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듣는 은사님 명강의⑥ 김열규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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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4-10-25 17:10 조회17,33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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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존중하고 자연과 친구가 되자"
김열규 선생님의 근황을 소개해 달라는 서강옛집의 요청을 받은 이틀 후 선생님을 뵈었다. 하동과 산청을 같이 가기로 약속을 해 두었던 터였다. 김병욱, 안숙원 선배님, 곽진석 교수도 동행했다. 가을 투명한 햇살 속, 선선한 바람에 적당히 나부끼는 은색 머리카락, 푸른 색 남방차림의 선생님을 멀찌감치서 뵙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선생님, 청년같으시다’라고 우리끼리 수군거렸다. 서울계실 때 천식으로 고통스럽게 기침을 하시던 모습, 허리디스크로 연구실에 누우신 채 강의하시던 모습을 기억하는 우리 동문들에게 ‘기적’같은 일이다.
“내가 서울 그대로 있었으면 아직 살아있었을까? 어깨에 힘 줄 일도 없고, 긴장할 인간관계도 없으니까... 이렇게 살면서 건강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서울 생활을 회고하시면서 가끔 하시는 말씀이다. 서울을 떠나 고향인 고성으로 귀향하신 지 벌써 12년째. 한 걸음 뒤편에서 넉넉하게 세상을 관조하고 계시는 선생님께선 이제 중년이 된 제자들에게 ‘황혼관리법’을 몸소 가르쳐 주시는 것 같기도 하다. 서울을 떠나 고성으로 내려가신다고 충격적인 귀향선언을 하셨을 때 선생님의 경해에 접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에 우리 모두 얼마나 서운해하고 야속해하였던가. 그러나 햇살과 바람에 몸을 맡기고 흙길을 밟으며 사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젊은 우리들이 부끄러울 정도로 왕성하게 저술활동을 하시는 그 모습을 뵙노라면 당시의 선택과 결단 앞에 숙연할 따름이다.
지난 번 선생님의 전용 산책로이다시피한 고성군 대가면의 깊은 산 속 숲길을 함께 걸으면서도 선생님의 잰걸음을 뒤에서 허겁지겁 뒤따르면서 부끄럽기 조차했다. 그 뿐 아니다.“자네 이 꽃 뭔지 아나?” 야생화를 가리키면서 자상하게 설명해 주시는데도 듣곤 또 잊어버린다. 누가 그랬던가. 아직도 학문에 관한 한 ‘바람둥이’랄 만큼 지적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하는 ‘청춘의 노학자’라고 말이다.
선생님께선 매주 월요일 고성군 하일면 댁에서 대구 계명대까지 왕복 320킬로의 길을 직접 운전하신다. 2년 전 정년을 하신 김해 인제대학까지의 거리보다 약 1.5배가 먼 곳이다. 계명대학에선 한국학연구원원장과 한국문화학부의 석좌교수직을 맡고 계시면서 매주 지역 주민과 교수들까지 수강하는 공개강의를 하신다. 지난 5월에는 선생님께서 기획하셔서 ‘두드림’이라는 주제의 국제학술대회도 마련되었다. “‘내가 누구냐?'를 묻지 않고 태평스럽다면 백치이고, ‘한국인은 누구냐?'를 묻지 않고 배긴다면 그 사람은 ‘천치'다" 라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에겐 장구의 두드림, 타작의 도리깨질, 여인의 다듬이질이 예사로운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들로부터 한국문화의 심층에 깔려있는 ‘復音’을 기조강연에서 흥미롭게 발표하신 바 있다.
