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김소영(80.영문)교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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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6-06-27 22:42 조회17,35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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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김소영(80.영문) 교수
어릴 적부터 영화보기와 소설읽기를 즐겨하고 제도권 교육에 잘 적응하지 못해 학교에 가기 싫어하던 자유로운 영혼의 소녀는 결국 영화와 글쓰기의 중간지점인 ‘영화에 대한 글쓰기’ 를 택했다. 두 꿈을 동시에 이룬 김소영 동문은 행복해 보였다.
“서강은 비록 출석 체크는 엄격했지만, 리버럴한 학풍을 가진 학교였어요. 제가 한국에서 다닌 학교 중에 유일하게 ‘잘 다녔던’ 학교죠"
서강은 엄격한 학풍에 비해, 자유롭고 의견표현이 분명한 예술가들을 다수 배출한 학교다. 예술대학이 없다는 ‘치명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서강 출신의 아티스트들은 뚜렷한 색깔과 지적인 예술세계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다. 김 동문도 예외가 아닌 듯 보였다.
동아리 ‘영화공동체’ 초기 멤버인 그는 영공이 생기기 이전까지 커뮤니케이션센터를 중심으로 해외 비디오들을 섭렵하고 난상토론을 벌이며 영화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 때 본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장치오렌지’ 를 비롯한 미국유럽의 영화들이 제 영화공부에 소중한 자산이 됐습니다.”
미국의 뉴 아메리칸 시네마, 프랑스의 누벨바그, 독일의 뉴저먼시네마 등 60-70년대 서구 예술영화 사조에 깊이 침윤됐었다며 당시를 회고하는 그의 큰 두 눈이 반짝거렸다. 커뮤니케이션센터가 김 동문의 영화세계의 ‘물적 토대’ 였다면, 로욜라도서관은 ‘정신적 토대’가 됐다.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로욜라도서관은 한국의 대학 도서관 중 유일한 전면 개가식이었어요. 도서관에 들어가 내 마음대로 책을 찾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책 뒤 대출카드에 적힌 이름을 보며 경쟁적으로 영화 책을 탐독했던 기억도 새롭네요.”
박찬욱 감독이 어느 글에서 서강에서의 학창생활을 반추하며 비슷한 얘기를 꺼낸 적이 있다. 마치 이와이 슈운지의 명작‘러브레터' 의한 장면처럼 대출카드 뒤에 새겨진 다른 사람의 이름을 보며 묘한 연대감을 느끼는 모습. 지금처럼 전산망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시스템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아날로그'한 추억이다.
김 동문의 부친 얘기를 꺼내봤다. 그의 아버지는 서강에서의 연구와 교육에 평생을 바친 김열규 교수. 서강에서 은퇴했지만 국문학계에서 김열규 교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걸출한 국문학자다.
“원래는 다른 대학 국문과에 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서강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셔서 서강대로 오게 됐죠."
영문과에 입학한 그녀는 아버지의 강의도 신청해 들었다고 했다. 문학에 대한 호기심 가득한 딸이 수업시간에 담당 교수이자 아버지인 자신에게 대답을 너무 잘해 민망했던 김열규 교수는 결국 반 강제로 딸이 자신의 수업을 못 듣게 했다고. 아버지는 현재 딸의 영화세계와 학문세계를 지지해 주는 든든한 후원자라고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서강에는 외국인 신부님들이 많았고 세미나식 수업이 많았어요. 호주 출신 신부님께서 물리학의 시공간 이론과 보르헤스와 프루스트 작품 속의 시공간을 연결지어 강의한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
여러모로 서강은 그녀에게 예술적 영감을 다듬고, 지적 훈련 쌓는데 부족함이 없었던 것 같았다. 서강을 떠나 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간 김 동문은 직접 제작현장에 뛰어들어 영화세계를 더욱 정교하게 가다듬고, 뉴욕에서 이론적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영화가 갈수록 오락화·상업화되는 현실에서 그는 영화의 미학과 정치성 간의 조화를 여전히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사회성 짙은 각종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는 영화제를 소비의 장이 아닌 문화운동의 장으로 본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따뜻하다 못해 아직도 20대의 사랑과 같은 뜨거움이 있었다.
김용래 (98·영문) 연합뉴스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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