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어디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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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홍병원 작성일09-12-10 15:11 조회10,36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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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는 내가 13년 3개월 다니고 산업은행을 강제 퇴직당하던 2004년의 3월에 소천하셨고 난 어머님 소천 1달 뒤 산은에서 강제 퇴직을 당했다.
어머니는 5남 3녀의 자녀를 낳았는데 난 맨 마지막 막내로서 8번째 어머니가 46세 되던 해에 태어났다. 그때 아버지는 어머님보다 2년 위이시므로 4세 이셨다. 난 부모님과 형제들의 배려와 도우심으로 비교적 순탄하게 대학까지 잘 마칠 수 있었다. 난 1984년 1월에 서강대학교 경영학과 2학년 1학기를 마친 뒤 휴학을 하고 육군 카투사 병력으로 논산 훈련소에 입소했다. 난 군에서 부터 본격적으로 교회 나가기 시작하면서 기독교 신앙생활에 몰입했다. 그 때부터 난 줄곧 나의 미래와 부모 형제 친척 친구 이웃 등의 사람들을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하기 위해 무척 기도를 많이 해왔다. 그런데 어머니 아버지께서 살아 생전 나이도 많이 잡수셨기도 했지만 나와 한번도 교회에나 성당에를 가시지 않으셨다. 난 아버지 어머님 돌아가시기까지 약 20여년을 기도했다. 그런데도 살아생전 한번도 나의 부모님은 두분다 교회에나 성당에를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난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직장생활을 할 때 종종 김해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께 전화를 하거나 직접 찾아가서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고 천국가실수 있으니 꼭 예수 믿으라고 하면 아버지는 대게 거부하신 편이셨고 그래도 어머니는 나와 같이 교회나 성당에 나가시지는 않으시지만 말로는 그래 이다음에 같이 가 줄께 라고 하시며 어머님은 마음속으로는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지금 아버지 어머님이 돌아가신지가 아버지는 6년정도 어머니는 5년 정도 되셨는데 아마 두분다 내가 약 20여년간 구원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셨으므로 천국에 가 계시지 않을까 난 그렇게 믿고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늦은 나이에 막내로 낳은 날 매우 사랑해 주셨고 귀하게 여겨 주셨고 정말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시고 키워주셨다. 난 형제들 중 누구보다 사실 기간은 짧지만 매우 정성스런 사랑과 은혜를 받고 자랐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때로는 형제들로 부터 약간이지만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했음을 부인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마지막 돌아가시기 전에는 제일 맏이이신 장남을 부모님을 다 찾으시고 챙기시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아무래도 돌아가시기 전의 아버지 어머님의 생각에는 제일 나이가 어린 막내보다는 제일 위의 맏이에게 가문을 물려주고 가는 것이 훨씬 더 마음이 편하시게 느끼신 것 같았다.
옛날에는 우리 가정과 가문은 주로 유교나 불교의 전통을 많이 이어받아 명절일나 기일이나 가정의 대소사에는 주로 유교 형식으로 행사가 많이 치뤄졌다.
그래서 사촌형님이 종손이신 큰 집 등에는 일련에 거의 10개 이상의 제사를 매 기일마다 명절마다 지내곤 했고 그때에는 의례히 친척되는 우리 가족들도 잠간 참여하여 음식을 나눠먹곤 했던 기억이 참 많이 남는다. 좌우지간 사촌형님이신 종손은 늘 제사를 밥먹듯이 치뤄야 했고 그럴때는 의당 부적이나
