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스토리] 서강을 만든 주역, 서강의 아버지들을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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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4-11-17 20:28 조회1,04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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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을 만든 주역
서강의 아버지들을 기억하다
▲ 서강대학 설립의 주역들. 좌측 하단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신부, 헙스트 신부, 진성만 베드로 신부, 프라이스 신부, 데슬렙스 수사
서강대학교는 한국가톨릭교회의 발의와 비오 12세의 승인 아래 1948년 9월 설립이 기획되었다. 1957년 1월부터 신수동에 토지를 매입해 본격적으로 실체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강의 주요 설립자는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 길로렌 신부, 존 데일리 신부, 헙스트 신부, 프라이스 신부, 진성만 신부, 데슬렙스 수사 등이 있다. 1960년 4월 18일, 서강대학교는 한국가톨릭교회와 예수회, 신부들과 수많은 이들의 땀과 노력으로 2024년까지, 지난 64년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서강대 설립의 주역들과 그들의 잊지 않고 기려 온 서강인들의 노력을 따라가 본다.
▲ 서강대학교 초대 이사장,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Fr. Theodore Geppert, S.J) . 그의 동상은 본관 앞에서 항상 모교를 방문하는 모든 이들을 반기고 있다.
‘Obedire Veritati’,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는 ‘진리에 순종하라’는 말씀을 평생 실천해온 성직자이자 교육자였다. 그는 1904년 3월 8일 독일 제국 베스트팔렌에서 태어나 1923년 네덜란드 헤렌버그 예수회에 입회했다. 1933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뒤 독일 베를린 동방신학원에서 일본어를, 더블린에서 신학을 각각 수학하여 1940년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경제학과 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처음 한국에 방문한 것은 1954년, 그는 ‘숨은 영웅’이었다. 대학을 설립해 인재를 양성하고 싶다는 꿈을 늘 품고 있었던 그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수차례 면담하며 1960년 2월 대학 설립 인가를 받아냈다. 서강대 개교 뒤 그는 서강대 초대 이사장으로서 우수한 교수들을 유치하고 엄격한 학사관리로 명문 사학으로 발전하기 위한 기틀을 다졌다. 당시 부족했던 학교 살림을 보충하기 위해 독일 예수회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고, 교수로서 직접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쳤다. 그는 1961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조치대학교 경제학과 겸 기숙사감, 수도원장 등을 지내며 여전히 한국 대학교육과 가톨릭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온몸을 바쳤다. 그렇게 평생을 노력한 그는 2002년 7월 13일 일본 도쿄의 로욜라 하우스에서 98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게페르트 신부의 조치대 교수 시절 제자인 김수환 추기경은 그를 이렇게 회상했다.
“서강대는 게페르트 신부님의 평생에 걸친 꿈과 땀이 배어있는 학교입니다. 신부님은 언제나 한국에 가서 대학을 세우고 인재를 키워내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017년에 완공된 게페르트남덕우경제관은 게페르트 신부를 기리는 동문들의 마음을 모아 그의 이름을 따 왔다. 2017년 완공된 지하 1층, 지상 7층, 연면적 7890㎡의 경제학과 전용 건물로, 강의실, 교수 연구실, 학생카페도서관, 남덕우 기념 자료실 등이 위치한 건물이다. 경제관에는 게페르트 신부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다.
게페르트 신부는 서강대학교 설립을 위한 거의 모든 일을 했으면서도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숨결은 서강대학교 역사 어디서나 느낄 수 있다. 학교 부지와 모토, 그리고 한국전쟁 직후 한국에 필요한 학문이 ‘경제학’이라는 확신에서 비롯한 경제학에 대한 중시는 서강대학교를 이야기할 때 게페르트 신부를 언급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게페르트남덕우경제관 <게페르트 신부가 남긴 유산>
▲ 서강대학교 초대 학장 길로런 신부(Fr. Kenneth E. Killoren), 초대 총장 존 P. 데일리 신부(Fr. John P. Daly,S.J.)
