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 옥상화가 김미경(79 국문)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06-12 10:06 조회18,065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1억 년 후 화가’ 꿈 앞당긴 서촌 옥상화가 김미경(79 국문)
“모든 사람의 내면 어딘가에는 예술가의 씨앗이 숨어있어요”
대학을 갓 졸업하고 교단에 섰다. 그런데 뭔가 부족했다. 교사생활 1년 만에 교단에서 내려와 대학원에 입학해 여성학을 공부했다. 이후 여성운동을 하려고 대안문화운동단체인 ‘또 하나의 문화’에 간사로 들어갔고, ‘여성신문’ 편집장으로 일했다. 여성운동을 더욱 확장하려는 마음에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멤버로 입사해 10년 넘도록 생활과학부와 뉴미디어국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2000년 들어서 인터넷에 꽂힌 덕분에 ‘인터넷한겨레뉴스’ 뉴스부장과 ‘한겨레신문 미디어사업기획부’ 부장도 지냈다. 20여년 기자생활을 배경으로 중견 언론인이 되려는 차에 2005년 한국을 떠나 뉴욕에서 7년을 보냈다.
귀국한 2012년부터 ‘아름다운재단’ 사무총장으로 정신없이 2년을 보냈다. 그런데도 아쉬움이 남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 이것이 마침내 찾은 해답이었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아야 했지만 결국은 가야할 길,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꼭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그림 그리는 일’을 택했다. 어느덧 두 차례 전시회를 열었고 ‘서촌 옥상화가’라는 새로운 직업을 가졌다. 오늘도 서촌 옥상이나 골목길 어딘가에서 하얀 종이 캔버스 위에 가느다란 펜으로 서촌의 과거와 현재, 골목길 꽃 이야기를 부지런히 기록하고 있을 김미경(79 국문) 동문 이야기다.
안정된 직장을 접고 쉰다섯 나이에 전업 화가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화가의 길로 이끌었는지요?
제가 그림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초등학생 시절 사생대회에서 입선한 게 전부입니다. 신문사 다닐 때 만평 그리던 박재동 화백과 ‘한겨레 미술반’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기자들끼리 모여 점심시간에 그림 그리거나 한두 달에 한 번씩 야외 스케치를 나가기는 했어요. 매년 창간기념일마다 회사에서 전시회를 열곤 했는데 제가 제일 못 그려서 동료들로부터 늘 핀잔을 받았어요. 이게 그림이냐고…. 그랬는데 회사 그만두고 뉴욕으로 가면서 달라졌어요. 제가 살던 브루클린은 예술의 도시에요. 동네 곳곳 어딜 가나 작품을 볼 수 있고 구멍가게 드나들 듯 수시로 갤러리를 방문할 수 있는 곳이죠. 많은 그림을 보고 화가 친구들도 많이 사귀다보니 숨어있던 내 안의 내가 서서히 깨어났던 것 같아요. 그래도 다음 생에 태어나면 화가가 되겠다고 생각했지 전업 화가가 실제로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귀국해 서촌에 자리 잡으면서 욕망이 강해졌어요. ‘저걸 그리고 싶다.’ 옥상에서 내려다본 서촌 풍경이 정말 아름다웠어요. 마음이 조급해졌죠.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리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자 더 늦기 전에 시작하자 마음먹고 직장을 그만 뒀어요.
경제적인 면에서도 직장 그만두고 전업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그림 그려서 먹고 살아야한다는 결심했을 때 어떻게 보면 ‘가난하게 살기’를 선택했다고 생각해요. 학교 졸업하고 평생 내 월급으로 살아왔기에, 월급이 끊어진다는 게 어떤건지 잘 알거든요. 덜 필요한 건 버리고, 덜 중요한 건 포기하고, 최소한으로 생활하고, 온갖 불편함은 감수하고, 줄어드는 통장 잔고를 보며 초조해할 수도 있다는 거, 어쩌면 죽을 때까지 내 집 없이 서울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며 살아야한다는 거…. 그래도 먹고 사는데 그리 많은 돈이 드는 건 아니잖아요. 가난을 택한 대신 행복해졌어요. 그림 그리다보면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에요. 그림 팔아서 근근이 먹고사는 게 소원이에요.
김미경이란 화가에게 그림이란 뭘까요?
