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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산에 묻혔던 순교성인 3인 현양비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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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6-15 17:01 조회10,7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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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 추기경과 김호연 총동문회장이 순교 성인 현양비를 배경으로 기념촬영했습니다.
 


‘순교 성인 3인 현양비 축성식’이 6월 15일 오전 11시 가브리엘관 앞 소나무 밭에서 거행됐습니다. 순교 성인 3인이란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 와 선교활동을 벌이다 순교한 프랑스인 신부 엥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땅 신부 등을 가리킵니다. 

 

이들을 기리는 현양비가 모교에 들어선 까닭은, 모교 뒷산인 노고산 일대가 기해박해 당시 새남터에서 순교한 신부들의 유해가 1839년부터 1843년까지 묻혀 있던 유서 깊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1984년에 이르러 신부들은 성인으로 시성됐고, 그 뒤 삼성산에 묻히셨다가 현재는 명동성당 지하묘지에 유해가 안장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사적인 의미를 지녔기에 모교 교정에 세 분 성인을 기리는 현양비를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정진석 추기경이 주례를 맡은 이날 축성식에는 유시찬 이사장, 김호연(74 무역) 총동문회장, 손병두 총장, 신원식 예수회한국관구장 등 교내외 관계자들이 참석했습니다. 정 추기경은 강론을 통해 한국 가톨릭의 초기 전래 과정을 설명했고, 성수로 현양비를 축성했습니다.

현양비는 가로 1미터, 세로 2미터 크기의 비석으로 성인의 얼굴을 본뜬 브론즈(청동) 부조가 꾸며져 있습니다. 이춘만 조각가가 비석을 조각했으며, 김남조 선생은 글을 담았습니다. 신자들이 현양비 주변에서 기도할 수 있도록 돌로 만든 의자 12개도 주변에 조성했습니다.
 

이번 현양비는 이관진 샤프전자 회장이 출연한 1억원의 기금 덕분에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순교 성인 세분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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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베르 주교 (원어명  Imbert, Laurent Marie Joseph)

Imbert, Laurent Marie Joseph(1796∼1839). 성인(聖人). 한국명 범세형(范世亨). 축일은 9월 20일.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조선 교회의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가 조선 입국을 앞두고 갑자기 선종하자, 로마 교황청은 제2대 교구장으로 중국 사천성(四川省)에서 전교 중이던 앵베르 신부를 임명하였다. 이에 1837년 5월 14일 카프사의 명의주교로서 조선교구의 주교로 서품되는 성성식을 가진 다음 곧 임지인 조선으로 떠났다. 그는 1796년 4월 15일 프랑스에서 태어나, 1819년 12월 18일 외방전교회의 신부가 되어, 다음 해 3월 20일 파리를 떠나 중국 사천교구로 가서 전교활동 중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그 때의 나이 42세였다.

그는 곧 중국대륙을 횡단하여 1837년 12월 17일에 봉황성 변문에 다다라 이튿날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고, 13일 후에는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이로써 그는 조선땅을 처음 밟은 주교가 되었고, 조선교구는 교구 설정 6년만에, 그리고 조선 교회 창설 53년만에 비로소 모든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그보다 앞서 입국한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 및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신부와 힘을 합쳐 전교에 힘쓴 결과 1839년 초에는 신자수가 9,000명을 넘게 되었다.

한편 조선인 성직자양성을 서둘러 이미 모방 신부에 의해 세 소년을 마카오로 보내 교육받게 한 바 있으나, 다시 세 명의 소년을 유학시키고자 적당한 인물을 물색하는 한편, 정하상(丁夏祥)과 이승훈(李承薰)의 손자인 이재의(李在誼) 등 네 사람의 성인(成人)을 뽑아,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빠른 시일 안에 신부로 키우고자 하였다. 그리고 외방전교회의 방침에 따라 일본에도 전교의 손을 뻗고자 여러 가지로 시도했으나, 모든 계획은 얼마 안 가서 일어난 1839년의 기해(己亥)박해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1839년 주교는 지방교우들을 돌아보고 있었는데, 주교의 입국 사실이 당국에 알려져 교우들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되고, 주교를 추적하는 포졸들의 수색이 더욱 심해졌으므로, 주교는 하는 수 없이 수원에 가까운 바닷가 교우집에 몸을 숨겼다. 여기서 그는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를 불러 중국으로 몸을 피하도록 하였으나, 그들이 함께 남아 있기를 원했으므로 하는 수 없이 몸조심을 당부하며 맡은 지방으로 각각 되돌려 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에 의해 그의 거처가 알려졌음을 알고, 그는 화가 다른 교우들에게까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나아가 포졸들에게 몸을 맡기었다. 