서강의 아버지, 초대 학장 길로런 신부(Fr. Kenneth E. Killoren)와 초대 총장 존P.데일리 신부(Fr. John P. Daly,S.J.)
"옥스퍼드란 ‘소[牛] 우리’를 뜻하는 겁니다. 오늘날 옥스퍼드 대학교는 전 세계적으로 학구적인 명망이 가장 높은 대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강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 길로런 신부(Fr. Kenneth E. Killoren)
케네스 길로런 신부는 전쟁 직후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한국 땅을 딛고 설립 책임자로서, 모교의 설립 인가와 건축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직접 겪으며 발로 뛴 인물이다. 심지어 ‘서강’이라는 이름 역시, 길로런 신부의 의견이었다. 무려 개교한 다음 날 4.19혁명이 일어나는 등 고된 한국사를 겪어 내면서도 서강대학교의 초대 학장으로 역시 서강대학교를 명문 사학으로 도약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를 기억하는 동문들은 입을 모아, 길로런 신부가 대학교의 학장, 예수회 신부라는 신분에 연상되는 엄격함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말한다. 그는 학생들을 매우 아꼈고, 학생들과 격의없이 어울리는 것을 즐길 정도로 친근하고 쾌활한 성격이었다. 그가 전교생의 얼굴과 이름을 외웠다는 사실은 실로 유명했다. 실제로 신입생으로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평범한 학생이 길로런 신부에게 복도에서 이름이 불렸던 사례는 유명하다. 길로런 신부는 그 특유의 친밀한 태도로 학생들과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며 지도한 덕분에 ‘서강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서강에만 있는 장학금 중 하나는, 신부님을 기억하고 그 업적을 기리고자 조성되었다. (재)서강동문장학회에 있는 ‘길로련 펠로우’가 바로 그 장학금이다. 지난 1986년 고인의 아내 이조안(64 영문) 동문이 조성했다. 이 동문은 두 사람의 만남과 사랑의 이야기가 담긴 자신의 베스트셀러 <스물 셋의 사랑 마흔 아홉의 성공>의 인세를 장학금으로 기탁하여 긴 시간동안 묵묵히 후배와 모교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초기에는 ‘길로련 장학금’으로 가정 형편이 어려운 재학생들의 등록금을 지원했지만 1997년부터 ‘길로련 펠로우’로 명칭을 바꿨다. 형편이 어려운 후배들이 미주에서 어학 및 문화 등을 체험하며 시야를 넓혔으면 좋겠다는 기부자의 철학이 반영된 것이다. 이조안 동문은 국내에 국제PR 전문가란 직업을 알리고 업계에서 활약이 컸던 이 분야 대모이다. 현재는 교환학생으로 글로벌 경험을 쌓고자 하는 학생들의 해외 생활을 지원하고 있으며, 2024년 2학기에도 지속적으로 지원을 이어 오고 있다.
▲ 초대 총장으로 재임 당시 존 P.데일리 신부의 모습
존 P. 데일리 신부는 초대 총장으로 서강대학교가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이후 1970년 초부터 1975년까지 총장으로 재임했다. 그 이전에는 1963년 7월부터 길로런 신부를 이은 제 2대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재임 기간 12년 동안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서강대학교를 빠른 속도로 명문으로 도약시켰다. 그가 총장으로 지내던 70년대 초반은 한국 사회는 혼란 그 자체였다. 데일리 신부는 반독재 시위 주동 학생들을 퇴학시키라는 정부의 압력에 시달리기도 했으나 압력에 반발해 사표를 내는 등 민중을 대변하는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그의 재임 기간 중 소아마비 장애인 여학생의 입학을 허가했다. 그 학생이 바로 서강을 대표하는 영문학자이자 번역가, 수필가인 故 장영희(71 영문) 서강대학교 영문과 교수이다.
