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향화, "서강과의 인연, 서강이 맺어준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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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3-25 15:11 조회28,45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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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안수진 (10 경제)
인터뷰 _ 안수진(10 경제)
학창 시절 연극 무대를 누볐던 임향화(71 국문) 동문이 요즘 다시 국내 연극 무대에 올라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임 동문은 지난 3월 1일 발간한 서강옛집 인터뷰이였던 양희은(71 사학) 동문도 학창 시절 가장 기억 남는 친구로 첫 손에 꼽을 정도로 유명인사였습니다. 연극인 임향화 동문을 서강옛집이 만났습니다.
연극반 스텝에서 극단 주연배우까지, 연극인 임향화
“연극 때문에 서강대를 가게 됐답니다. 고등학생 때 명동극장을 지나가다가 누가 티켓을 줬어요. 서강대 영어뮤지컬 <OLIVER>였죠. ‘한국에서 이런 연극이 가능한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크게 충격 받았어요. 숙명여고 재학 당시 연극을 좋아해서 연극반을 창설하기도 했거든요. 이 연극을 보고 서강대학교에 가야겠다고 결심했죠.”
연극에 대한 열정 덕분인지 임 동문은 모교와의 추억 대부분을 서강연극반 기억에서 꺼냈습니다.
“2학년 봄에 <West Side Story>라는 연극을 하더라고요. 저는 중학교 때 영화로 본 내용이었는데, ‘Anybodys’ 역이 인상적이었죠. 이미 캐스팅이 끝나고 배우들 연습이 한창이었어요. 연극연출 담당 교수님을 무작정 찾아가서 ‘나 Anybodys역 참 잘할 수 있다’라고 말했어요.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그래도 교수님은 단번에 ‘오케이’를 외치셨죠.”
패기 넘치던 학생이 잡은 기회는 연극배우로서의 시작에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역할이 대히트를 치면서 명동 국립극장에 주연으로 섭외되기도 했습니다. 연극계를 주름잡던 전문배우들 사이에서 대학생이 기성극단 무대에 서는 일은 이례적이었습니다.
“학교와 기성극단에서 연극하면서 오태석 연출가를 만났습니다. 당시 <춘풍의 처>라는 작품에서 ‘처’를 맡아 2년간 전국에 발이 닿는 곳은 모두 찾아가서 공연했습니다. 환경이 열악하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죠. 이를 감수하면서 미친 듯이 연극에 몰입했습니다.”
경험과 기회의 땅, 이민자로서의 삶
결혼 이후 임 동문은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힌 나머지 연극을 뒤로하고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당시에 연극을 한다는 것은 주홍글씨처럼 ‘점잖지 않은 직업’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결혼 후 연극에서 완전히 떠나 있었어요. <춘풍의 처>에서 역할을 그만두고 난 후 다른 사람들이 그 배역을 이어갔지만 오태석 연출에게서 국제페스티벌 출품작만큼은 저와 하고 싶다는 요청이 왔어요. 1987년도 일본 토가 페스티벌이 결혼 후 10년 만에 연기한 작품이었죠. 그 후에는 진짜로 연극과 단절이 되었어요.”
뉴욕에서 임 동문은 한식레스토랑을 운영하며, 인기 식당으로 가꾸어 나갔습니다. 임 동문은 당시의 삶을 고생했지만 배울 점이 많았던 생활이었다고 회상했습니다.
“뉴욕생활에서 힘든 점이 많았습니다. 맨하탄에서 가장 힘든 사업이 요식업이라고들 합니다. 그때는 아무런 경험도 없이 맨 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시작했죠. 다행히 뉴욕타임즈 같은 미디어에서 좋은 기사를 써주고 단골도 점점 늘어났습니다. 고생은 했지만 느끼고 배우고 즐기는 게 가능했어요. 사람들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틈날 때마다 연극이나 콘서트를 관람하기도 했어요. 저에게는 고생 반, 공부 반의 경험들이었습니다.”
연극에 대한 미련 탓인지, 연기에 대한 열정 탓인지 2019년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Happy Cleaners>라는 독립영화의 주연으로 캐스팅이 된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마음을 닫은 지 얼마 안 되어 친구에게 연락이 왔어요. 영화에서 엄마 역할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감독도 제작자도 저를 반겼습니다. 처음엔 제가 주연이 아니었는데 촬영하다 보니 제가 주연이 되어 있더라고요. 영화 예산이 모자라 모금운동을 해가며 가까스로 편집을 마쳐 영화제에 보냈는데 반응이 좋았습니다. LA영화제에서는 없던 상을 만들어서 특별상을 줬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관객상을 줬죠.”