혹은 무슨 노래 비슷한 음성을 내며 제사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제사상 앞에 자손들 모두가 모여 함께 밤 12시가 지나도록 절을하고 하던 기억이 내게도 생생했다. 그때는 나도 가족 친척 이웃들도 아무도 예수를 몰랐고 믿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지금은 예전 어르신들은 대부분 다 돌아가시고 이제 그 다음 세대들이 남아 있는데 난 그들의 복음화를 위해 내 나름대로 기도하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 나가고 있다. 주현숙이나 조현동이나 배현철 친구 같은 사람들이 사실 생활을 잘 해 주어야 우리 고향 사람들이 본을 보고 함께 예수를 믿게 된다고 생각한다. 주 동기나 조 동기나 배 동기들은 사실 예수 믿는 믿음의 대표선수들이다. 대표선수가 잘 뛰어야지 다른 사람들이 신이나서
한데 똘똘 뭉치며 잘 살게 되는 것이지 지도자가 잘 못하며 그냥 조직이 깨어지고 집안이 깨어지고 온 동네나 마을이나 지역이나 나라가 풍지박산 나게 되고야 만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귀한 믿음의 고향 동기들은 각별히 자기 자신만이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더불어 함께 살아간다는 공동체의식과 단체의식으로 그리고 기독교인으로 매사에 철저히 신경을 쓰고 조심을 해서 다른 사람들로 부터 원한을 사거나 부질없는 질책이나 비난이나 비웃음을 사는 일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난 확고히 믿는다. 주현숙 동기의 좀더
사려깊고 신중한 행동을 기대한다. 나의 어머니는 아무리 생각해도 천국에 가셨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아버지는 내가 서울에서 직장생활하며 살때 갑자기 부산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불효하게도 난 아버지의 마지막을 잘 보지 못했다. 그래도 내가 약 20여년간 부모 형제 등 가족들 친척들 친구들 친지 및 이웃들을 위해 꾸준히 기도해 왔으므로 마지막에 회심하여 천국에 들어 가셨을 것으로 난 지금 그렇게 믿고 있다. 그래서 난 날마다 아버지 어머님을 생각하며 그리움에 몹시 마음이 아파오고 괴로와짐을 느낀다. 아, 내 아버지 어머니가 지금 좀 살아계시면 한 번 찾아가 뵙겠는데 이미 두 분 다 소천하셨으니 어찌할 길이 없다. 그래서 난 말씀을 읽으며 기도하며 찬송하며 천국에 계신 내 아버지 어머님을 한 참 영혼으로 더듬어 찾아본다. 한 참 뒤 아버지 어머님의 흔적이 느껴지면 난 영적으로 천국에 계신 아버지 어머님을 위해 간절히 기도를 하곤 한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나의 20여년이 넘는 간절한 기도로 인해 반드시 두 분 다 천국에 가 계신 것으로 난 굳게 믿고 있다. 어머니 아버지는 그 연로하신 연세에도 내가 서강대학교를 1989년 2월에 졸업을 하였는데 경남 김해군 녹산면에서 두 분 다 오셔서 나의 서강대학교 경영학과 졸업식을 다 보시고 나와 같이 사진도 함께 찍곤 하셨다. 난 너무나 날 지금까지 키우시느라 죽도록 수고를 많이하신 나의 어머님께 나의 '사각모자'(대학 졸업을 상징)를 씌워드리고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가 중앙에 서고 해서 아버지와 셋이서
함께 사진을 찍어 지금도 난 집에 보관하고 있다. 사실 나의 아버지 어머님은 옛날 분이시가 어려운 가정 사정으로 두 분 다 공식적인 학교에는 전혀 가보시지 못하신 분이셨다. 아버지는 동네 향교 등에서 야학으로 한문을 조금 익히셔서 그래도 신문도 보시고 글을 비교적 잘 아셨는데 어머님은 일체 글을 가까이 해 보신 경험이 없어 한글도 잘 모르시는 편이셨다. 그래서 내가 아주 어릴 때인 초등학교 시절 내가 고향에서 부모님 곁에 함께 살 때 그때 나의 큰 누님이 서울에 사셔서 매번 편지가 오면 내게 읽어 달라고 해서 난 늘 큰 누님의 편지를 어머니 아버지께 읽어 드리곤 했다. 어머니 아버지는 너무나 날 아껴 주시고 사랑해 주셨다. 항상 나를 최고로 최상으로 대우해 주셨다. 그래서
난 이 세상에 그 누구보다 나의 이미 소천하신 아버지 어머님을 가장 존경하고 사랑한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2학년 부터 나를 경남 김해군 녹산면이라는 한 작은 시골 농촌마을에서 그당시 꿈에도 그리웠던 대도시 부산으로 전학을 보내주셨다. 그때 부산에는 둘째 누님이 결혼을 해서 막 결혼생활을 했고자형은 부산 중앙동에 있는 한 운송회사에 열심히 다니셨다. 내가 중 2학년 때 부산에 전학을 가서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이제 여름 방학이 되어 내가 고향 부모님께 가니 아버님께서 날 데리고 경남 김해군 생림면의 조상 묘소에 참배하러 가지고 하시면서 과자 과일 등을 준비해 차를 타고 난 아버지를 따라 경남 김해군 생림면의 아주 윗대의 조상 묘소에 참배를 했다. 물론 그때 난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조상님들의 묘소를 일일이 기억해서 찾아다니며 절을 정성껏 올렸다. 그것이 그당시 나의 아버님이 그토록 신봉하던 유교의 핵심 교리이기에 난 그외 다른 방법은 전혀 모르고 오직 아버지께서 하시는 방식대로 따라서 했다. 