데일리 신부는 1981년 미국으로 돌아간 뒤 클레이튼 대학 교학부총장, 샌프란시스코대학 학술교류프로그램 행정관, 로욜라 메리마운트대학 아시아프로그램 행정관 등으로 일하며 평생 동안 약자와 학생들을 위해 힘썼다. 1960~70년대식 밈이라고도 할 수 있는 “글쎄 말이야”라는 한국말을 좋아하던 그는 솔직하고 소탈한 성품으로 존경받았다. 2010년 개교 50주년 기념식에서 한국을 방문하고 ‘서강 희년(禧年·jubilee)상’을 수상한 뒤, 이듬해 88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 서강희년상 수상 당시 존 P. 데일리 신부의 모습. 그는 서강에서의 시절이 행복했다고 말했다.
2013년 7월 19일 모교에서 열린 ‘故 존 P. 데일리 초대 총장 신부 동상제막식’에서 당시 김정택 이사장은 ‘신부님은 총장 재직 시절 후원요청 편지를 외국의 지인들에게 엄청나게 써서 보내셨을 정도로 학생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라며 술회했다.
그는 서강에서 은퇴한 뒤 로스앤젤레스의 예수회 대학인 Loyola Marymount University에서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국가에 학생을 파견하는 프로그램을 맡아 왔었다. 2011년 신부님께서 선종하고 한 해 뒤인 2012년부터, 신부님을 기리고자 모인 60년대 학번 동문들은 미주동문회 박정철(60 사학) 동문의 주도로 동상 건립 및 추모 장학금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현재 (재)서강동문장학회의 기명 장학금 중 하나인 존P.데일리 장학금은 2014년 1학기부터 가장 최근인 2024년 2학기에도 Loyola Marymount University로 파견 가는 교환학생들에게 장학금을 꾸준히 지원해 오고 있다.
▲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던 시절의 바실 프라이스 신부(Fr. Basil M. Price S.J.)와 투병 와중에도 학생들 및 졸업한 동문들과 시간을 보내는 신부님의 모습
서강대학교의 국제화와 노동 운동의 선구자, 프라이스 신부(Fr. Basil M. Price S.J.)
바실 프라이스 신부 역시 게페르트 신부와 함께 서강대학교의 설립을 이끈 주역이다. 그는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 교육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는 교육 뿐 아니라 인권과 노동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애썼다. 오랜 고민과 노력 끝에1966년 6월, 국내 처음으로 노동문제 전문연구소인 ‘산업문제연구소’를 서강대학교 안에 개설했다. 그는 노조임원 및 경영 관리층 인사들을 위한 산업노동관계분야의 교육과 훈련을 위해 직접 프로그램을 개발하였고, 결국 2001년 2월 연구소가 문을 닫기까지 35년간 노조 임원을 물론 사측 경영인과 정부 공무원, 사회단체 대표 등 1만 여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했다.
서강대 설립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모교의 설립을 추진하던 예수회는 인천항을 통해 그를 한국으로 파견했다. 프라이스 신부는 1960년 개교하자마자 사학과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세관에 가서 교육에 필요한 물품들을 인수하는 등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이러한 고인의 모습에 대해 이한택 의정부교구 주교는 "고인은 학문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니고 폼나는 보직을 맡은 것도 아니지만 구석진 자리에서 묵묵히 많은 일을 해온 성인"이라고 회고했다.