 

이어 얼마 뒤 자수한 모방, 샤스탕 신부와 함께 1839년 9월 21일 군문효수라는 극형을 한강 새남터에서 목을 잘리어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44세로 조선에 입국한 지 불과 2년 만이었다. 그의 유해는 처형된 지 20여일이 지나서야 교우들에 의해 몰래 지금의 노고산(老姑山)에 묻혔다가 1843년에 경기도 과천으로 옮겨 묻었던 것을, 1901년 11월 2일 서울 명동의 주교좌 대성당 지하실에 모시게 되고 1925년에는 복자(福者)의 영광된 자리로 올림을 받게 되었다. 그 뒤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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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 신부 (원어명  Maubant, Pierre Philibert)
Maubant, Pierre Philibert(1803-1839). 파리 외방전교회원. 조선교구 선교사. 순교 성인. 축일은 9월 20일.

한국명은 나백다록(羅伯多祿)이다. 프랑스 바시(Vassy)에서 태어나 1829년 5월 13일 신부가 되었다. 잠시 교구에서 보좌신부 생활을 한 후 1831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이듬해 3월 중국 사천(四川) 교구 선교사로 임명되어 마카오로 떠났다. 그러나 도중에서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를 만나 조선 선교사가 되기로 자원하고 조선에 입국하고자 복건성(福建省), 북경(北京) 등을 거쳐 몽고의 서만자(西灣子)에 이르렀다.


그곳의 교우촌에서 1년간 머무르며 한문공부를 하였고 1835년 10월 20일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병사하자, 이미 그로부터 부주교로 임명되어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필요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바 있는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준비한 길을 따라 조선 입국을 서둘렀다. 조선국경에 이르러 조선 교우들을 만나 1836년초 입국하는데 성공함으로써 파리 외방전교회원으로서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가 되었다.

모방 신부는 조선말을 공부하면서 성사를 집전해야 했고 부활절을 서울에서 지내고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교우촌을 방문하고 200여명에게 영세를 주었다. 또 그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서두르고 이미 이 해에 김대건(金大建),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의 경리부로 보냈다.

1837년 샤스탕(Chastan, 鄭) 신부를 맞아 그와 함께 남은 공소들을 방문하였다. 새 공소를 세우고 공소회장을 세우는 등 교우들에게 필요한 지침들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는 동안 1837년 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입국하게 되어 조선교회는 이제 필요한 교회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또 교세도 급속히 신장되어 그의 입국 당시 4천 명에 불과하던 신자가 1837년 말 8천 명으로 급증하였다.

그러나 1839년 큰 박해, 즉 기해박해가 일어나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게 되었다. 이미 체포된 앵베르 주교는 모방과 샤스탕 신부에게 자헌(自獻)할 것을 권고하였고, 두 신부는 자헌을 결심하고 9월 6일 홍주(洪州) 근처에서 대기중인 포졸에게 자헌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모방 신부는 여러 차례 신문과 고문을 받고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와 같이 군문효수형이 언도되어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의 영관(榮冠)을 차지하였다. 

 

그의 시체는 20여일 동안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는 것을 교우들이 거두어 노고산(老姑山)에 안장하였고, 1843년에는 과천(果川)땅 삼성산(三聖山)으로 옮겨졌고 시복수속이 진행됨에 따라 1901년 명동성당 지하실로 옮겨졌다. 모방 신부는 앵베르 주교 등과 함께 1857년 가경자(可敬者)가 되었고, 1925년에는 복자가 되었으며, 1984년 한국 천주교 창설 200주년을 계기로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 순교자 102위와 더불어 시성되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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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스탕 신부 (원어명  Chastan, Jacques Honore)
Chastan, Jacques Honore(1803-1839). 모방(Maubant) 신부에 이어 서양인 선교사로서 두 번째로 입국하여 1839년 기해(己亥)박해 때 순교한 성인. 축일은 9월 20일. 한국 이름은 정아각백(鄭牙各伯).

샤스탕 신부는 1803년 10월 7일에 프랑스의 마르쿠(Marcoux)에서 태어나 1826년 디뉴(Digne)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월 신부가 되었다. 이듬해 1월 13일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같은 해 4월 22일 우선 마카오로 보내졌다. 마카오에 상륙하자 그는 한국 선교사를 자원하여 수락되었다.