아버지는 늘 내게 칭찬을 참 많이 하셨다. 그리고 늘 내게 밝고 긍정적인 말씀을 참 많이 하셨다. 경남 김해군 생림면에서 중 2학년 여름 방학때 선대들의 묘소를 참배한 뒤 아버지는 나와 같이 산에서 손을 잡고 하늘을 쳐다 보시며 '넌 다음에 저 하늘의 태양 같이 별과 같이 그렇게 천하를 호령하는 큰 인물이 되어라'라고 축복의 말씀을 아버지는 아주 간곡히 내게 말씀해 주셨다. 난 이것이 하나님이 아버지를 통해 내게 주신 축복의 말씀이고 약속의 말씀이라고 느껴져서 지금도 아버지 어머님을 생각하면 난 종종 이 말씀을 기억하며 힘을 얻곤 한다. 그리고 나와 아버지는 그 경남 김해군 생림면 조상묘소를 둘러싸고 있는 산세의 가파름과 절묘함과 기백을 보이시며 너도 저렇게 산과 같이 크고 위대하고 꿋꿋하고 기상과 기백과 용기가 넘치는 위대한 세계적인 인물이 반드시 되어야 한다라고 아버지는 내게 신신당부를 다해 주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늘 내게 웃는 모습으로 인자하신 사랑의 모습으로 대해 주셨고 너무나 친절하셨고 너무나 따뜻하셨고 너무나 부드러우셨고 너무나 날 보고 행복해 하셨고 내게 가장 좋은 옷 가장 좋은 음식 가장 좋은 잠자리 가장 좋은 교육 가장 좋은 사람 만들기 위해 몸이 거의 부서지도록 아버지와 함께 소를 빌려서는 몰아가며 최선 최고의 헌신과 노동을 다하셨다. 그 결과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둘째 형님은 우리 8형제를 위해 공부를 거의 하시지 못하시고 아버지 어머님과 함께 집안 살림살이를 하는 바람에 한마디로 희생타가 되셨다. 그래서 학교도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하셨고 젊은 시절 아버지를 따라다니시며 농촌 일들을 이것 저것 많이 감당하시느라 지금 일흔이 다 되어 가시는 나이이신데 몸이 많이 약해 지셨고 힘들어 지셨고 병도 많이 생겨 늘 병원에 다니시며 몇가지의 약을 복용하고 치료를 받아오고 계신다. 아마도 내 생각에 분명히 지금 나의 어머님은 천국에 계신다. 물론 아버지도 천국에 계신다고 난 굳게 믿는다. 난 거의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나님과 어머님 아버지를 그리고 형제들을 머리에 떠올리곤 짧게나마 감사의 기도를 주님께 드린다. 어머님은 마지막 소천하시기 직전에 내게 유언과도 같은 귀한 축복의 말씀을 가까스로 해 주셨다. 그것은 '원(홍병원의 준말 혹은 애칭)아, 니가 반드시 잘 살아야 한다' 라는 짧지만 뼛속깊이 찌르는 어머님의 나에 대한 애닲은 사랑과 지고한 사랑과 축복의 말씀이셨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 두 부모님으로 부터 정말 내 인생에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가장 보배롭고 귀한 유언과도 같은 축복의 말씀을 받았고 난 두 부모님의 이 귀한 진리의 말씀을 늘 마음판에 굳게 새기며 그렇게 살아가려고 최선을 다해 나가고 있다. 그것이 비록 이미 소천하셨지만 생전 부모님의 나에 대한 희생과 사랑과 정성에 대한 보답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나와 나의 가정과 친척과 친구와 친지들과 이웃들과 나라와 민족과 세계에 이루는 귀한 삶의 자세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게 천금과도 비교할 수 없이 귀한 축복의 말씀을 해 주신 분은 전 서울시 구로구 고척동의 고척교회 김제건 전 담임 목사님의 결혼 주례사 후 기도시간에 해 주신 귀한 말씀이다. 그것은 김제건 그 당시 고척교회 담임 목사님께서 나와 아내의 머리위에 한 손씩 올리고는 축복기도를 하시는데 이 두 사람이 신앙으로 하나되어 '지상 최고의 행복한 믿음의 가정을 이루라' 는 귀한 축복과 은혜와 사랑의 메세지이셨다. 난 지금 우리 부부가 결혼을 한지 18년이 넘도록 이 귀한 김제건 목사님의 축복의 말씀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며 어떻게 하면 이렇게 귀한 말씀을 순종하여 그야말로 '지상최고의 행복한 믿음의 가정을 이룰 수 있늘까', 생각하며 늘 신앙생활과 삶에 있어서도 최선을 다해 나가고 있다. 엄마, 너무 염려하시지 마세요. 그리고 아버지도 너무 막내 이 홍병원이 너무 걱정하시지 마십시요. 저 지금 아내 신혜영과 아들 홍요셉과 함께 주어진 일들 잘 감당하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아버지 어머님 그리고 목사님께서 축복해 주신 금보다도 더 귀한 축복의 말씀들을 붙들고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 나가고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부디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편안히 잘 계시기 바랍니다. 