예전과 전혀 다른 새 친구들을 만나고 있어요. 인왕산, 나무, 꽃, 기와, 전봇대, 하늘, 햇볕, 바람, 구름…. 이 친구들과의 만남이 저를 변화시키고 있어요. 친구들과 아무 말 하지 않고도 많은 것을 느끼고 깊게 소통하며 사랑에 빠지고 그들을 조금씩 닮아가는 것 같아요. 매일 새롭게 만나는 이 친구들을 통해 저는 새롭게 태어나고 있답니다. 좀 덜 서두르고, 좀 덜 안달하고, 좀 더 솔직하고 용감해지며 나를 억압했던 끈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풀어내고 끊어내며 내가 진짜 원하는 것, 내 욕망의 소리, 감성의 소리를 찾아내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어요. 그림은 이렇게 찾아낸 제 감정을 오롯이 담아내는 공간입니다.
자칭 ‘무면허 화가’가 된 지 2년만인 2015년에 서촌 풍경과 서촌의 꽃을 주제로 전시회를 두 차례 열었습니다. 그 열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요?
2월에 가진 ‘서촌 오후 4시’에 서촌 풍경 50점, 11월에 가진 ‘서촌 꽃밭’에 서촌 골목과 이웃집 마당에 피어있는 꽃그림 100점을 전시했어요. 팔이 너무 아파 침 맞으러 다니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련하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신나게 그린 덕분이죠. 엉덩이의 힘과 긍정의 힘이 합쳐지다보니 무작정 앉아서 계속 그렸어요. ‘서촌 옥상도’ 한 점 완성하는데 최소한 100시간이 넘게 걸려요. 하루에 10시간씩 그리면 열흘 정도 걸리는 셈인데 이 정도는 열정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엉성해 보여도 열심히 간절히 그리면 작품이 나오더군요. 저는 누구든 각자의 누에고치 안에 가능성의 실타래를 품고 있다고 생각해요. 열정이 있고 열심히 훈련하면 자기만의 아름다운 실크가 나올 거라고 믿어요. 서강 출신은 그런 거 잘 하잖아요. 저는 매일 직장 다닐 때처럼 하루 8~9시간씩 그림 그리고 글 써요.
‘옥상화가’라는 독특한 별명이 붙었습니다. 옥상에서 그림 그리게 된 계기가 있나요?
옥상에서 보는 풍경이 정말 좋아요. 미국에서 돌아와 일했던 옥인동 ‘아름다운재단’ 옥상에 처음 올랐을 때, 인왕산 아래 기와집들이 수백 폭 병풍처럼 좌르륵 한꺼번에 펼쳐지더군요. 한순간 숨이 콱 멎는 것 같았어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황홀한 풍경이었죠. 큰 파도처럼, 웅장한 음악처럼 다가온 풍경. 그날 밤 잠을 설치면서 스마트폰 앱으로 그리기 시작했어요. 땅에서는 볼 수 없었던 구도의 스펙터클한 풍광이 자꾸 봐도 질리지 않았어요. 그때부터 틈만 나면 여기저기 동네 건물 옥상에 올랐습니다. 옥상에 올라가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시야가 트여요. 옥상에서 저는 자유인이 되고 예술가가 되요. 가난한 제겐 동네 옥상이 제 아틀리에인 셈이에요.
굳이 서촌을 그리고 싶었던 이유가 있나요?
대구 출신인 제가 서강에 입학하며 서울에서 처음 자리잡은 곳이 여기에요. 지금은 철거되어 청운공원이 들어선 청운아파트에서 선배와 자취를 했죠. 많이 낡고 화장실도 공동으로 사용해야했던 불편한 곳이었지만 인왕산 자락이라 전망은 최고였어요. 울창한 나무와 큼직한 바위들, 계곡이 있고, 종로가 보이고, 남산 타워가 보이고,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어요. 7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집과 직장을 갖게 된 곳도 여기에요. 인왕산 아래 한옥과 일제시대 적산가옥들, 현대식 빌라, 일반 주택이 뒤엉켜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것들과 가장 빠른 변화가 공존하는 곳, 제 지나온 삶과 미래의 꿈이 만나 ‘현존의 시점’이 되는 이곳의 풍경이 좋았어요.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릴 계획인지요?
