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레터-구원과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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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4-12-03 14:12 조회12,22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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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들 ‘소통의 장’으로서의 서강옛집
소설가 토마스 핀천은 그의 걸작 『49호 품목의 경매』에서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트리스테로’라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국 개척 시대의 조직이야기입니다. 혹시 카드사기, 폭행, 현금갈취, 납치, 협박, 인신매매 등등을 일삼는 우리도 익숙한 그런 조직이냐고요? 그런 게 아니라 바로 우편배달 조직입니다.
그런데 살짝 귀띔해 드리면, 사실 이 조직은 마피아 다음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살인, 폭행, 납치 등등도 거침없이 자행했답니다. 오늘 날 우편과 관련된 제도 및 테크놀러지의 발전은 정말 눈부시기 짝이 없습니다. 예전엔 몇 주씩 걸리던 국제우편도 컴퓨터 앞에 앉아 ‘보내기’아이콘을 한번 누르기만 하면 단번에 배달이 되니까요. 그러나 개척시대에는 ‘소통’을 위한 국가적 설비라고는 전무한 실정이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편지 한 장 들고 말 한 필로 미대륙을 가로지르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을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용감한 트리스테로의 우편 배달부들은 편지 한 장을 배달하기 위해 산과 물을 건너며 산적들을 만나 무력으로 싸우기도 하고, 또 자기들을 방해하는 다른 조직원을 암살하며 우편망을 보호하려고 애쓰기도 했죠. 한 마디로 이 우편 조직은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위해서라면 살인과 자기 희생을 비롯한 모든 수단을 가리지 않았던 광적인(?) 집단이었습니다.
가끔 『서강옛집』의 편집 회의를 끝내고 돌아올 때, 또는 새로 나온 『서강옛집』을 배달 받고 펼쳐 볼 때 이 우편 조직의 우두머리가 고백한 그 집단의 신념이 생각나곤 합니다.
“구원은 소통에 달렸다.”
이 말을 떠올리면서 여러 생각들을 하게 되지요. 서강동문들은 언제 서강동문임을 확인하게 되는가? 동문회의 실체는 어디 있는가? 사람들은 언제 자기가 서강인이라는 것을 기억할까? 바로 서강을 떠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은사와 선후배, 친구들의 소식을, 그리고 모교의 소식을 듣게될 때가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여전히 친구의 기쁜 소식에 환호하고, 모교의 융성에 흐뭇해하며, 오랜 선생님들을 그리워하게 될 때 자기가 동문임을 확인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트리스테로가 말하듯, 서강인의 ‘소통’은 동문회가 살아가기 위한 ‘구원’이라고 해도 좋을 듯 싶습니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동문들 간의 소통을 담당하고 있는 『서강옛집』은 정말 막중한 사명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는 깨달음이 듭니다. 기쁜 소식들을 전달하고, 슬픈 소식에 대해선 위로를 보내고, 한 장 신문지에 실어 모교 전체를 집집마다 배달하는 그런 신문, 그래서 세상 여기저기에 흩어진 우리가 결국은 여전히 하나의 캠퍼스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신문, 그것이 바로 소통의 장으로서 『서강옛집』이 그려나가는 자화상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가끔 정말 그리운 것들이 있습니다. 반송되어온 『서강옛집』의 수취인들, 연락이 두절된 동문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을 기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입니다. 동문들이 지닌 얼마나 따뜻한 소식들을 『서강옛집』은 모르고 지나가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편집위원으로서 안타깝고 부끄럽고 손에서 보석이 빠져나간 것처럼 억울하군요. ‘소통이 곧 구원’이다라는 신념으로 편지 한 장을 전하기 위해 온갖 위험이 기다리는 광야를 달렸던 트리스테로의 우편배달부처럼 『서강옛집』도 보다 열심히 동문들의 입과 귀 사이를 오가야 했던 것은 아닐까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선배님, 후배님, 그리고 친구들, 다시 겨울이 왔습니다. 이 추운 계절, 따뜻한 술 한잔 건네 듯 따듯한 소식 한잔 건네는 그런 신문이 되겠습니다. 『서강옛집』이 여러분들에게 가고 싶은 그만큼, 여러분도 『서강옛집』 가까이에서 재미있는 이야기 많이 들려주시길! 이제 함박눈이 내려 그 동안 어딘가에 숨어 있던 하얀 길이 문 밖에 나타나면, 그 길을 밟고 누군가 『서강옛집』을 들고 오지 않았는지 우편함도 한번 더 열어봐 주세요. 고맙습니다.
서 동 욱(90·철학) 시인·문학평론가·모교 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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