저희들 아버지, 어머님의 마음 상하지 않게 꼭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 것이며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에 보답하며 온 나라와 온 국민과 온 세계 인류에게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서 보답하며 살도록 최선을 다해 나가겠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그곳 천국에서 평안하게 잘 계시면서 저희두 부부와 아들 요셉이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큰 기대와 희망을 가지기고 지켜 봐 주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아버지 어머님의 저에 대한 저의 가정에 대한 축복의 말씀대로 또 그때 결혼식 때 김제건 담임 목사님의 축복의 말씀대로 저의 가정 가문이 그렇게 될 것을 전 확신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부디 늘 건강에 유의하시고 그곳 천국에서 더욱 아름답고 복되고 행복하게 아버지와 어머님께서 함께 잘 사시기 바랍니다. 저희들 이곳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모든 일들과 사명을 다 감당한 뒤 반드시 아버지 어머님이 계신 그곳 천국으로 기뻐하며 달려갈 것을 굳게 약속드립니다. 늘 강건하시고 행복하세요.
아버지 어머니 이 다음에 주님의 때에 반드시 기쁜 맘 행복한 맘으로 건강한 영혼으로 찾아뵐 것을 다시 한번 약속드립니다. 대단히 고맙고 감사합니다.
불효막심한 막내 아들 홍 병 원 올림
어머니는 5남 3녀의 자녀를 낳았는데 난 맨 마지막 막내로서 8번째 어머니가 46세 되던 해에 태어났다. 그때 아버지는 어머님보다 2년 위이시므로 4세 이셨다. 난 부모님과 형제들의 배려와 도우심으로 비교적 순탄하게 대학까지 잘 마칠 수 있었다. 난 1984년 1월에 서강대학교 경영학과 2학년 1학기를 마친 뒤 휴학을 하고 육군 카투사 병력으로 논산 훈련소에 입소했다. 난 군에서 부터 본격적으로 교회 나가기 시작하면서 기독교 신앙생활에 몰입했다. 그 때부터 난 줄곧 나의 미래와 부모 형제 친척 친구 이웃 등의 사람들을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하기 위해 무척 기도를 많이 해왔다. 그런데 어머니 아버지께서 살아 생전 나이도 많이 잡수셨기도 했지만 나와 한번도 교회에나 성당에를 가시지 않으셨다. 난 아버지 어머님 돌아가시기까지 약 20여년을 기도했다. 그런데도 살아생전 한번도 나의 부모님은 두분다 교회에나 성당에를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난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직장생활을 할 때 종종 김해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께 전화를 하거나 직접 찾아가서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고 천국가실수 있으니 꼭 예수 믿으라고 하면 아버지는 대게 거부하신 편이셨고 그래도 어머니는 나와 같이 교회나 성당에 나가시지는 않으시지만 말로는 그래 이다음에 같이 가 줄께 라고 하시며 어머님은 마음속으로는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지금 아버지 어머님이 돌아가신지가 아버지는 6년정도 어머니는 5년 정도 되셨는데 아마 두분다 내가 약 20여년간 구원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셨으므로 천국에 가 계시지 않을까 난 그렇게 믿고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늦은 나이에 막내로 낳은 날 매우 사랑해 주셨고 귀하게 여겨 주셨고 정말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시고 키워주셨다. 난 형제들 중 누구보다 사실 기간은 짧지만 매우 정성스런 사랑과 은혜를 받고 자랐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때로는 형제들로 부터 약간이지만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했음을 부인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마지막 돌아가시기 전에는 제일 맏이이신 장남을 부모님을 다 찾으시고 챙기시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아무래도 돌아가시기 전의 아버지 어머님의 생각에는 제일 나이가 어린 막내보다는 제일 위의 맏이에게 가문을 물려주고 가는 것이 훨씬 더 마음이 편하시게 느끼신 것 같았다.