요즘 꽃 그림에 푹 빠져있어요. 눈에 잘 띄지 않을 만큼 아주 작은 꽃이라도 맹렬하게 전력을 다해 “나 여기 있어요”하면서 세상에 자기 존재를 보여주려는 듯 최선을 다해 황홀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으니까요. 꽃들은 그들의 존재방식으로 제게 말하고 있어요. 삶이, 목표라는 게 허망하게 느껴지고 포기하고 싶을 때 자기를 기억하라고…. 꽃들은 금방 시들어버릴 줄 알면서도 아름다운 찰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피어요. 맨드라미, 봉숭아, 민들레, 채송화, 해바라기, 옥잠화, 여뀌, 도라지꽃…. 그림 그리기 시작하면서 꽃을 그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우연히 진달래꽃을 그렸더니 정말 고왔어요. 그 후로 인왕산으로, 서촌 골목길로, 이웃집 마당으로 찾아다니면서 꽃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입춘만 지나면 매화, 동백이 보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이에요. 지난해에 이어 이번에도 전남 강진의 백련사에 다녀왔어요. 온몸을 불사르는 듯 붉은 빛에 꽃이 질 때도 통으로 툭 떨어지는 모습이 황홀하면서도 처연하다고나 할까요.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리겠다는 계획 보다는 온통 펼쳐진 세상을 맘대로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실컷 그려보고 싶어요. 봄에 꽃이 활짝 필 때 원하는 꽃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면 멋지게 그려줄 길거리 꽃그림 노점상을 펼쳐볼까 생각 중입니다. 푸드 트럭처럼 그림 트럭을 운전하면서 그리며 팔며 전국을 돌아다녀보는 꿈도 있어요.
올해부터 격주로 한겨레신문에 그림과 글을 연재하고, 페이스북에도 꾸준히 작품 올리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글 쓰고 싶어 국문학을 전공했고, 기자 생활을 한 덕분에 다른 화가들과 달리 글을 좀 쓴다는 게 자산이에요. 페이스북도 기자 시절 IT분야에 호기심이 생겨 열심히 배우고 일했던 분야다보니 남들보다 쉽게 접근했던 것 같아요. 페이스북은 출판사 대표로 일하는 지인이 그림을 한 장이라도 팔려면 알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조언해줘서 2014년 7월 시작했죠. 페이스북 친구들의 댓글과 관심이 큰 힘이 됐어요. 가난한 저에게는 임대료와 관리비가 안 드는 나만의 갤러리인 셈이죠. ‘페친’들을 위해 연 이벤트나 전시회 기획 등도 신문사와 아름다운 재단에서 일한 경험이 도움 됐어요.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열정적으로 살아온 제 인생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네요.
“모든 사람의 내면 어딘가에는 예술가의 씨앗이 숨어있어요”
대학을 갓 졸업하고 교단에 섰다. 그런데 뭔가 부족했다. 교사생활 1년 만에 교단에서 내려와 대학원에 입학해 여성학을 공부했다. 이후 여성운동을 하려고 대안문화운동단체인 ‘또 하나의 문화’에 간사로 들어갔고, ‘여성신문’ 편집장으로 일했다. 여성운동을 더욱 확장하려는 마음에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멤버로 입사해 10년 넘도록 생활과학부와 뉴미디어국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2000년 들어서 인터넷에 꽂힌 덕분에 ‘인터넷한겨레뉴스’ 뉴스부장과 ‘한겨레신문 미디어사업기획부’ 부장도 지냈다. 20여년 기자생활을 배경으로 중견 언론인이 되려는 차에 2005년 한국을 떠나 뉴욕에서 7년을 보냈다.
귀국한 2012년부터 ‘아름다운재단’ 사무총장으로 정신없이 2년을 보냈다. 그런데도 아쉬움이 남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 이것이 마침내 찾은 해답이었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아야 했지만 결국은 가야할 길,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꼭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그림 그리는 일’을 택했다. 어느덧 두 차례 전시회를 열었고 ‘서촌 옥상화가’라는 새로운 직업을 가졌다. 오늘도 서촌 옥상이나 골목길 어딘가에서 하얀 종이 캔버스 위에 가느다란 펜으로 서촌의 과거와 현재, 골목길 꽃 이야기를 부지런히 기록하고 있을 김미경(79 국문) 동문 이야기다.
안정된 직장을 접고 쉰다섯 나이에 전업 화가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화가의 길로 이끌었는지요?