신부님을 알고 지낸 모든 이들은, 하나같이 그의 열정에 비해 그의 일상은 지극히 검소하고 평범했다고 말한다. 어두운 사무실이라도 낮에는 전등을 켜지 않고 창가 빛에 의존해 일을 하고 서류봉투는 낡아 헤질 때까지 사용한 다음 메모지로 이용하는가 하면 일회용품이라도 사용 후 씻어 말려서 다시 사용하는 등 함께 일해 본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만큼 절약의 달인이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세계 곳곳의 예수회 대학들과의 대외 교류를 통해 교환학생을 주고받거나 학문교류를 하는 등 대학교육의 글로벌화를 주도했다. 외국 서강 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2004년 9월 대장암으로 선종하기까지 그는 교단을 떠나지 않으며 끝까지 후학 양성에 힘썼다. 신부님의 건강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바로 지난 학기까지 학생들에게 영문작성법을 강의하고 당해 7월 말 병원에 입원하기 전날까지 교환학생들을 면담해 오셨기에, 고인의 투병과 선종소식은 많은 이들에게 안타까움과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지금도 서강 가족 중 프라이스 신부를 기리는 ‘화요가족(화가)’ 모임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정훈(70 신방) 화요가족 회장을 필두로 한 화요가족 모임에는 학창 시절 신부님께 받은 가르침을 잊지 않는 서강 가족들과 서강의 구성원들, 신부님의 뜻에 함께 하고자 하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매년마다 꾸준히 신부님의 생신과 기일, 세배 모임을 열어 신부님을 추모하고, 그의 일생에 대한 문집 <물처럼 공기처럼: 프라이스 신부를 말하다>을 펴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2018 년 2학기부터 시작해 2024년 2학기에도 매년 2명의 프라이스 신부 추모 장학생을 선발하여 프라이스 신부가 당시 학생이었던 화요가족 동문들에게 그러했듯이, 후배들에게 아낌없는 도움과 지지를 제공하고 있다.
▲ 2024년 7월, 프라이스 신부님의 탄생 101주년을 기념하여 모인 화요가족 동문들
▲ 왼쪽부터 헙스트 신부(Fr. Clarence A. Herbst), 한국인 최초의 예수회 신부인 진성만 신부, 데슬렙스 수사(Arther E. Dethlefs)
헙스트 신부와 진성만 신부, 그리고 데슬렙스 수사
초대 도서관장이었던 헙스트 신부는 개관 당시 도서관에 들어온 6만 여권의 책을 분류하고 편목하는 방대한 작업을 했다. 또 그는 기록관리사의 역할도 수행하며 서강대학교의 모든 문서, 기록, 사진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등 도서관의 틀을 다지는데 크게 기여했다. 서강의 제 2대 이사장이기 이전에 그는 역사가이자 열성있는 기록가였다. 헙스트 신부는 서강대학교에 행사가 있을 때 마다 사진 찍기를 좋아했고, 모든 걸 일일이 기록했다. 개교 이래 서강에 관한 기록을 정리하는 작업 ‘Sogang the Archives’가 시작됐을 때, 모든 자료 정리 책임자로 헙스트 신부가 지명됐다.
서정호 전 부총장은 그가 매우 꼼꼼하고 검소했다고 말한다. 학교에서는 헙스트 신부의 노고를 알고 해마다 100만원의 경비를 제공했으나, 연말마다 깨끗이 정리한 영수증과 함께 잔액인 30~40만원 가량을 반납했던 기억을 말했다. 헙스트 신부는 1995년 선종했다.
▲ 1999년 예수회 야유회에서 나란히 앉은 진성만 신부와 계종인 신부(Fr. Robert J. Kelly).
