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 CEO를 찾아서-인텔코리아 사장 이희성(81.전자)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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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5-08-02 18:54 조회20,04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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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소통의 힘, 비즈니스와 연극은 닮은 꼴"
컴퓨터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로고가 있다.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 이는 단순히 인텔의 부품이 제품에 내장됐다는 의미가 아니다. 제품의 성능을 세계적으로 공인하는 '품질증명서'와 같은 역할을 한다. 세계 최강의 반도체업체, 인텔은 전 세계에 판매되는 80% 이상의 컴퓨터에 부품을 공급할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지난 4월, '끊임없는 기술 혁신의 상징' 인텔의 한국 지사에 활기를 불어넣는 신임 CEO가 등장했다. "한국을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를 주도할 거점으로 만들겠다"고 밝힌 이희성(81.전자) 동문이 그 주인공.
따가운 여름 햇볕이 내리쬐던 7월19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대한투자신탁빌딩 5층 인텔코리아 사무실에서 이 동문을 만났다. 40대 초반의 젊은 CEO답게 그는 '열린 경영인'의 모습, 그대로다. 직접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손님을 대접하고, 직원들에게 상냥하게 인사를 건넨다. 남성 패션지에서 볼 법한 깔끔한 인상, 격의 없는 의사소통을 중시하는 매너…. 기존의 CEO 하면 떠오르는 무거운 권위의식을 그에게선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 동문은 1991년 인텔코리아에 네트워킹 엔지니어로 입사해 한국은 물론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영업, 마케팅에 걸친 다양한 분야의 업무를 수행해왔다. 1999년에는 30대의 나이에 이사로 승진, 인텔코리아의 채널영업부문 이사와 통신제품영업부문 본부장을 역임했다. 특히 2004년 4월부터 1년간은 아시아태평양지역 마케팅 및 영업 총괄 전무로서 아태 지역 통신사업 성장을 주도했다. 인텔의 전통 영역인 마이크로프로세서 관련 업무가 아닌, 통신 부문에서 줄곧 이력을 쌓아온 그가 어떻게 CEO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이 동문에게 사장이 된 소감을 묻자,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대답이 돌아온다.
"먼저 인텔코리아의 사장으로서 한국 산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인텔은 완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이 아니라 부품 생산 업체인 만큼, 국내 여러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고 있습니다. 디지털 융합을 위해 한국의 무선통신 업체, 가전(家電)업체와 손잡고 공동 연구를 진행하는 것은 물론, 칩셋의 생산을 위해 한국 업체에게 하청을 주기도 합니다. 인텔의 발전은 곧 국내 산업의 성장과도 직결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본사가 제게 큰 임무를 맡긴 이유는, 아마도 한국의 통신 사업, 나아가 아태 지역의 사업을 총괄하면서 보여준 성과 때문이겠지요. 인텔이 컴퓨터의 핵심부품인 중앙처리장치(CPU)를 생산하던 기업에서 인터넷 ‘플랫폼’ 제공업체로 거듭나며 통신 부문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중요한 요인입니다.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를 준비하는 인텔의 전략을 적극적으로 주도해 나가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전 세계에 23개의 공장을 세운 글로벌 기업인텔에서 한국의 위치는 얼마나 될까. 사실, 한국은 중국이나 인도만큼 큰 시장도, 타이완이 지닌 기술 경쟁력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잠재적 가능성’ 만큼은 어느 국가도 한국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것이 이 동문의 생각이다.
“솔직히 말해서, 한국을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거점이라고 말하긴 힘들어요. 땅 크기나 인구수가 중국과 인도에 결코 못 미치고…. 그러나 중요한 것은 컴퓨팅, 통신, 가전이 하나로 융합되는 컨버전스 시대의 글로벌 리더로서 한국의 위상이 증대됐다는 점입니다. 신기술을 빠르게 흡수한다는 측면에서 한국은 성장 원동력을 지닌 매력적인 시장이에요.”
인텔 하면 흔히 떠오르는 것이 바로 ‘무어의 법칙’이다. 인텔의 창립자 무어가“반도체에 집적된 트랜지스터의 수는 18 ~ 24개월마다 2배씩 증가한다”고 말한 데서 유래한 이 법칙은 지금까지 한 번도 깨지지 않고 유지돼 왔다. 이 배경에는 ‘어려운 시기에 더욱 투자를 강화한다’는 원칙하에 끊임없이 이어져온 인텔의 기술 투자가 있었다.