옛날에는 우리 가정과 가문은 주로 유교나 불교의 전통을 많이 이어받아 명절일나 기일이나 가정의 대소사에는 주로 유교 형식으로 행사가 많이 치뤄졌다.
그래서 사촌형님이 종손이신 큰 집 등에는 일련에 거의 10개 이상의 제사를 매 기일마다 명절마다 지내곤 했고 그때에는 의례히 친척되는 우리 가족들도 잠간 참여하여 음식을 나눠먹곤 했던 기억이 참 많이 남는다. 좌우지간 사촌형님이신 종손은 늘 제사를 밥먹듯이 치뤄야 했고 그럴때는 의당 부적이나
혹은 무슨 노래 비슷한 음성을 내며 제사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제사상 앞에 자손들 모두가 모여 함께 밤 12시가 지나도록 절을하고 하던 기억이 내게도 생생했다. 그때는 나도 가족 친척 이웃들도 아무도 예수를 몰랐고 믿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지금은 예전 어르신들은 대부분 다 돌아가시고 이제 그 다음 세대들이 남아 있는데 난 그들의 복음화를 위해 내 나름대로 기도하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 나가고 있다. 주현숙이나 조현동이나 배현철 친구 같은 사람들이 사실 생활을 잘 해 주어야 우리 고향 사람들이 본을 보고 함께 예수를 믿게 된다고 생각한다. 주 동기나 조 동기나 배 동기들은 사실 예수 믿는 믿음의 대표선수들이다. 대표선수가 잘 뛰어야지 다른 사람들이 신이나서
한데 똘똘 뭉치며 잘 살게 되는 것이지 지도자가 잘 못하며 그냥 조직이 깨어지고 집안이 깨어지고 온 동네나 마을이나 지역이나 나라가 풍지박산 나게 되고야 만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귀한 믿음의 고향 동기들은 각별히 자기 자신만이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더불어 함께 살아간다는 공동체의식과 단체의식으로 그리고 기독교인으로 매사에 철저히 신경을 쓰고 조심을 해서 다른 사람들로 부터 원한을 사거나 부질없는 질책이나 비난이나 비웃음을 사는 일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난 확고히 믿는다. 주현숙 동기의 좀더
사려깊고 신중한 행동을 기대한다. 나의 어머니는 아무리 생각해도 천국에 가셨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아버지는 내가 서울에서 직장생활하며 살때 갑자기 부산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불효하게도 난 아버지의 마지막을 잘 보지 못했다. 그래도 내가 약 20여년간 부모 형제 등 가족들 친척들 친구들 친지 및 이웃들을 위해 꾸준히 기도해 왔으므로 마지막에 회심하여 천국에 들어 가셨을 것으로 난 지금 그렇게 믿고 있다. 그래서 난 날마다 아버지 어머님을 생각하며 그리움에 몹시 마음이 아파오고 괴로와짐을 느낀다. 아, 내 아버지 어머니가 지금 좀 살아계시면 한 번 찾아가 뵙겠는데 이미 두 분 다 소천하셨으니 어찌할 길이 없다. 그래서 난 말씀을 읽으며 기도하며 찬송하며 천국에 계신 내 아버지 어머님을 한 참 영혼으로 더듬어 찾아본다. 한 참 뒤 아버지 어머님의 흔적이 느껴지면 난 영적으로 천국에 계신 아버지 어머님을 위해 간절히 기도를 하곤 한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나의 20여년이 넘는 간절한 기도로 인해 반드시 두 분 다 천국에 가 계신 것으로 난 굳게 믿고 있다. 어머니 아버지는 그 연로하신 연세에도 내가 서강대학교를 1989년 2월에 졸업을 하였는데 경남 김해군 녹산면에서 두 분 다 오셔서 나의 서강대학교 경영학과 졸업식을 다 보시고 나와 같이 사진도 함께 찍곤 하셨다. 난 너무나 날 지금까지 키우시느라 죽도록 수고를 많이하신 나의 어머님께 나의 '사각모자'(대학 졸업을 상징)를 씌워드리고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가 중앙에 서고 해서 아버지와 셋이서
