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인이 꼭 알아야 할 50가지] 18. 서강타임스/서강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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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하유진 작성일09-05-06 11:35 조회9,07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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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는 라일락 향이 가득하지만 따뜻한 5월 햇살을 즐길 여유도없이 분주한 곳이 있다. 낡은 현판과 더불어 50여년 동안 학생회관(C관) 215호를 지키고 있는 동아리가 서강학보사다.
두 번의 폐간 조치, 수많은 투쟁과 굴곡의 역사를 지닌 서강학보는 모교가 개교하던 1960년 서강인과 처음 만났다. ‘서강학보’의 전신은 ‘서강타임스’다.서강타임스는 아카데미즘을 바탕으로 진보담론, 학내 소식 등을 전달하는 매체였다. 축쇄판으로 남아 있는 과거의 신문을 통해 지금도 변치 않은 서강인의 학구적인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라우더 스피커’와 같은 고정란은 계몽적이면서 자유로운 학풍을 드러낸다.
서강타임스는 신군부의 등장으로 우리나라 현대사의 아픔을 함께 겪었다. 전두환 육군소장의 등장을 비꼰 만평 등으로 신군부 검열기구의 눈밖에 나면서 서강학보사는 1980년 7월 마지막 날, 라디오 뉴스로 폐간소식이 전해졌다. 우여곡절 끝에복간 결정이 내려진 이후, 서강타임스는 1981년 3월 17일 ‘서강학보’라는 새로운 제호로 문화공보부에 등록하며 4월 16일제145호를 발간했다.
1980년대 중반, 역사의 변혁기와 함께 서강학보는 매체혁신을 단행했다. 기존의 아카데미즘보다는, 한국 사회 변혁운동을 위한 진보적 학생매체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학생기자들은 취재수첩과 ‘짱돌’ 사이에서 고뇌하며 강의실, 신문사, 집회현장을 무수히 오갔다. 학생기자들은 대학생이면서도 기자의 신분을 지녔기에 바쁜신문 제작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편집회의가 끝나면 1차 물레야(육교집), 2차 포시즌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주점탐방 코스’로 하루를 마감하면서 시대를 논하고 끈끈한 동기애를 다져나갔다.
1991년 봄, 서강학보는 또 한 차례 어려움을 겪었다. 학교가 학생기자를 배제한채 신문을 발행했기 때문이다. 당시 학보편집을 관장하던 주간교수가 제287호 부터 제289호를 직접 제작하는 동안, 학생기자들은 ‘편집자율권과 건전광고 게재’등을 요구하며 학교와 충돌하기도 했다.
“1993년 새롭게 신문을 꾸리게 됐지만,그 시간동안 입었던 상처, 무너진 전통을 복구하기엔 상당히 버거운 시간이 흘러야했습니다.”
시련은 1993년 1월 사규를 일부 개정하는 것으로 일단락됐지만, 당시 학생기자였던 장영권(91 사학) 동문이 서강학보 제500호 특집호에 당시의 상황을 회고한 표현에서 안타까움의 깊이를 짐작할 수있다.
모교 50주년은 서강학보사의 50주년이기도 하다. 월요일 아침이면 서강학보를 고이 챙겨 여자 친구에게 보내는 것이 유행이었던 과거에 비해 애독자수는줄었지만, 어느덧 550번째 신문을 발간한 서강학보는 여전히 서강의 목소리로 자리를지키고있다.
두 번의 폐간 조치, 수많은 투쟁과 굴곡의 역사를 지닌 서강학보는 모교가 개교하던 1960년 서강인과 처음 만났다. ‘서강학보’의 전신은 ‘서강타임스’다.서강타임스는 아카데미즘을 바탕으로 진보담론, 학내 소식 등을 전달하는 매체였다. 축쇄판으로 남아 있는 과거의 신문을 통해 지금도 변치 않은 서강인의 학구적인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라우더 스피커’와 같은 고정란은 계몽적이면서 자유로운 학풍을 드러낸다.
서강타임스는 신군부의 등장으로 우리나라 현대사의 아픔을 함께 겪었다. 전두환 육군소장의 등장을 비꼰 만평 등으로 신군부 검열기구의 눈밖에 나면서 서강학보사는 1980년 7월 마지막 날, 라디오 뉴스로 폐간소식이 전해졌다. 우여곡절 끝에복간 결정이 내려진 이후, 서강타임스는 1981년 3월 17일 ‘서강학보’라는 새로운 제호로 문화공보부에 등록하며 4월 16일제145호를 발간했다.
1980년대 중반, 역사의 변혁기와 함께 서강학보는 매체혁신을 단행했다. 기존의 아카데미즘보다는, 한국 사회 변혁운동을 위한 진보적 학생매체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학생기자들은 취재수첩과 ‘짱돌’ 사이에서 고뇌하며 강의실, 신문사, 집회현장을 무수히 오갔다. 학생기자들은 대학생이면서도 기자의 신분을 지녔기에 바쁜신문 제작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편집회의가 끝나면 1차 물레야(육교집), 2차 포시즌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주점탐방 코스’로 하루를 마감하면서 시대를 논하고 끈끈한 동기애를 다져나갔다.
1991년 봄, 서강학보는 또 한 차례 어려움을 겪었다. 학교가 학생기자를 배제한채 신문을 발행했기 때문이다. 당시 학보편집을 관장하던 주간교수가 제287호 부터 제289호를 직접 제작하는 동안, 학생기자들은 ‘편집자율권과 건전광고 게재’등을 요구하며 학교와 충돌하기도 했다.
“1993년 새롭게 신문을 꾸리게 됐지만,그 시간동안 입었던 상처, 무너진 전통을 복구하기엔 상당히 버거운 시간이 흘러야했습니다.”
시련은 1993년 1월 사규를 일부 개정하는 것으로 일단락됐지만, 당시 학생기자였던 장영권(91 사학) 동문이 서강학보 제500호 특집호에 당시의 상황을 회고한 표현에서 안타까움의 깊이를 짐작할 수있다.
모교 50주년은 서강학보사의 50주년이기도 하다. 월요일 아침이면 서강학보를 고이 챙겨 여자 친구에게 보내는 것이 유행이었던 과거에 비해 애독자수는줄었지만, 어느덧 550번째 신문을 발간한 서강학보는 여전히 서강의 목소리로 자리를지키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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