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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차트로 읽는 한국사 (2) "남편이 배신하자 새 나라 세운 원조 걸크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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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8-19 09:29 조회12,6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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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서강대학교 입학생은 1500여 명이었고 그 중 여학생은 13%에 불과했다. 입학 정원이 가장 많은 경영학과는 300명 가운데 여자가 6명이었다. 여학생이 한 명도 없는 학과들도 있었다. 반면 2020년 현재 서강대 여학생 비율은 45%에 육박한다. 자치기구, 동아리 등 학생활동도 여성들이 앞장서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달라진 여성의 위상이 학교에 투영된 것이다. 여자들의 삶을 남자들이 좌지우지하던 시대는 지났다. 가부장적 성역할을 뒤집은 당당하고 진취적인 여성상이 사회적으로 각광받는다. 여자가 반하는 여자, 걸크러시의 시대다. 한국사에는 누가 있을까? 원조 걸크러시 베스트 3를 뽑아봤다.


[3위] 김만덕, 제주도민 구하고 금강산을 유람한 여성 기업가

“사해(四海)가 모두 내 형제다. 하물며 같은 섬사람 아닌가! 재물이란 모이고 흩어지는 때가 있다. 내 어떻게 수전노가 되어 굶어 죽는 사람을 구하지 않겠나.” (이면승, <만덕전>)
3위는 굶어 죽어가던 이웃들을 구한 제주의 여성 기업가 김만덕이다. 1795년 대기근이 닥치자 그녀는 아낌없이 재물을 풀고 수완을 발휘하여 수많은 제주 사람들을 살렸다. “사해가 모두 형제”라는 이 여인, 얼마나 그릇이 크고 호탕한가?
김만덕은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먹고 살기 위해 기생의 몸종이 되었다. 기방은 온갖 정보가 넘치는 곳이다. 손님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소녀는 사업이라는 것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18세기 들어 조선에서는 상품경제가 발달하고 시장이 활성화되었다. 근대적인 자본 축적이 이루어지면서 상단(기업)과 행수(기업가)들이 나타났다. 만덕이 볼 때 여자라고 못할 것도 없었다. 여성의 벼슬길은 막혀 있지만 사업은 밑천만 있으면 가능했다.
김만덕은 악착같이 장사 밑천을 마련했다. 나이 스물 남짓 되자 따로 살림을 차렸다. 남편은 맞아들이지 않고 탐라의 사내들을 머슴으로 부렸다. 그녀가 뛰어든 업종은 유통이었다. 제주에서 나는 특산품을 육지에 내다 팔고, 뭍의 생필품을 사들여 섬에 공급했다. 만덕은 정보력을 바탕으로 시세 변동을 예측했다. 곡물과 물건의 가격이 바닥을 치면 구입하고, 충분히 올랐을 때 시장에 풀어서 이윤을 키워나갔다. 김만덕은 드디어 대행수가 되었다. 여성의 한계에 굴하지 않는 용기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통찰하는 지혜 덕분이었다.
그녀의 참다운 가치는 1795년 제주도에 대기근이 덮쳤을 때 빛을 발했다. 제주 인구가 10만에서 3만으로 격감할 만큼 참혹한 굶주림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구휼미를 싣고 제주도로 오던 배마저 풍랑을 만나 침몰하고 말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이러다간 사람의 씨가 마를 지경이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만덕이 전 재산을 털어서 육지로부터 쌀 수천 석을 들여왔다. 조달부터 운송까지, 사업 수완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만덕의 선행으로 제주 사람들은 간신히 고비를 넘기고 목숨을 연명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만덕이 우리를 구했다”며 은혜를 칭송했다. 제주목사는 이 아름다운 일을 조정에 알렸다. 정조 임금은 그녀를 갸륵하게 여기고 소원을 아뢰라는 영을 내렸다. 무슨 청이든 들어주겠다는 것이었다. 김만덕의 소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다른 청은 없습니다. 다만 서울에 들어가 상감께서 계신 곳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또 금강산에 이르러 1만2천 봉을 구경하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채제공, <만덕전>)
그것은 신분상승도, 부귀영화도 아니었다. 한양 궁궐과 금강산을 구경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국법은 탐라의 여인들이 바다를 건너서 뭍에 오르지 못하도록 했다. 얼핏 소박한 소원처럼 보이지만 이면에는 금기를 깨려는 의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양 궁궐은 조선의 임금이 거처하는 곳이다. 금강산은 ‘봉래산(蓬萊山)’이라 하여 진시황과 한무제가 불로불사약을 구하러 사람을 보냈다는 전설이 깃든 산이다. 만덕은 비록 신분이 낮은 변방의 여인이었지만 포부만은 내로라하는 가부장 군주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1796~1797년 김만덕은 마침내 육지로 나와 한양 궁궐과 금강산을 구경했다. 임금의 특별지시에 따라 지나가는 역참마다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정조는 만덕을 모든 의녀의 우두머리인 내의원 의녀로 삼아 궁궐에서 문안 인사를 할 자격을 부여했다. 내명부의 큰 어른인 정순왕후(영조의 후비)와 혜경궁 홍씨(사도세자의 빈)도 이 갸륵한 여인을 만나 상을 내렸다. 만덕의 이름이 서울에 가득 퍼지자 오히려 공경대부들이 얼굴 보기를 청했다. 정승 채제공은 그녀의 전기를 지었고, 판서 이가환은 시를 선물하였다.