함께 사진을 찍어 지금도 난 집에 보관하고 있다. 사실 나의 아버지 어머님은 옛날 분이시가 어려운 가정 사정으로 두 분 다 공식적인 학교에는 전혀 가보시지 못하신 분이셨다. 아버지는 동네 향교 등에서 야학으로 한문을 조금 익히셔서 그래도 신문도 보시고 글을 비교적 잘 아셨는데 어머님은 일체 글을 가까이 해 보신 경험이 없어 한글도 잘 모르시는 편이셨다. 그래서 내가 아주 어릴 때인 초등학교 시절 내가 고향에서 부모님 곁에 함께 살 때 그때 나의 큰 누님이 서울에 사셔서 매번 편지가 오면 내게 읽어 달라고 해서 난 늘 큰 누님의 편지를 어머니 아버지께 읽어 드리곤 했다. 어머니 아버지는 너무나 날 아껴 주시고 사랑해 주셨다. 항상 나를 최고로 최상으로 대우해 주셨다. 그래서
난 이 세상에 그 누구보다 나의 이미 소천하신 아버지 어머님을 가장 존경하고 사랑한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 2학년 부터 나를 경남 김해군 녹산면이라는 한 작은 시골 농촌마을에서 그당시 꿈에도 그리웠던 대도시 부산으로 전학을 보내주셨다. 그때 부산에는 둘째 누님이 결혼을 해서 막 결혼생활을 했고자형은 부산 중앙동에 있는 한 운송회사에 열심히 다니셨다. 내가 중 2학년 때 부산에 전학을 가서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이제 여름 방학이 되어 내가 고향 부모님께 가니 아버님께서 날 데리고 경남 김해군 생림면의 조상 묘소에 참배하러 가지고 하시면서 과자 과일 등을 준비해 차를 타고 난 아버지를 따라 경남 김해군 생림면의 아주 윗대의 조상 묘소에 참배를 했다. 물론 그때 난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에 아버지와 함께 조상님들의 묘소를 일일이 기억해서 찾아다니며 절을 정성껏 올렸다. 그것이 그당시 나의 아버님이 그토록 신봉하던 유교의 핵심 교리이기에 난 그외 다른 방법은 전혀 모르고 오직 아버지께서 하시는 방식대로 따라서 했다. 아버지는 늘 내게 칭찬을 참 많이 하셨다. 그리고 늘 내게 밝고 긍정적인 말씀을 참 많이 하셨다. 경남 김해군 생림면에서 중 2학년 여름 방학때 선대들의 묘소를 참배한 뒤 아버지는 나와 같이 산에서 손을 잡고 하늘을 쳐다 보시며 '넌 다음에 저 하늘의 태양 같이 별과 같이 그렇게 천하를 호령하는 큰 인물이 되어라'라고 축복의 말씀을 아버지는 아주 간곡히 내게 말씀해 주셨다. 난 이것이 하나님이 아버지를 통해 내게 주신 축복의 말씀이고 약속의 말씀이라고 느껴져서 지금도 아버지 어머님을 생각하면 난 종종 이 말씀을 기억하며 힘을 얻곤 한다. 그리고 나와 아버지는 그 경남 김해군 생림면 조상묘소를 둘러싸고 있는 산세의 가파름과 절묘함과 기백을 보이시며 너도 저렇게 산과 같이 크고 위대하고 꿋꿋하고 기상과 기백과 용기가 넘치는 위대한 세계적인 인물이 반드시 되어야 한다라고 아버지는 내게 신신당부를 다해 주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늘 내게 웃는 모습으로 인자하신 사랑의 모습으로 대해 주셨고 너무나 친절하셨고 너무나 따뜻하셨고 너무나 부드러우셨고 너무나 날 보고 행복해 하셨고 내게 가장 좋은 옷 가장 좋은 음식 가장 좋은 잠자리 가장 좋은 교육 가장 좋은 사람 만들기 위해 몸이 거의 부서지도록 아버지와 함께 소를 빌려서는 몰아가며 최선 최고의 헌신과 노동을 다하셨다. 그 결과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둘째 형님은 우리 8형제를 위해 공부를 거의 하시지 못하시고 아버지 어머님과 함께 집안 살림살이를 하는 바람에 한마디로 희생타가 되셨다. 그래서 학교도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하셨고 젊은 시절 아버지를 따라다니시며 농촌 일들을 이것 저것 많이 감당하시느라 지금 일흔이 다 되어 가시는 나이이신데 몸이 많이 약해 지셨고 힘들어 지셨고 병도 많이 생겨 늘 병원에 다니시며 몇가지의 약을 복용하고 치료를 받아오고 계신다. 아마도 내 생각에 분명히 지금 나의 어머님은 천국에 계신다. 물론 아버지도 천국에 계신다고 난 굳게 믿는다. 난 거의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나님과 어머님 아버지를 그리고 형제들을 머리에 떠올리곤 짧게나마 감사의 기도를 주님께 드린다. 어머님은 마지막 소천하시기 직전에 내게 유언과도 같은 귀한 축복의 말씀을 가까스로 해 주셨다. 