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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자 모교 명예교수의 故 게페르트 신부 회고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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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3-09-26 10:09 조회14,1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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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많이 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의 입이 머리보다 크지 않은지...  

43년 전 20대 풋내기 교수에게 미소로 '침묵의 중요성' 가르쳐

 

지난 7월13일 오후에 서강대학교 이냐시오관 성당에서 그 대학의 설립자이신 독일 예수회원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님의 일주기 추모미사와 동상제막식이 있었다. 그 때 고인이 동경 상지대 교수로서, 예수회원의 기숙사 사감으로서, 특히 일제 때 한국에서 유학 간 신학생들의 지도신부로서 그리고 서강대의 설립자로서, 얼마나 뛰어난 판단력과 모범적인 지도력을 보였던 분이었는지 여러 사제들이 그 분을 기리는 감동적인 회고담을 많이 술회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그 신부님이 얼마나 영적으로 뛰어난 성인 신부이셨는지, 그리고 엄격한 아버지, 따뜻한 어머니 같이 얼마나 큰 사랑을 듬뿍 주셨는지를 말씀하셨다. 나는 게페르트 신부님이 추기경님을 위해 서너 번이나 눈물을 흘리셨다니 추기경님은 복도 많으시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추기경님이 오늘의 추기경이 거저 되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훌륭하신 분의 간절한 기도가 늘 함께 하고 있었기에 가능했고, 한편 나는 우리가 왜 사제를 위한 기도를 열심히 바쳐야 하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추기경님이 일본 상지대 유학생이었을 때의 일이었다. 추기경님이 민족문제에 대해 일본 수도자와 언성을 높이면서 예민하게 논쟁을 벌였던 일이 있었단다. 그 광경을 보신 사감신부님이, 추기경님을 따로 조용히 불러 싸우면 안 된다는 꾸지람 대신, 너는 이 다음에 어떤 사제가 되고 싶으냐고 물으셨단다. 그래서 김추기경은 물론, 한국(그 당시는 조선)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고 하셨단다. 추기경님에게 신부님은 "너는 한국의 사제이기 이전에 하느님을 위한 사제가 되어야 한다"라고만 이르셨단다. 그 때 추기경님은 일본 수도자들과 어떻게 지내야 할지를 잘 이해하게 되셨단다. 아마도 그 신부님은 그 당시 상지대로 유학갔던 한국 사제들과 일본 수도자들 모두에게 기숙사 사감으로서 공정하고 따뜻하게 하기가 힘드셨을 것이다. 

 

그 후 추기경님이 민족적인 분노를 느끼면서도 원하지도 않는 일본 학도병으로 끌려 나가야만 했을 때, 그 젊은 신학생의 마음을 헤아려 달래면서 게페르트 신부님이 강복을 주시려고 그의 머리 위에 두 손을 얹어 놓으셨는데, 그 때 부들부들 떨던 신부님의 두 손을 감지 하셨단다. '아! 이 분이 나를 위해 우시는구나'하고 얼마나 그 분의 강렬한 염려와 사랑을 체험했는지 모른다 하셨다. 

 

그리고 두 번째는 김추기경님이 추기경이 되셨을 때 그 소식을 추기경께 첫 번째로 전해주시면서였고, 세 번째는 근년에 와서 추기경이 외국을 드나드실 때마다 당신의 영원한 지도신부를 뵈러 일본에 자주 들리시곤 했는데, 그 때마다 신부님은 한국과 추기경을 위해 매일 기도하신다며 눈물을 보이셨단다. 

 

나는 그 신부님을 1958년인지 59년에 서소문 예수회 사제관에서 처음 뵈었다. 별로 많은 말씀이 없으셔서 내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엄격한 분으로만 여겨져 늘 어렵고 조심스러워했다. 그러다가 서강대가 개교하고 그 분을 학교 복도나 교수회의에서 맞닥뜨리게 되어 내가 약간 주눅들은 학생 모양 조심스럽게 매무새를 만지작거리면서 내가 정중히 인사를 하노라면, 보일 듯 말 듯 미소로 조용히 답례하셨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매우 부드러운 눈길이었음을 알겠다. 그런데 나는 그 분을 서강 캠퍼스에서 그렇게 가까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어려워만 하고 그 훌륭한 분의 축복과 가르침의 체험을 놓치고 말았단 말인가 이제야 안타깝다. 그것은 일생일대의 아쉬운 놓침이다. 그래도 왠지 내가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면 저 높은 곳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실 분 같다. 

 

7월13일에 그 분의 동상 앞에서 그 분이 나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무엇이 있나 하고 나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40여 년이나 묵은 추억의 앨범을 뒤져 보았다. 드디어 나는 한 가지를 찾아내고 말았다. 그것은 1960년 공주 신학교에서 첫 번째 교수 세미나를 마치고 서울로 향하는 학교 지프차 속이었다. 내가 그 분께 교수 세미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여쭈었더니, 별 말씀 없이 고개를 갸우뚱하시더니, "어떤 때는 어떤 사람의 입이 그의 머리보다 큰 것을 보기도 한다."고만 하셨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했다. 나는 신부님이 나에게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말라는 것인지, 교수회의 때 말 많았던 사람들에 대해 못마땅하다는 말씀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교수회의 때도 항상 말씀이 별로 없었고 말 많이 그것도 막하는 사람을 그저 바라만 보시곤 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그런 사람들을 흉보거나 꾸짖거나 원망하는 일도 없으셨다. 

 

후일 내가 이해하게 된 것은, 일찍이 당신께서 1950년 초부터 노기남 대주교님의 요청으로 한국에 오셔 대학교 창설을 위해 터를 사고 교육인가를 받느라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쏟으셨는데, 도중에 한국 위스콘신 관구 예수회원이 학교 운영을 맡게 되어 한국을 떠나셔야 했을 때, 인간적인 아쉬움이 컸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운한 내색 없이 한결같이 한국과 서강에 대한 애정을 몸으로 보여주신 계기는 여러 번 있었다. 그런 점이 그 분을 훌륭한 성인 수도자로 인정하기에 충분하다고 여러 사람들이 말한다.

 

이상하리만큼 나는 이 날이 되도록 그 때 그 신부님의 그 표정 그 말씀을 가끔 떠올리곤 한다. 특히 내가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을 갖다보니, 혹시 남의 말을 경청해야 할 때도 내 말을 내세운 일은 없었는지, 말할 때는 머릿속에 넣은 것도 없고 생각도 없이 내 입만 키웠는지, 잠깐 멈추고 그 떄 그 신부님의 말ㅆ므을 생생하게 떠올릴 때가 있다. 나는 그 때 내가 무슨 옷을 입고 신부님의 어느 위치에 앉으셔서 그 말씀을 하셨는지 잘 기억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이게 주신 충고의 말씀 같기도 하고, 꾸중의 말씀 같기도 해서 그 신부님 얘기만 나오면 나는 엄숙해진다. 이제야 비로소 그 말씀은 나에게 주신 가르침으로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 분의 몸은 서강을 떠나셨어도 마음은 서강과 늘 함께 하시는 분이다. 그 분은 서강대에서 큰 일이 있을 때마다 기꺼이 오셔서 서강의 발전을 기뻐하시곤 했다. 그러나 이젠 오가는 수고를 더 이상 하실 필요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영혼은 시공을 초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끝내 당신의 유골도 서강 언덕에 묻히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강의 영원한 아버지, 그는 한없이 인내롭고 겸손했고 잔잔한 미소로 사랑을 살아낸 사제요 교육자였다.

 

김인자 한국심리상담연구소 소장,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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