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기사]'산업문제연구소'를 추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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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1-11-22 10:27 조회9,03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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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문제연구소'를 추억하다
글_안수진(10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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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9년대 ‘압축성장’으로 경제는 급속하게 발전했지만, 노동자의 권익은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다. 故프라이스 신부는 국내 노동자들을 위한 교육을 통해 노사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1966년 6월 ‘산업문제연구원’를 본관 1층에 설립하고 노동자와 사용자를 교육하기 시작했다.
국내 최초로 만들어진 노사연구기관이었으며 노동자와 사용자 양측 모두를 위한 균형잡힌 교육기관이었다. 산업문제연구소 마지막 소장을 역임했던 김어상(61 경제, 교양학부 명예교수) 동문은 “연구소는 노동자, 사용자, 정부의 입장을 모두 아우르는 종합적인 시각의 교육을 지향했습니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권리, 갈등상황의 해결방법, 근로기준법, 회의진행법, 계약서작성법, 임금균형 등 노동에 필요한 기본 교육과 함께 노사정의 권리에 대한 교육을 진행했습니다.”고 회상했다.
산업문제연구원은 1967년 ‘사업문제연구소’로 개칭되며 모교 부속기관으로 편입됐다. 1969년부터는 독일정부의 원조를 받으며 현재 정문과 가브리엘관 사이, 추모동상이 즐비한 작은 언덕빼기에 독립건물을 건축했다. 준공식은 김수환 추기경, 서독대사 및 관계인사, 노총 산하 간부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2년 간 교육생으로 지냈던 김순기(71 경영, 경영학과 명예교수) 대외부총장은 “노동자 간부, 관리자가 퇴근 후 오후 수업을 함께 수강했다. 지방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을 위한 4주 특강도 있었다. 그들은 기숙사에 거주하며 교육을 들었는데, 교육동 건물 뒤편에 기숙사가 있었다.”고 회상했다.
산업문제연구소를 이끌었던 故프라이스 신부는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의 검소함에 대한 회상은 화요가족 정훈(70 신방) 총동문회 수석부회장, 김어상(61 경제) 동문, 김순기(71 경영) 대외부총장이 공통됐다. “프라이스 신부님은 사제관이 아닌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보일러도 켜지 않고 전기담요 하나만으로 겨울을 보내며 노동자들과 동일한 환경에서 생활하셨죠. 필터 없는 담배를 태우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합니다.”
산업문제 연구소는 2001년 4월 문을 닫는다. 정훈(70 신방) 총동문회 수석 부회장은 "시간이 가면서 노동운동이 점점 이념적으로 변질되고, 일부 노조가 권력화 되는 현실에 대해 프라이스 신부님이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민주화가 본격화된 이후 노조교육기관이 많아졌기에 굳이 모교에서 노동조합법을 가르쳐야 할 당위성도 사라지게 됐죠.“라며 자연스럽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연구소를 추억했다.
산업문제 연구소는 척박한 국내산업의 현실 속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회복하고 노사정 간의 협의를 이끌어내는 단초를 제공했다. 연구소를 만들고 교육에 이바지했던 故프라이스 신부의 활동에는 음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랑을 실천했던 카톨릭의 실천운동 정신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 산업문제연구소 준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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