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에서-성수선(92.독문) 삼성정밀화학 영업1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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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6-07-29 13:11 조회14,48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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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미녀 스파이’의 꿈
성수선(92․독문) 삼성정밀화학 영업1팀 과장
어렸을 때 내 꿈은 "미녀 스파이"였다. 그 땐 한참 <미녀 삼총사>, <미녀 첩보원> 같은 시리즈 외화들이 인기였고, 난 TV에서 그런 영화들을 보며 열광했다. 그녀들은 하나 같이 너무 멋졌다. 난 TV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결심했다.
"어른이 되면 나도 미녀 스파이가 될꺼야!"
유감스럽게도 난 "미녀 스파이"가 되지 못했다. 어렸을 때의 로망을 접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해외영업"이다. 영화에서처럼 잠수함을 타고 잠입하거나 위조여권으로 적국에 들어가거나 하지는 않지만, 10년째 해외영업을 하면서 여권 두 권이 너덜너덜해질 만큼 출장을 다녔다. 내 여권에는 스리랑카부터 핀란드까지 세계 각국의 알록달록한 도장들이 촘촘하게 찍혀 있다.
나의 일터는 삼성정밀화학. 메틸아민계 유도체들을 수출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출장 길에 비행기 옆 좌석에 앉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하곤 한다. "출장 가세요? 어떤 제품 하시는데요?" 난 잠시 대답하기를 망설인다. 소비재가 아니라 말해도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화학제품이라고 뭉뚱그려 대답하면 또 이런 질문을 한다. "여자분이 화학을요? 전 패션 같은 건지 알았는데...허허. 화학 전공하셨어요?"
일을 하며 정말 많이 듣는 질문이다. 난 전형적인 문과생으로 독문학을 전공했다. 대부분의 유능한 영업사원들은 고객을 감동시키는 기민하고 넉살 좋은 ‘전공불문'자이다. 화학영업도 마찬가지다. ‘구매담당자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얼마나 감동시키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나에겐 일본부터 필리핀, 이탈리아, 독일, 이스라엘, 저 멀리 섬 나라 타히티, 파푸아 뉴기니까지 수 많은 나라에 소중한 친구들이 있다. 일을 하며 만나는 많은 고객과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라는 책 제목처럼 소중한 친구들을 하나하나 소개하고 싶지만, 필리핀의 노니에를 소개한다. 노니에의 첫 한국 출장 때, 난 초청장 발행을 위해 여권번호와 생년월일을 물어봤다. 노니에의 생일은 우리 회사와 미팅하는 날의 3일 후였다. 미리 축하해주려고 궁리하다, 알록달록한경단들이 예쁘게 쌓여 있는 떡 케이크를 주문했고, 한정식집에 미리 맡겨 후식 때 초에 불을 켜 같이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
즐겁게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불이 꺼지고, 앙증맞은 경단 위에서 작은 초들이 반짝이는 떡 케이크가 들어왔다. 노니에의 눈이 글썽였다. 필리핀으로 돌아간 노니에는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온몸으로 느낀 잊지 못할 생일 선물'이라며 메일을 보내왔다. 이처럼 작은 배려가 고객을 감동하게 하고 고객과 친구가 될 때, 난 행복하다.
어떤 일터에나 스트레스와 고된 일상이 있다. 때로는 스트레스로 터져 버릴 것 같지만, 해외영업을 계속 하는 건 이같은 행복이 일상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많은 나라를 여행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오랫동안 몸에 남아있던 문화적 편견을 깨뜨리고 새로운 세상에 눈뜬다. 어릴 적 꿈처럼 미녀 스파이는 되지 못했지만, 다양한 친구를 선물해주는 지금의 내 일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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