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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문학으로 삶을 데우다" - 우찬제(81 경제) 교수의 삶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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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5-09-13 19:21 조회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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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삶을 데우다    

동문이자 문학평론가로서 전하는 학문과 삶의 통찰

 

우찬제(경제 81) 모교 국어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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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찬제 문학평론가 겸 모교 국어국문학 교수. 그는 1998년부터 지금까지 28년차로 서강의 강단에 서서 후배들을 지도하고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물이 끓기 전 마지막 1도, 99도의 힘은 언제나 특별합니다. 뜨겁게 달궈진 시간과 노력이 모여 임계점을 앞둔 순간, 우리는 다음을 향한 긴장과 설렘을 동시에 느낍니다. 이번 호 서강옛집은 바로 그 자리, 499호에 섰습니다. 곧 다가올 500호의 새로운 전환점을 앞두고, 문학평론가 우찬제 (81 경제) 모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만나봤습니다. 그는 최근 제 70회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고 서강 동문의 인문학적 역량의 저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서강에서의 첫 발을 경제학도로 내딛고 결국 문학으로 길을 열어 온 그의 삶은 학문의 경계를 넘어, 천천히 그러나 끝내 깊게 끓어오르는 99도의 힘을 닮아 있었습니다.

 

 

Q1. 우 교수님께서는 모교 경제학과를 졸업하셨는데, 문학 평론이라는 길을 걷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A. 1970년대는 한국 경제가 고도 성장기를 맞던 시기였습니다. 경제학과는 시대를 주도하는 학문으로 주목받고 있었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서강대 경제학과에 입학했지만, 제 길은 조금 달랐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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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찬제 교수는 서강학보사에서 기사를 쓴 경험이 자신을 문학의 세계로 이끌었다 말한다.

 

저를 본격적으로 문학으로 이끈 것은 서강학보사에서의 경험이었습니다. 서강학보사에서 3년간 활동하면서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깊이 조사하고 소개하는 기사를 많이 썼어요. 그 과정에서 문학이 사회 구조적 문제부터 인간 내면과 무의식까지 모든 것을 다루는 종합적 학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문학은 복잡다단한 세상을 포괄할 수 있는 학문이었고, 저를 그 안으로 끌어당겼네요. 결국 석사과정 중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 평론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Q2. 학창 시절, 서강에서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A. 학부 시절을 돌아보면 무엇보다 서강학보 활동이 가장 큰 기억으로 남습니다. 1학년 때는 학내 취재부, 2학년 때는 문화부, 3학년에는 편집국장을 맡았지요. 이때, 문화면 <창작, 그 아픔의 뒤안길> 코너 기사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작가들과 직접 만나 함께 식사나 인터뷰를 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정호승 시인, 김원일 소설가 등 당대의 주요 작가들을 만났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울러 로욜라도서관의 개가식 경험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74년 개관과 함께 전면 개가식으로 운영된 로욜라도서관은, 학생이 직접 서가에 가서 책을 꺼내 볼 수 있는 자유를 주었습니다. 많은 학교가 폐가식이어서 사서를 거쳐야 책을 볼 수 있었는데, 서강의 개가식 도서관은 제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경제학 전공이었지만 늘 문학 서가로 향하곤 했네요. (웃음) 당시 자유롭게 책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제 삶의 방향도 달라졌던 것 같아요.


Q3. 문학을 평론하는 작업은 ‘읽고 쓰는 일’의 반복일 텐데, 그 과정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태도나 기준이 궁금합니다.


A. 모든 글은 저마다 특별하게 설계된 고유한 읽기 경로를 갖고 있습니다. 세상의 존재들이 비슷해 보이면서도 저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듯, 글 역시 그렇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같은 이야기도 다르게 풀어낼 수 있는 행운을 지닌 이들입니다. 이를테면 실연이나 삼각관계처럼 흔한 주제라도, 거기에 3%쯤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힘이 있죠. 문학평론은 바로 그 ‘다름’을 찾아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자세히 읽고, 깊이 숙고하며, 비판적으로 성찰하려고 노력합니다. 글을 고유하지 않은 것으로 대한다면, 영혼 없이 소비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 글만의 무언가가 있음을 믿고, 존중하며 읽어준다면 반드시 다가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Q4. 긴 시간 연구자로서 걸어오신 과정에서 ‘느림’은 어떤 의미였는지 궁금합니다.


