선배는 이미 4년째 암 투병중이었고 불치였던건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일어설 즈음, 자그마한 몸에 눈이 맑은 부인이 혼잣말처럼 했다. “아참, 생각해보니 오늘 밤부터 우리 영감님이 없네요. 가마터가 있는 산속 집이라 무섭지 않을까... 생각하지 못했던 일인데”
동문회로부터 원고 부탁을 받고 생각했다. 일반적인 추도문이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가까운 친구분들이 계실 것이다. 분석적인 방문기인가? 그건 기자가 할 일이다. 나는 친우 홍익찬 선배께 깊이있게 조언을 구해 듣고, 배성례 동문이 기록해준 97년 10월호 방문기를 찾아 읽었다. 그리고 8월 23일 다시 여주 단고재에 찾아갔다. “쇠를 달구면 나오는 붉은 마음으로 옛것을 승화시키는” 단고재 현장에서 느끼고 싶었다. 유약 개발을 하려고 6000번을 실험하셨다는 그 분의 숨결을 느껴야만, 모르긴 몰라도 창의적이지만 고집세고 너그럽지만 까다로왔을 이 선배의 입맛에 맞는 글을 쓸 수 있을것 같았고, 말이 없는 듯 서방님 못지 않은 듯한 부인 사이에 시너지를 이루는 에너지가 있을 듯 싶었다.
과연 그랬다. 물리학을 2년 배운 뒤 사학과로 전과하여 전국을 답사하다가 역사의 기록물로서 도자기가 갖는 묘미에 빠져 대학원에서 도자기와 미술 공부에 더욱 매진했다. 졸업 후 뜻을 품고 마을마다 신협을 조직했으나, 여러 난관에 부딪치고 심신과 주머니마저 쇠했을 때 85년 10월 등반길 삼악산에서 춘천 아씨 김승희씨를 만난다. 세속적으론 스무살의 나이 차가 있었으나, 정신적으론 짝이었나보다. 그 아저씨가 이 아저씨가 됐다. 88년 광복절날, 빈털터리 신세로 여주 구석에 셋방을 얻어, 흙과 물과 불로 사랑을 구워내기 시작했다.
현장에서 보니 더욱 그랬다. 그가물리학을 이해함과 동시에 그림과 글씨에 능하고, 도예 부문 여러 특허(유약을 여체에 발라 한지로 탁본을 떠서 그대로 구운 도자기에 되살리는 독특한 기법 포함)를 갖고 있지만, 늦게 만난 동지이자 반려인 김승희와의 시심 짙은 사랑이 아니었으면 단고재 이현손도 기술자로 끝나지 않았을까?
나는 그의 침소에 그가 육필로 쓴 서정시들이 여러장 벽면에 소박한 모습으로 붙어있는 것을 보았다. “여정(旅情)의 춘천(85, 11, 4)”이란 제목의 시 일부이다.
“. . .호반의 잔물결들이내 배를 일렁이니
안타까운 마음들이 부딛는 소리 너는 듣느냐.
내가 너를 낳고 네가 나를 낳다.
만남이 우연이라 헤어짐도 우연일까.
근심으로 바래다주는세 정거장
눈동자에어리는물기가거울되어나를비친다.“
세 정거장이란 춘천에서 만났다가 서울 남자가 귀경 기차를 타면 춘천 아씨가 가평 정도까지 다시 동승했다는(요즘 애들 말로 조금 닭살돋는) 순수열정 얘기다. 그 시들이 붙어있는 그의 방에 그는 없고, 갖가지 모양의 도자기들이 여기저기서 저마다 투박한가 하면 영롱한 색깔을 여름 오후 햇빛에 비끼면서 내비치고 있었다.
“가시기 사흘 전에 불현듯 신발을 사주겠다고 나가자고 하시더군요. 그러신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화요일날 신발가게에 갔는데 제 발에 맞는 사이즈가 마침 없는거예요. 가게에서 택배로 나중에 부쳐주겠다는 말을 하자 우리 영감님이 이상하게 화를 내시데요. 수요일에다시 다른 곳에 가서 사주곤 집에 와서 쓰러지셨어요.”
부인은 기운을 빼듯이 말을 보탠다.
“숨쉬고 먹고 해야 할 이유를 잃어버렸어요. 숨쉬고 먹는 저를 알아주는 사람이 더 이상 있을 수 없거든요”
그러나 이현손 선배의“짝”은 이내 눈을 반짝였다.
“그 분이 지금 절 보고 계시겠지요? 단고재를 번창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유지라도 시키는 것이 뜻을 따르는 일일 거예요. 크고 작은 그의 뜻을 따르는 일이 저를 기운나게 하겠지요. 그래요, 제가 사랑하는 아들과 딸을 위해서도 말이예요. 잘 이어받게 받쳐줘야지요.”
정훈(70 신방) 한국 DMB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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