그는 페낭(Penang)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거기서 교직생활을 하였다.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가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조선 입국을 위해 떠나게 되자, 샤스탕 신부는 자기도 평소에 원했던 조선으로 함께 동행하기를 주교에게 청하였다. 그의 청은 받아들여져, 1833년 5월에 조선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 후 3년간을 중국대륙과 몽고 · 만주를 거쳐 조선 국경까지 갔으나 그를 인도할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북경으로 돌아왔다.

그는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면서 2년간 산동(山東) 교우들을 돌보았다. 그동안 함께 조선 입국을 시도하던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주 땅에서 잃었고, 동료 신부인 모방신부가 1836년 1월에 먼저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으므로, 그의 통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1836년 12월 28일 모방 신부의 기별을 받고 변문으로 간 샤스탕 신부는, 유방제(劉方濟) 신부와 마카오로 유학가는 김대건(金大建) 등 세 소년의 신학생을 전송하던 조선 교우들을 만나, 함께 무사히 국경을 넘어 1837년 1월 15일에는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서울에 머무르면서 조선말을 배우는 한편 성사를 집행하다가 부활축일을 양근(楊根)에 가 있던 모방신부에게로 가서 함께 보낸 다음, 손을 나누어 각도의 교우들을 찾아보는 길에 올랐다. 상제옷을 입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먹을 것이 없어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공복을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를 듣고 미사를 드린 다음, 그 다음 날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떠나야 하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중 1837년 7월 중순에 지방에서 전교 중이던 모방 신부가 병을 얻어 중태에 빠져 서울로 이송되자, 샤스탕 신부는 곧 그에게로 달려가 병자성사를 주었다. 다행히도 모방 신부는 간병으로 건강이 회복되었으므로, 샤스탕 신부는 남쪽지방으로 다시 내려가 전교에 힘썼다. 그 무렵 제 2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그 해 12월말에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서울로 도착하니, 샤스탕 신부는 1938년 5월에야 서울로 올라와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


이로써 조선교구는 교회 창설 52년만에, 그리고 교구 설정 7년만에 비로소 주교와 선교사를 함께 모시게 되어 명실공히 모든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이에 주교와 샤스탕, 모방 두 신부는 함께 서울의 교우들을 돌보다가 샤스탕 신부는 다시 남쪽지방으로 내려가 전교에 힘썼다. 한편 그는 회장 한 사람을 부산(釜山)에 내려 보내, 류우꾸(琉球)지방의 전교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주교를 비롯한 세 서양인 성직자가 조선에 들어와 있다는 소문이 차차 퍼지게 되자 관헌에서는 당쟁의 여파까지 곁들여, 천주교의 탄압을 강화하여 1839년 기해년(己亥年) 봄에 많은 교인들을 잡아 피를 흘리게 했고, 외국인 선교사를 잡으려는 관헌의 추적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다. 이에 수원(水原) 남쪽 서해안의 외딴 곳에 피신한 주교는 점점 심해지는 박해소식을 듣고 지방에서 전교 중이던 샤스탕 신부와 모방 신부를 불러 이에 대처할 방도를 논의하였다.

주교는 이 자리에서 혼자만이 남고 두 신부는 청국으로 피신할 것을 종용했으나, 두 신부는 끝까지 함께 남기를 결심하여 다시금 각각 맡은 지방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주교는 배교자 김순성(金順成)의 간계로 그의 거처가 알려져 1839년 8월 10일 스스로 나아가 잡히는 몸이 되었다.


주교가 잡히기 전에 쓴 자수를 권하는 편지를 받은 샤스탕 신부는 곧 모방 신부에게 달려가 함께 자수하기로 결심하고 교우들과 외방전교회에 보내는 고별편지를 쓴 다음 9월 6일 홍주(洪州)로 나아가 관헌에 자수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두 사람은 주교와 함께 포도청에 수용되어 고문을 받다가, 9월 21일에 군문효수(軍門梟首)라는 극형으로 새남터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 때 샤스탕 신부의 나이는 37세로 조선 입국이래 2년 9개월만의 일이었다.

그의 시체는 다른 두 성직자의 시체와 함께 교우들의 손으로 신촌 노고산에 묻혔다가 1843년에 시흥(始興) 삼성산(三聖山)으로 옮겨 묻었으나, 1901년 11월 2일에는 명동 대성당 지하실에 모시게 되었다. 그의 거룩한 순교정신은 1925년 7월 5일, 로마 교황청에서 장엄한 시복식이 거행됨으로써 기해박해의 순교자 및 병오년의 순교자 78명과 함께 우리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복자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고, 그 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참고문헌] Ch. Dallet, Histoire de l'Eglise de Coree, Paris 1874 / Launay, Martyrs Fancais et Coreens 1838-1846, Paris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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