제가 그림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초등학생 시절 사생대회에서 입선한 게 전부입니다. 신문사 다닐 때 만평 그리던 박재동 화백과 ‘한겨레 미술반’ 동아리 활동을 했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기자들끼리 모여 점심시간에 그림 그리거나 한두 달에 한 번씩 야외 스케치를 나가기는 했어요. 매년 창간기념일마다 회사에서 전시회를 열곤 했는데 제가 제일 못 그려서 동료들로부터 늘 핀잔을 받았어요. 이게 그림이냐고…. 그랬는데 회사 그만두고 뉴욕으로 가면서 달라졌어요. 제가 살던 브루클린은 예술의 도시에요. 동네 곳곳 어딜 가나 작품을 볼 수 있고 구멍가게 드나들 듯 수시로 갤러리를 방문할 수 있는 곳이죠. 많은 그림을 보고 화가 친구들도 많이 사귀다보니 숨어있던 내 안의 내가 서서히 깨어났던 것 같아요. 그래도 다음 생에 태어나면 화가가 되겠다고 생각했지 전업 화가가 실제로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귀국해 서촌에 자리 잡으면서 욕망이 강해졌어요. ‘저걸 그리고 싶다.’ 옥상에서 내려다본 서촌 풍경이 정말 아름다웠어요. 마음이 조급해졌죠.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리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자 더 늦기 전에 시작하자 마음먹고 직장을 그만 뒀어요.
경제적인 면에서도 직장 그만두고 전업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그림 그려서 먹고 살아야한다는 결심했을 때 어떻게 보면 ‘가난하게 살기’를 선택했다고 생각해요. 학교 졸업하고 평생 내 월급으로 살아왔기에, 월급이 끊어진다는 게 어떤건지 잘 알거든요. 덜 필요한 건 버리고, 덜 중요한 건 포기하고, 최소한으로 생활하고, 온갖 불편함은 감수하고, 줄어드는 통장 잔고를 보며 초조해할 수도 있다는 거, 어쩌면 죽을 때까지 내 집 없이 서울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며 살아야한다는 거…. 그래도 먹고 사는데 그리 많은 돈이 드는 건 아니잖아요. 가난을 택한 대신 행복해졌어요. 그림 그리다보면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에요. 그림 팔아서 근근이 먹고사는 게 소원이에요.
김미경이란 화가에게 그림이란 뭘까요?
예전과 전혀 다른 새 친구들을 만나고 있어요. 인왕산, 나무, 꽃, 기와, 전봇대, 하늘, 햇볕, 바람, 구름…. 이 친구들과의 만남이 저를 변화시키고 있어요. 친구들과 아무 말 하지 않고도 많은 것을 느끼고 깊게 소통하며 사랑에 빠지고 그들을 조금씩 닮아가는 것 같아요. 매일 새롭게 만나는 이 친구들을 통해 저는 새롭게 태어나고 있답니다. 좀 덜 서두르고, 좀 덜 안달하고, 좀 더 솔직하고 용감해지며 나를 억압했던 끈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풀어내고 끊어내며 내가 진짜 원하는 것, 내 욕망의 소리, 감성의 소리를 찾아내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어요. 그림은 이렇게 찾아낸 제 감정을 오롯이 담아내는 공간입니다.
자칭 ‘무면허 화가’가 된 지 2년만인 2015년에 서촌 풍경과 서촌의 꽃을 주제로 전시회를 두 차례 열었습니다. 그 열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요?
2월에 가진 ‘서촌 오후 4시’에 서촌 풍경 50점, 11월에 가진 ‘서촌 꽃밭’에 서촌 골목과 이웃집 마당에 피어있는 꽃그림 100점을 전시했어요. 팔이 너무 아파 침 맞으러 다니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련하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신나게 그린 덕분이죠. 엉덩이의 힘과 긍정의 힘이 합쳐지다보니 무작정 앉아서 계속 그렸어요. ‘서촌 옥상도’ 한 점 완성하는데 최소한 100시간이 넘게 걸려요. 하루에 10시간씩 그리면 열흘 정도 걸리는 셈인데 이 정도는 열정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엉성해 보여도 열심히 간절히 그리면 작품이 나오더군요. 저는 누구든 각자의 누에고치 안에 가능성의 실타래를 품고 있다고 생각해요. 열정이 있고 열심히 훈련하면 자기만의 아름다운 실크가 나올 거라고 믿어요. 서강 출신은 그런 거 잘 하잖아요. 저는 매일 직장 다닐 때처럼 하루 8~9시간씩 그림 그리고 글 써요.
‘옥상화가’라는 독특한 별명이 붙었습니다. 옥상에서 그림 그리게 된 계기가 있나요?