A. 저는 원래 좀 느린 편입니다. 밥 먹는 것도 늦고, 책 읽는 것도 느리고, 글 쓰는 것도 더디지요. 충청도 출신이라 그런가 싶기도 합니다. (웃음) 촌철살인의 빠른 평론가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때로는 저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학부 때부터 더 공부한 사람들은 저보다 훨씬 앞서 나가 있을 텐데, 저는 그게 아니라 늘 후발주자라는 생각을 하니 조바심이 났습니다.


하지만 인생이 꼭 속도가 빠른 사람이 이기는 경주는 아니더군요. 시골의 농사짓던 집안에서 자라서 그런지, 저는 늘 소와 쟁기 비유가 떠오릅니다. 넓은 밭을 갈 때 소는 아무리 재촉해도 자기 걸음대로 한 고랑씩 천천히 갑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밭이 다 갈려 있거든요. 제 글쓰기도 그렇습니다. 밭 가는 농부의 마음으로, 한 줄 한 줄 묵묵히 써왔습니다. 그 느린 걸음이 결국 지금의 저를 만들어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Q5. 오랜 시간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시며, 로욜라 도서관장으로도 활동하셨습니다. 교수님께 도서관장이던 시간은 어떤 의미였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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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찬제 교수가 로욜라 도서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그에게 로욜라 도서관은 배움과 영감의 원천이었다.


A. 로욜라 도서관장직을 8년간 맡았습니다. 로욜라 도서관장으로서 보낸 8년은 제게 또 다른 배움의 시간이었습니다. 로욜라는 제게 ‘꿈의 터전’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없는 것이 없지요. 없는 것이라고는 ‘없음’ 뿐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그것을 확인하고 열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저는 도서관이 단순히 책을 보관하는 곳을 넘어, 미래 인재들이 창의력을 키우고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는 발전소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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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욜라 도서관 개관 50주년 기념 표지석. LOYOLA의 이니셜을 따서 세상의 빛이 될 서강의 인재들이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작년 2월 22일, 로욜라 도서관 개관 50주년을 맞아 기념 표지석 아래에 새긴 메시지도 그런 뜻을 담았습니다. “세상의 빛이 될 미래 인재들의 창의 발전소,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길.” 제게 로욜라는 그런 공간이었습니다. 학부생으로 공부하던 시절에도, 도서관장이던 시간에도, 늘 그렇습니다. 8년간의 도서관장 생활은 제 연구 인생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귀한 시간이었고, 지금도 그 의미가 제 안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Q6. 최근 대한민국 예술원상 문학 부문을 수상하셨는데, 이 상이 교수님의 학문 여정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궁금합니다.


<동문소식> 우찬제(81 경제) 동문, 제 70회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A. 무엇보다 감사한 일입니다. 이전의 상들이 특정 작품이나 책을 근거로 주어졌다면, 이번 예술원상은 제 생애 전체의 업적을 바탕으로 평가받은 것이기에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문학평론가로 걸어온 길을 종합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오고, 동시에 더 겸손하게 정진해야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사실 저는 상을 받는 일에 오래 머무르지 않으려 합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시상식에 잘 가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조수가 왜 가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시상식에 갈 시간이 없다. 나는 또 다른 발명과 실험을 해야 한다.”라고 답했다고 하지요. 저 역시 그 말에 공감합니다. 상은 지나온 길의 결과일 뿐,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 이어갈 작업이니까요.


노자의 도덕경에도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공을 이루더라도 그 자리에 머물지 말라는 뜻입니다. 새로운 길을 떠나야만 새로운 글도 나올 수 있고, 작가들도 계속 글을 쓰는 것처럼 평론가 또한 멈추지 않고 계속 써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상은 저에게 하나의 쉼표라기보다, 더 멀리 나아가라는 격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Q7. 앞으로 교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학문적 또는 평론가로서의 목표가 궁금합니다.