이어 “저는 연기할 필요가 없었어요. 그저 제 자신이 되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삶을 40년간 살아왔으니까요”라고 미국 이민자로서의 삶과 애환을 덧붙였습니다.
“미국에서 자녀를 키우고 식당을 운영하면서 직접 경험한 삶이 있었어요. 뉴욕 영화제에서도 감독이 ‘선생님은 정말 아이들 다그치고 혼내는 역할을 잘하신다’고 말하자, 제 아들이 ‘우리 엄마 실제로는 3배나 더 심해요’라고 답변하더라고요.(웃음) 보는 사람들마다 제가 마치 자기 엄마와 똑같다고 웃습니다.”
다시 시작된 연기생활, 서강으로 이어진 인연
2020년 1월 윤광진(74 신방) 연출의 <최인훈 연극시리즈>가 막을 올렸습니다. 3부작으로 이루어진 연극은 1월 메리홀에서 상연한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를 시작으로 5월 <달아 달아 밝은 달아>가 공연 예정입니다. 연극계에서는 임향화 동문의 반가운 귀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윤광진 연출이 서강대에 들어와서 처음 본 연극이 제가 출연한 <서쪽나라의 멋쟁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인상 깊었는데 서울에서 <Happy Cleaners> 시사회를 할 때 다시 저를 보고 결심했대요. 제가 오디션이라도 봐야한다고 요청했지만 윤광진 연출은 확신이 있었나봐요. 막상 무대에 오르니까 계속 같이 하자고 하는 거 보니 다행히도 큰 민폐는 안 끼쳤나 봐요.”
5월 선보이는 연극 <달아 달아 밝은 달아>에 대해 소개를 부탁드렸더니 여전히 심청이라는 인물에 대해 고민이 많은 눈치였습니다.
“70년대 작품이지만 최인훈 작가가 작품 안에서 지향하는 바와 표현하는 방식은 너무나 현대적이어서 놀랍습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심청전과 달리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잔혹하게 짓밟힌 심청의 삶을 재조명합니다. 정신이 오락가락해서인지 겪은 고통이 너무 커서 현실을 도피하고 있는 것인지, 본인이 겪어온 삶을 화려한 용궁에 비유해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심청의 모습이 나옵니다. 지금도 계속 수많은 물음표들이 던져집니다. 저조차도 정확한 답을 만들어 인물을 표현해야 하는 지, 아니면 열린 결말 속에서 관객들에게 물음표를 던지는 미지의 연기를 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입니다.”
임향화의 삶에서 서강대학교란?
“작고하신 국문과 김열규 교수님을 항상 존경해왔어요. 당시에는 아주 어렵고 날카로운 교수님이셨는데 괴발개발 써서 제출한 제 답안지에 A를 주셨죠. 한번은 여학생 문집에 잡문 하나 쓴 걸 읽으셨는지 ‘자네 글을 아주 잘 쓰더군’이라고 말씀해주신 기억이 납니다. 학교보단 연극이 우선이었던 학생시절, 제가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피해 다니기만 했는데 ‘자네는 명동에서만 볼 수 있다면서?’라며 말을 건네 주셨어요. 제게 나름 관심과 기대가 있으셨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학문적으로 배울 점이 많았던 대단한 분이셨죠.”
임 동문에게 전한 마지막 질문은 ‘서강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였습니다.
“사실 학교 다닐 때는 학교가 싫었어요. 교정도 작고 저에 대한 뜬소문도 있었죠. 소문난 잔치에는 먹을 게 없다고…. 실제 성격과는 달리 겉으로 제가 화려해 보였나 봐요. 당시는 어려서 상처를 많이 받고 대처하는 것도 힘들었어요. 그래도 서강은 항상 제 자랑이었고 제 자존감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제 겉모습을 보고 오해하는 분들에게 그래도 서강대 출신이라고 하면 무게중심이 잡히는 게 있었어요. 그래서 졸업 이후에 학교에 대한 긍지가 더욱 높아졌답니다.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임향화 동문이 출연하는 연극 <달아 달아 밝은 달아>는 5월 5일부터 5월 10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선보입니다. 예약 문의 010-2368-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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