김만덕은 여성의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어 사해를 모두 자신의 형제로 삼는 통큰 행보를 펼쳤다. 여자가 반할 만한 여자, 원조 걸크러시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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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 나혜석,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줘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나혜석, ‘이혼고백장’, <삼천리> 1934년 9월호)
2위는 삼종지도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가부장 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한 신여성 나혜석이다. 20세기 들어 여성의 참정권 등을 요구하며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세계적으로 커졌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에서도 유학을 다녀오거나 신식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가부장 사회에 반기를 들었다. 단발머리와 양장차림의 여인들이 구두 신고 또각또각 새로운 시대로 나아간 것이다. 이른바 ‘신여성(新女性)’의 등장이었다.
나혜석은 1920~30년대에 가장 잘 나가는 신여성이었다. 그녀는 도쿄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한국 여성 최초로 개인전을 연 서양화가였다. 그 시대에 몇 년 동안 세계일주여행을 다녀올 만큼 개명한 여성이기도 했다. 여기에는 대부호 아버지와 변호사 남편의 조력도 있었다. 하지만 나혜석은 자신의 명성과 유복한 환경에 안주하지 않았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를 거침없이 비판하며 여성의 열악한 현실을 바꾸려 한 것이다.
1920년대에 그녀는 ‘모성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발단은 1923년 1월 주간지 <동명>에 네 차례 연재한 ‘모(母)된 감상기’였다. 나혜석은 자신의 임신, 출산, 육아 경험을 바탕으로 엄마의 사랑, 즉 모성이 타고나는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것을 절대화하거나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말고 실제 여성의 삶과 경험 속에서 다시 살펴보자는 말이다. 일하는 엄마로서 후대를 생산하고 기르는 게 여성의 당연한 의무라는 고정관념에 도전장을 던진 셈이다. 시대를 뛰어넘어 한국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다.
하지만 ‘모된 감상기’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거센 반발을 몰고 왔다. 백결생이라는 투고자는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는 그녀의 해학적인 표현을 트집 잡으면서 여성의 거룩한 천직을 우습게 여긴다는 둥, 의무는 망각하고 권리만 주장한다는 둥, 비난을 퍼부었다. ‘모된 감상기’가 숫제 ‘못된 감상기’로 매도당한 것이다.
그렇다고 물러설 나혜석이 아니었다. 여성의 삶을 겪어보지도 않고 편견과 독단에 여자들을 가두는 게 문제라고 반박했다. 애초 그녀가 말을 건 상대는 “능히 알지 못할 사실을 아는 체하려는” 남자들이 아니었다. 임신, 출산, 육아를 실제로 해본 엄마들과 이야기 나누고자 한 것이다.
“나는 꼭 믿는다. 내 ‘모된 감상기’를 엄마 중에 공감할 자가 있을 줄 안다. 꼭 있기를 바란다. 많이 있기를 바란다. 이런 경험이 있어야만 우리는 꼭 단단히 살아갈 길이 나설 줄 안다. 부디 있기를 바란다.” (나혜석, ‘백결생에게 답함’, <동명> 29호, 1923년 3월 18일)
나혜석에게 모성은 여성의 숙명이나 거룩한 본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이를 낳고 돌보고 기르면서 우러나오는 일상의 감정이었다. 그녀는 이런 경험과 소감을 여자들이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공감이 여성을 임신, 출산, 육아의 도구에서 해방시키는 첫걸음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혜석은 간절히 소망하던 공감을 얻기는커녕 가정에서 쫓겨나고 사회로부터 배척당했다. 3남 1녀 자식들과 헤어져 모진 생활고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 예술가로서의 고뇌와 일탈이 빚은 불륜 사건의 말로였다. 그녀는 잡지에 ‘이혼고백장’을 발표하며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시인했다. 더불어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남성 중심의 제도와 통념을 비판하고 여자들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당당하게 주장했다.