서강대학교의 3~4대 이사장을 역임한 진성만 신부는 한국인 최초로 예수회 사제가 된 인물이다. 1940년 5월 15일 일본 예수회에 입회한 그는 ‘한국예수회의 설립과 한국에서의 고등교육기관 설립’이라는 사명으로 모국에 귀국해 서강대학교의 설립에 참여했다. 실질적으로, 진 신부는 게페르트 신부와 함께 서강대학교를 설립할 부지를 매입하는데 큰 공헌을 한 바 있다. 그와 게페르트 신부가 함께 발로 뛴 덕분에 한국예수회는 1957년 1월, 서울 마포구 신수동 소재의 토지 6만 7075평을 매입한 뒤 측량·설계·건축 등을 시작했다. 1960년 모교 개교 후 진 신부는 학교법인 서강대학의 초대 이사 4명중 한 명이 되어 게페르트 신부와 헙스트 신부의 뒤를 이어 1962년 3대 이사장, 1964년 4대 이사장을 지냈다. 1970년대 초, 서강대학교가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이후에도 이사로 지내며 서강의 예수회적 이념에 충실한 교육 방향을 이끄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서강 설립의 공로를 기려 서강대학교 총동문회는 1998년 1월 진성만 신부를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와 함께 제 5회 ‘자랑스런 서강인’으로 선정했다. 서강과 그 설립의 주역인 예수회 신부들에게 큰 애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항상 자기자신을 성찰해 왔던 진 신부는 수상식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서강을 설립한 게페르트 신부님을 제대로 지켜드리지도 못했고, 서강을 위해 한 일이 없습니다.”라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늘 순수한 소년 같은 얼굴에 오토바이 타기를 즐겼던 진 신부는, 하늘로 돌아가던 날 점심식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조용히 눈을 감았다(2008년 8월 2일 수원 성 빈센트 병원에서 선종).
▲ 개교 50주년 기념식에 참석 후 총동문회 사무실에서 본인의 얼굴이 담긴 사진으로 라벨이 장식된 50주년 기념와인 ‘세븐힐 셀러스 쉬라즈 2006’을 들고 포즈를 취하는 데슬렙스 전 수사
아서 F. 데슬렙스 전 예수회 수사는 서강대학교의 하드웨어를 구축한 인물이다. 1955년 10월 미국 위스콘신 관구에서 길로런 신부와 함께 한국에 파견된 이후, 한국에 예수회 명문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힘썼다. 2024년 현재까지도 서강의 대표 건물이자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기까지 한 본관(A관)부터 시작하여 예수회관, 체육관을 비롯한 모교의 초기 모든 시설들이 데슬렙스 수사의 손을 거쳐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건축 감독을 맡았던 그는, 건축 과정에서 발생하는 물자 부족, 기술 상의 어려움, 근로자들과의 갈등 등 발생한 모든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했다. 1979년 예수회를 떠난 뒤에도 그는 서강에서 다양한 행정 업무를 했다. 정년 은퇴를 한 이후에는 가족들과 함께 필리핀 마닐라에서 봉사를 하며 살다가, 고향인 오마하로 돌아와 2000년까지 ‘보이스 타운’이라는 청소년 시설에서 봉사하며 여생을 보냈다. 부총장을 역임한 서정호 모교 법학과 명예교수는 데슬렙스 전 수사가 퇴직할 때, 업적에 비해 적은 퇴직금을 받은 게 늘 마음에 걸린다고 책 ‘에피소드-서강대학교 초창기 이야기들’ 에서 밝힌 바 있다. 데슬랩스 전 수사는 2021년 10월 24일(일) 오후 5시경 향년 97세로 선종했다.
어느덧 60주년을 넘기고 70주년을 기다리는 우리의 모교 서강대학교. 서강을 만든 이들의 노고와 그들이 서강인들에게 대가없이 베풀었던 온정은 서강의 근간이 되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우리는 강의를 들으러 이동하다가, 모교를 산책하다가, 무심코 지나쳤던 서강의 곳곳에 사실 서강의 지난 세월이 지지 않고 살아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서강의 내실을 다져 온 그들의 현재가 과거이듯, 우리의 현재 역시 먼 미래에 과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우리 서강 가족들의 정신을 관통하는 한 마디로, 서강의 모든 시간들을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서강 그대의 자랑이듯, 그대 서강의 자랑이어라, 그러니 우리는 그대들을 영원히 잊지 않겠노라고.”
이나윤(22 신방) 기자, (재)서강동문장학회 이수민(14 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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