그것은 '원(홍병원의 준말 혹은 애칭)아, 니가 반드시 잘 살아야 한다' 라는 짧지만 뼛속깊이 찌르는 어머님의 나에 대한 애닲은 사랑과 지고한 사랑과 축복의 말씀이셨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 두 부모님으로 부터 정말 내 인생에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가장 보배롭고 귀한 유언과도 같은 축복의 말씀을 받았고 난 두 부모님의 이 귀한 진리의 말씀을 늘 마음판에 굳게 새기며 그렇게 살아가려고 최선을 다해 나가고 있다. 그것이 비록 이미 소천하셨지만 생전 부모님의 나에 대한 희생과 사랑과 정성에 대한 보답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나와 나의 가정과 친척과 친구와 친지들과 이웃들과 나라와 민족과 세계에 이루는 귀한 삶의 자세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게 천금과도 비교할 수 없이 귀한 축복의 말씀을 해 주신 분은 전 서울시 구로구 고척동의 고척교회 김제건 전 담임 목사님의 결혼 주례사 후 기도시간에 해 주신 귀한 말씀이다. 그것은 김제건 그 당시 고척교회 담임 목사님께서 나와 아내의 머리위에 한 손씩 올리고는 축복기도를 하시는데 이 두 사람이 신앙으로 하나되어 '지상 최고의 행복한 믿음의 가정을 이루라' 는 귀한 축복과 은혜와 사랑의 메세지이셨다. 난 지금 우리 부부가 결혼을 한지 18년이 넘도록 이 귀한 김제건 목사님의 축복의 말씀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며 어떻게 하면 이렇게 귀한 말씀을 순종하여 그야말로 '지상최고의 행복한 믿음의 가정을 이룰 수 있늘까', 생각하며 늘 신앙생활과 삶에 있어서도 최선을 다해 나가고 있다. 엄마, 너무 염려하시지 마세요. 그리고 아버지도 너무 막내 이 홍병원이 너무 걱정하시지 마십시요. 저 지금 아내 신혜영과 아들 홍요셉과 함께 주어진 일들 잘 감당하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아버지 어머님 그리고 목사님께서 축복해 주신 금보다도 더 귀한 축복의 말씀들을 붙들고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 나가고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부디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편안히 잘 계시기 바랍니다. 저희들 아버지, 어머님의 마음 상하지 않게 꼭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 것이며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에 보답하며 온 나라와 온 국민과 온 세계 인류에게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서 보답하며 살도록 최선을 다해 나가겠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그곳 천국에서 평안하게 잘 계시면서 저희두 부부와 아들 요셉이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큰 기대와 희망을 가지기고 지켜 봐 주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아버지 어머님의 저에 대한 저의 가정에 대한 축복의 말씀대로 또 그때 결혼식 때 김제건 담임 목사님의 축복의 말씀대로 저의 가정 가문이 그렇게 될 것을 전 확신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부디 늘 건강에 유의하시고 그곳 천국에서 더욱 아름답고 복되고 행복하게 아버지와 어머님께서 함께 잘 사시기 바랍니다. 저희들 이곳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모든 일들과 사명을 다 감당한 뒤 반드시 아버지 어머님이 계신 그곳 천국으로 기뻐하며 달려갈 것을 굳게 약속드립니다. 늘 강건하시고 행복하세요.
아버지 어머니 이 다음에 주님의 때에 반드시 기쁜 맘 행복한 맘으로 건강한 영혼으로 찾아뵐 것을 다시 한번 약속드립니다. 대단히 고맙고 감사합니다.
불효막심한 막내 아들 홍 병 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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