여성의 삶을 남성이 좌지우지하는 가부장 사회에 통렬한 일격을 가한 대가로 나혜석은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그녀는 돌아서 가는 길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옳다고 믿는 것에 자신의 전부를 걸었다. ‘이혼고백장’에 흐르는 걸크러시는 그래서 짠하고 뜨겁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나혜석, ‘이혼고백장’, <삼천리> 1934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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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여성 창업자, 소서노

1위는 고구려와 백제 탄생의 주역 소서노다. 소서노는 졸본(卒本)의 세력가 연타발의 딸이었다. 졸본은 압록강의 북쪽 지류 유역에 위치했는데 기원전 1세기 무렵 이 일대에는 수많은 독립 세력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라를 칭하기도 하면서 서로 싸우고 경쟁했다. 우위에 서거나 살아남으려면 힘을 키워야 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결혼동맹, 곧 혼인을 통해 외부 세력과 손잡는 것이었다.
소서노는 애초 북부여 해부루왕의 서손(庶孫)이라는 우태와 결혼했다. 정식 왕족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힘을 가진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태는 치열한 세력 다툼 속에서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과부가 된 소서노는 졸본에 남아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키웠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물을 바탕으로 야무지게 부를 쌓아나갔다. 졸본의 경제력이 커지자 구혼하는 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기원전 37년 강 건너편에 낯선 무리가 나타나 초막을 지었다. 우두머리는 동부여에서 쫓겨온 주몽이라는 자였다. 그는 부하들을 여기저기 보내 자기가 천제(天帝)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선전했다. 사람들이 호기심에 모여들자 이 자는 활쏘기 시범을 보여줬다. 백발백중! 알고 보니 활의 달인이었다. 즉석에서 부하가 되겠다는 이들이 나왔다. 오이, 마리, 협보, 재사, 무골, 묵거 등 심복을 중심으로 주몽의 무리는 점점 불어났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를 살펴보면) 당시 소서노는 30살, 주몽은 22살이었다. 나이 차는 좀 있었지만 두 사람은 정략적으로 잘 어울리는 짝이었다. 소서노는 졸본을 넘보는 주변국들을 막으려면 젊고 용맹한 주몽과 그의 충성스러운 군대가 필요했다. 주몽도 졸본에 뿌리내리고 나라를 세우려면 땅과 백성, 재물을 가진 소서노와 손잡는 게 바람직했다. 결국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었다. 토착세력과 신흥세력의 결혼동맹이었다.
연상 연하 부부는 졸본을 도읍 삼아 새로운 나라 고구려를 건국했다. 주몽의 군사력과 소서노의 경제력은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고구려는 압록강의 북쪽 지류 유역을 평정했다. 주몽이 정벌전에 나설 때마다 소서노는 내심 흐뭇했다. 그가 넓혀나가는 고구려를 언젠가 자신의 맏아들 비류가 물려받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몽은 딴마음을 품은 지 오래였다. 왕위를 계승할 태자는 따로 있었다.
기원전 19년 4월 부여에서 주몽의 부인 예씨와 아들 유리가 찾아왔다. 주몽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유리를 태자로 삼았다. 소서노는 분노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해 9월 왕이 세상을 떠나고 유리가 보위에 올랐다. 그것은 이미 계획된 일이었다. 자기가 죽을 것을 알고 치밀하게 후사를 안배한 것이다. 이때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했다.
“처음에 대왕께서 부여에서의 환란을 피해 이곳까지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집안의 재물을 쏟아부어 나라의 창업을 도와 이루었으니, 어머니의 수고로움과 공로가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대왕께서 세상을 뜨시자 나라가 유리에게 돌아갔다. 우리가 공연히 여기 있으면서 군더더기 혹처럼 지내느니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가 새 나라를 세우는 게 나으리라.”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삼국사기>는 소서노의 두 아들이 신하들과 함께 한산(서울)에 이르렀는데 비류는 미추홀(인천), 온조는 하남위례성(송파)으로 갈라졌다고 썼다. 결국 온조가 경쟁에서 이겨 백제를 세우니 기원전 18 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단재 신채호는 백제의 창업자를 온조가 아닌 소서노로 보았다.
“백제의 시조는 소서노 여대왕이며, 하북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 소서노는 주몽왕에게 요청하여 금은보화를 나눠 가진 뒤 두 아들과 신하들을 데리고 마한으로 들어가 나라를 세웠다. 소서노가 재위 13년에 죽으니 조선 역사상 유일한 여성 창업자요,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사람이다.” (<조선상고사> ‘백제의 건국과 마한의 멸망’)
신채호에 따르면 남편 주몽에게 배신당하자 소서노의 멋짐이 폭발했다. 부부의 연을 끊고 자신의 재물을 챙겨 고구려를 떠나 버렸다. 주몽한테 잘 먹고 잘 살아라, 하고는 길을 나서 백제를 창업한 것이다. 그녀는 기원전 6년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후 나라에서 국모(國母)로 숭상하며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일군 소서노라면 걸크러시의 맨 윗자리를 내드려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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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경률 (사학 90) - 역사 칼럼니스트, 월간중앙 필진.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간다. 유튜브·페이스북·팟캐스트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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