옥상에서 보는 풍경이 정말 좋아요. 미국에서 돌아와 일했던 옥인동 ‘아름다운재단’ 옥상에 처음 올랐을 때, 인왕산 아래 기와집들이 수백 폭 병풍처럼 좌르륵 한꺼번에 펼쳐지더군요. 한순간 숨이 콱 멎는 것 같았어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황홀한 풍경이었죠. 큰 파도처럼, 웅장한 음악처럼 다가온 풍경. 그날 밤 잠을 설치면서 스마트폰 앱으로 그리기 시작했어요. 땅에서는 볼 수 없었던 구도의 스펙터클한 풍광이 자꾸 봐도 질리지 않았어요. 그때부터 틈만 나면 여기저기 동네 건물 옥상에 올랐습니다. 옥상에 올라가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시야가 트여요. 옥상에서 저는 자유인이 되고 예술가가 되요. 가난한 제겐 동네 옥상이 제 아틀리에인 셈이에요.
굳이 서촌을 그리고 싶었던 이유가 있나요?
대구 출신인 제가 서강에 입학하며 서울에서 처음 자리잡은 곳이 여기에요. 지금은 철거되어 청운공원이 들어선 청운아파트에서 선배와 자취를 했죠. 많이 낡고 화장실도 공동으로 사용해야했던 불편한 곳이었지만 인왕산 자락이라 전망은 최고였어요. 울창한 나무와 큼직한 바위들, 계곡이 있고, 종로가 보이고, 남산 타워가 보이고,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어요. 7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집과 직장을 갖게 된 곳도 여기에요. 인왕산 아래 한옥과 일제시대 적산가옥들, 현대식 빌라, 일반 주택이 뒤엉켜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것들과 가장 빠른 변화가 공존하는 곳, 제 지나온 삶과 미래의 꿈이 만나 ‘현존의 시점’이 되는 이곳의 풍경이 좋았어요.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릴 계획인지요?
요즘 꽃 그림에 푹 빠져있어요. 눈에 잘 띄지 않을 만큼 아주 작은 꽃이라도 맹렬하게 전력을 다해 “나 여기 있어요”하면서 세상에 자기 존재를 보여주려는 듯 최선을 다해 황홀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으니까요. 꽃들은 그들의 존재방식으로 제게 말하고 있어요. 삶이, 목표라는 게 허망하게 느껴지고 포기하고 싶을 때 자기를 기억하라고…. 꽃들은 금방 시들어버릴 줄 알면서도 아름다운 찰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피어요. 맨드라미, 봉숭아, 민들레, 채송화, 해바라기, 옥잠화, 여뀌, 도라지꽃…. 그림 그리기 시작하면서 꽃을 그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우연히 진달래꽃을 그렸더니 정말 고왔어요. 그 후로 인왕산으로, 서촌 골목길로, 이웃집 마당으로 찾아다니면서 꽃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입춘만 지나면 매화, 동백이 보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이에요. 지난해에 이어 이번에도 전남 강진의 백련사에 다녀왔어요. 온몸을 불사르는 듯 붉은 빛에 꽃이 질 때도 통으로 툭 떨어지는 모습이 황홀하면서도 처연하다고나 할까요.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리겠다는 계획 보다는 온통 펼쳐진 세상을 맘대로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실컷 그려보고 싶어요. 봄에 꽃이 활짝 필 때 원하는 꽃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면 멋지게 그려줄 길거리 꽃그림 노점상을 펼쳐볼까 생각 중입니다. 푸드 트럭처럼 그림 트럭을 운전하면서 그리며 팔며 전국을 돌아다녀보는 꿈도 있어요.
올해부터 격주로 한겨레신문에 그림과 글을 연재하고, 페이스북에도 꾸준히 작품 올리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글 쓰고 싶어 국문학을 전공했고, 기자 생활을 한 덕분에 다른 화가들과 달리 글을 좀 쓴다는 게 자산이에요. 페이스북도 기자 시절 IT분야에 호기심이 생겨 열심히 배우고 일했던 분야다보니 남들보다 쉽게 접근했던 것 같아요. 페이스북은 출판사 대표로 일하는 지인이 그림을 한 장이라도 팔려면 알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조언해줘서 2014년 7월 시작했죠. 페이스북 친구들의 댓글과 관심이 큰 힘이 됐어요. 가난한 저에게는 임대료와 관리비가 안 드는 나만의 갤러리인 셈이죠. ‘페친’들을 위해 연 이벤트나 전시회 기획 등도 신문사와 아름다운 재단에서 일한 경험이 도움 됐어요.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열정적으로 살아온 제 인생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네요.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