그 결과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부문 세계 시장 점유율은 90%에 육박한다. 데스크톱 PC용 마이크로프로세서(인텔 펜티엄4 프로세서), 노트북용 마이크로프로세서(모바일 인텔 펜티엄4 프로세서), 인텔 펜티엄4 프로세서용 칩셋 제품군, 플래시메모리(인텔 스트라타플래시)는 모두 세계 1위 품목이다. 세계경제의 흐름을 바꾼 컴퓨터와 인터넷 혁명을 가능케 한 기술을 개발한 인텔의 저력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인텔의 기술 혁신은 엄격한 제조 및 관리 프로세스와 우수한 인적 자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요. 인텔의 전 사원들은 ‘고객 중심, 결과 중심, 위험 감수(risk taking), 품질, 훈련(discipline), 일하기 좋은 직장 만들기’ 라는 6대 경영 원칙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이 원칙은 효율적인 조직 관리와 높은 생산성으로 이어집니다."
브랜드가치 세계 5위를 자랑하는 ‘인텔’의 기업사만큼이나, 빠른 승진을 거듭하며 CEO 자리에 오른 이 동문의 개인사도 흥미롭다.
“사실, 1988년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간 첫 직장이 금성전기(LG정보통신의 전신)였어요. 군사용 무전기를 만드는 엔지니어였는데, 3년째 그 일만 하다 보니 가슴이 답답해지더군요. 제 커리어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이 이직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였어요. 인텔에 입사한 초기에는 역시 엔지니어로 일했지만, 1997년 싱가포르에서 통신 제품을 판매하는 등 이후에는 줄곧 마케팅 및 영업 업무를 담당했어요. 연구원 시절 쌓은 지식을 바탕으로, 세계인에게 제품의 우수성을 알리고 그들을 설득하는 작업은 정말 흥분되는 일이었습니다. 비즈니스에서 무엇보다 영어 실력이 관건이었는데, 서강대에서 충실하게 받았던 영어 교육이 사회생활의 큰 밑거름이 됐어요.”
대학 시절 이야기를 꺼내자 그의 얼굴에 더욱 화색이 돈다. “2.0에 수렴하는 학점으로 졸업했고, 사회는 암흑기였다”면서도 그가 대학생활을 그토록 소중하게 추억하는이유는 바로 ‘서강연극회’ 활동 덕분이다. ‘IT기업의 CEO와 연극배우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다’는 필자의 말에 이 동문은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비즈니스는 연극과 같습니다. 연출자와 배우들의 활발한 커뮤니케이션과 협조 속에 하나의 연극이 탄생하듯, 비즈니스도 수많은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이뤄지기 때문이지요. 인생의 여러 가지 측면을 볼 수 있다는 공통점도 있고…. 연극을 하는 사람은 나름의 ‘끼’가 있어요. 독특한 개성과 천재성이 있어 그런지, 어떤 분야에서든 두각을 나타내는 것 같아요.”
그가 활동했던 ‘서강연극회’는 당시 르네상스를 구가했다. 현재 한국의 문화계를 주름잡는 짱짱한 인물들이 그의 이야기 속에 등장한다.
“1982년, 회사를 다니던 문성근(72·무역) 선배가 동아리로 돌아왔어요. 카리스마 넘치는 선배의 모습은 늘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참, 정한용(74·경제) 선배와의 악연(?)도 있군요. 1981년 말, 정 선배가 연출한 ‘회전목마’에서 주인공을 맡기로 돼 있었는데, 나중에 결국 조연으로 밀려났거든요, 하하. 제대하고돌아와 만난 이정향(83·불문) 후배는 터프한 유머를 구사하며 남자 선배들을 휘어 잡을 만큼 입심이 대단했죠.”
그는 치열한 20대의 한 때를 연극에 쏟아 부었지만, 연극배우를 직업으로 택하진 않았다. 예술적으론 충만하지만, 금전적으로 고달픈 그 생활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다. 그러나 무대에서 연기를 펼치고, 동료들과 공동 작업을 하며 쌓아온 소중한 경험들이 지금의 이희성 동문을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이 인터넷과 통신, 모바일 기기들의 핵심시장으로 자리 잡으며 인텔코리아의 위상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사장 취임 3개월째를 맞은 이희성 동문의 가장 큰 바람은 인텔코리아가 통신 분야에 있어 세계 1위로 우뚝 서는 것. 직원들에게 자신의 뚜렷한 경영 비전을 제시하고, 수평적 의사소통을 중시하는 젊은 CEO의 힘찬 날개짓을 보며, 그 목표가 이뤄질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든다.
이남희(98·영문) 동아일보 월간 신동아 기자·본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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