최근엔 『한국인의 화』라는 제목의 책을 내셨다.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면 한국인은 ‘불’의 기운이 강한 火人이어서 화병이라는 ‘지역 특산’의 정신장애가 있는 민족인 동시에 온돌을 이용하고 서로 따뜻하게 보듬어 주는 온기의 민족이기도 하다. 그럼 火門을 넘어 和門으로 가는 방법은? ‘和로 化하는 火’로 화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 자신을 잘 다스리고 타인을 존중하면서 자연과 친구가 되라고 타일러 주신다. 머리로 이해는 되지만 그래도 도무지 화가 풀리지 않는 일이 생겨났다면? 보드라운 흙길을 밟으며 땀이 밸만큼 빠른 걸음으로 오솔길을 걸어보자. 그러다 양지녘에 이르면 겉옷을 모두 벗고 바윗등에 앉아 맨살로 햇볕을 받아 보자. 선생님께서 최근에 가르쳐주신 풍욕법으로 말이다.
박재섭(76.국문) 인제대학교 인문문화학부 교수
김열규 교수님은...
경남 고성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거쳐 동대학원에서 국문학 및 민속학을 전공했다. 충남대학교 문리과대학 조교수, 서강대학교 문과대학 교수, 하버드대학교 옌친연구소 객원교수, 인제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원장으로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한맥원류>,<한국인 우리들은 누구인가>, <맺히면 풀어라-한국인의 신명>,<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등이 있다.
내가 본 김열규 선생님
1964년 2월 하순경 교양 국어 시간에 나는 김열규 선생을 처음 만났다. 그때 나는 철학과에 입학해서 아마 사학과 학생들과 40여명이 수강을 했었다. 선생님의 첫인상은 안경 너머에서 우리를 응시하는 것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항상 자신만만한 선생에게 도전을 했으니 펄펄 뛰는 모습은 오늘날에 민망스럽기 그지없다. 김진섭 선생의 수필 “창"을 당신은 4단 구성이라고 하셨는데 그게 3단 구성이 아니냐고 촌놈식으로 퉁명스럽게 반론을 편 것이 탈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기화로 해서 김선생과 나는 친하게 지냈다. 그렇게 2학년 2학기 때 사학과로 전과한 내가 3학년 1학기말 국문과로 최종 전과를 했으니 선생과의 만남이 나의 진로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김열규 선생은 김완진 선생과 더불어 서강 국문과의 산파역이셨고 우리 학생들을 학문의 길에 들게 하는 조련사 역할을 훌륭히 해내셨다. 지금도 국문학계에서는 “서강학파"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부른다. 다른 대학과는 무언가 다른 학풍은 은연중 우리 졸업생의 자긍심이 되었다. 그리고 그 자긍심의 원점에는 항상 김열규 선생이 있었다.
선생께서 서강을 떠나 인제대로 낙향하시고 나니 왠지 서강에 발걸음이 뜸해졌다. 아마 정년도 되기 전에 고향 고성군 하일면 송천리로 낙향하신 것은 선생이 천성적으로 자유인이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나는 선생에게서 자유인의 그 본성을 배웠다면 좀 외람된 말일까? 그런데 나는 충남대 한 곳에서 30여 년의 세월을 보냈으니 선생의 진정 제자가 될 자격이 없나보다.
나는 선생을 따라 많은 산행도 같이 했다. 특히 1966년 11월 희방사에서 연화봉까지의 등산은 한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눈보라 속에서 고생을 했는데 그때의 광경은 지금도 너무나 생생한 추억이다. 결국 다시 희방사로 뒤돌아와 눈보라를 피하고 나서 연화봉에서 비로봉까지의 산행은 정말 잊지 못할 추억이다. 특히철쭉에 맺힌 얼음 조각들은 하나 하나가 영롱한 보석이었다. 비로봉정상에서 10여 미터 떨어진 움푹한 장소에서 딸꾹질을 해가며 깎아 먹던 희방사 무의 맛은 나나 선생에겐 영원히 잊혀지질 않는 추억거리리라.
문득 뒤돌아보니 40년이란 세월이 순간적으로 흐른 것 같다. 아직도 문학 청년같은 선생의 그 풋풋한 문학에 대한 정열을 보면 선생은 영원한 현역이며 자유인이다.
김병욱(74.국문) 충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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