A. 제가 오래 고민해 온 주제는 문학과 인문학의 공공성입니다. 문학이 단순히 텍스트 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통로가 되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공 인문학의 실천, 생태 비평, 기후 위기, 정의와 환경 문제 같은 담론에 더 주목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생태학적 상상력과 녹색 수사학』이라는 책의 집필을 통해 기후 문제를 다루었고, 올 하반기에는 『기후 정리와 생태 비평』이라는 책을 출간할 예정입니다. 

지구의 역사를 보면 은하계 운석 충돌 등 복합적 요인으로 다섯 차례의 대멸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단 한 종, 인간에 의해 새로운 대멸종이 일어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인류가 인류 자신을 멸종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주제를 더욱 깊이 천착하고, 실천의 영역으로 넓혀 가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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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초에 출판된 우찬제 교수의 『생태학적 상상력과 녹색 수사학』

 

해마다 더워지는 날씨 속에서 생태 비평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후배와 후손들이 조금은 덜 뜨겁고, 여전히 아름다운 지구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문학의 언어가 지구의 미래를 지키는 데 작은 힘이라도 보탤 수 있기를 바라며, 앞으로도 그 길을 걸어가고자 합니다.


Q8. 교수님께 서강은 어떤 존재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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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찬제 교수는 서강과 45년째 인연을 맺고 있다.


A. 서강은 제 인생에서 분리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올해로 45년째 이어지고 있는 인연이지만, 마치 늘 곁에 있으면서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족과 같은 존재라고 할까요.


캐나다 밴쿠버섬을 여행하다가 인상적인 광경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울창한 침엽수림 속에서, 큰 소나무가 베어진 자리의 밑동이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썩은 밑동 위로 새로운 소나무 씨앗이 날아와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더군요.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어 새로운 생명이 돋아나게 하는 나무, 이른바 ‘너스 트리(Nurse Tree)’였습니다. 저는 그것이 곧 모교 서강의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강은 작은 학교이지만, 자기 몸을 내어주며 학생 하나하나가 뿌리 내리고 자라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줬지요. 늘 고맙고 또 미안한 마음이 교차합니다.


Q9. 서강의 후배들, 동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나 조언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A. 사실 따로 해주고 싶은 말은 많지 않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미 로욜라 도서관 현판에 새겨 두었으니까요. 다만 굳이 한마디 덧붙인다면, '끝까지 가보라' 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AI가 모든 걸 요약해 주는 시대가 됐지만, 저는 여전히 느리게 읽고, 쓰고, 걸어가는 방식을 고집합니다. 돌이켜 보면 교수가 되기 위해 공부한 것도 아니었는데, 어느새 올해로 33년째 전임교수로 서 있더군요. 이번 학기까지 따지면 65번째 방학을 맞았습니다. 늘 방학 때는 ‘내일은 좀 쉬어야지’ 했는데, 어느새 또 개강이 와 있었네요.(웃음)


삶은 소가 쟁기를 끌고 한 고랑씩 밭을 갈듯 묵묵히 나아가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느리고 미련해 보일지 몰라도, 소중한 진실로 가는 길은 결국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사람에게 열립니다. 저는 후배들이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서강에서 경제학도로 출발해 문학평론가로 거듭난 우찬제 교수의 여정은 ‘읽고 쓰는 일’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정보에 익숙한 우리가 문득 잊고 살았던, 느리지만 꾸준한 걸음, 그리고 끝까지 인내해 보는 태도 속에서 그는 서강이라는 뿌리와 함께 새로운 길을 열어 왔습니다. 서강인에게 서강은 늘 기댈 수 있는 곳이자 또 다른 시작을 가능케 하는 터전임을, 화려하진 않으나 무게있는 그의 통찰의 과정이 다시금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글 | 오연지(23 신방) 서강옛집 기자, 서강옛집 담당 이수민(14 수학)

사진 | 우찬제(81 경제) 국어국문학과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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