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률의 차트로 읽는 한국사 (4) >> 금서(禁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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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10-23 11:01 조회12,56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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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과 <즐거운 사라>의 조상들
베스트셀러는 힘이 세다. 잘 팔리고 널리 읽히는 책은 사람들에게 화두를 제공한다. 이야깃거리 말이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면 무쇠도 녹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베스트셀러만큼, 때로는 그보다 더 힘센 책이 있다. 바로 금서(禁書), 금지된 책이다. 사람들은 소망한다, 이 금지된 것들을. 어째서일까?
1980년대에는 시위가 있는 날이면 학교 들어갈 때 검문을 받아야 했다. 주로 신촌역이나 거구장 앞에서 이뤄졌는데 책가방까지 뒤졌다. 가방에서 금서라도 한두 권 나오면 당장 붙들려갔다. 닭장차에서 두들겨 맞고 탈탈 털리다가 난지도에 버려지곤 했다. 택시도 안 다니는 곳이라 나오려면 꽤 애먹었단다.당시에는 <공산당 선언>이나 <강철서신> 같은 이념서가 금서 목록에 올랐다. <한국공산주의운동사>처럼 엄연히 학술서지만 사회과학 냄새 물씬 나는 책들도 위험했다. 하기는 에드워드 카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조차 빨갱이 책이라고 재판 걸던 시절이었으니…. 학교 근처 서점 ‘서강인’에 수두룩하게 꽂힌 책들 때문에 등교하다가 닭장차에 올라타고 군대 가서 기무대에 끌려가야 했다. 금서라는 게 결국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였다.
1990년대를 강타한 금서는 고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였다. 1992년 마 교수는 연세대에서 강의하다가 경찰에게 체포당했다. 그의 소설 <즐거운 사라>가 음란물이라는 혐의였다. 책도 당국에 의해 판매금지 조치를 받았다. 이 사건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서강대에서도 격론이 벌어졌다. 예술이냐 외설이냐 판단하는 근거가 과연 무엇인지, 부적절한 성 묘사를 했다고 수업 도중에 체포해도 되는지 시비를 따졌다.
금서는 어쩌면 시대를 앞서나간 화두일지도 모른다. 금지한다는 건 그 화두가 누군가에게 위협이 된다는 뜻이지만, 언젠가는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군사정권 시절 수난을 당한 그 수많은 금서들이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의 자양분이 되지 않았는가. 그럼 한국사에는 어떤 금서들이 있었을까? 금지된 책 베스트 3를 선정했다.
[3위] <명기집략> 들여왔다가 목이 달아난 사람들
3위는 통역과 책장수들을 죽음으로 내몬 수입서, <명기집략(明紀輯略)>이다.
1771년 5월 영조가 노발대발하며 명을 내렸다. 청나라 사람 주린이 쓴 <명기집략>을 몽땅 불태우고 이 책을 조선에 들여온 자들을 처벌하라는 것이었다. <명기집략>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말 권신 이인임의 자식이라는 둥 창업의 정당성을 훼손하고 조선을 모욕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재위 47년째를 맞은 노왕 영조는 임금의 정통성에 조금이라도 흠이 되면 엄벌을 가했다. <명기집략> 사건도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 사신과 역관들이 줄줄이 불려가서 문초를 당했다. 주린(朱璘)과 이름이 같은 전 참판 엄린(嚴璘)은 이름자를 바꿔야 했고, 자기 책에 주린의 평을 실은 전 판서 이현석은 벼슬과 품계를 빼앗겼다.
영조에게 미운털이 박히면 끝장이었다. 늙은 임금은 노여움을 풀기 위해 피를 보고자 했다. 연암 박지원의 친구 이희천이 <명기집략>을 갖고 있다가 책장수 배경도와 함께 청파교에서 목이 잘렸다. 그들의 머리는 강변에 사흘 동안 내걸렸다. 단지 책을 거래하거나 읽었다는 이유로 끌려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또 주린의 문집을 바치라고 닦달했는데도 나오지 않자 무작정 통역과 책장수 100여 명을 붙잡아 벌하기도 했다. 죄인 아닌 죄인들은 손을 뒤로 묶인 채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서 거의 죽을 지경까지 갔다. 예조판서 채제공이 “없는 책을 어떻게 찾아내느냐”고 왕을 설득하지 않았다면 대참사가 벌어질 뻔했다.
이 사태는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항의의 뜻을 전하고 책의 판본이 소멸되었음을 확인하고서야 마무리되었다. 어찌 보면 사소한 오류에서 비롯된 일인데 영조의 집착이 큰 화를 부른 것이다. 사도세자의 비극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원체 극단적인 성품의 소유자였다. <명기집략> 파동 당시 나이가 78세에 이르렀는데도 좀처럼 너그러워지는 법이 없었다.
[2위] <정감록>, 현실 부정에서 민란의 원동력으로
2위는 지배층에 대한 저항정신의 표출, <정감록(鄭鑑錄)>이다.
“산천의 기운이 계룡산에 이르니 정씨의 800년 도읍지요, 그 뒤에 가야산으로 들어가니 조씨의 1000년 도읍지다.” 이 예언은 신분제와 가난에 억눌린 조선 백성들에게 한 줄기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조선 시대 금서 목록에는 도참서, 비결서 등 불온한 예언을 담은 책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정감록>은 조선 후기를 관통하며 민간에 크게 유행했다.
이 책은 무척 위험한 금서였다. 무려 새 왕조의 출현을 예고하지 않았는가. 실제로 <정감록>은 수많은 정변과 민란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누가 썼을까? 일설에는 정도전이 역성혁명을 정당화하고 원하는 곳으로 도읍을 옮기기 위해 지어냈다고 하는데 그다지 믿기지 않는다. 그가 조선의 설계자이면서도 죽어서 역적이 되었으니 이런 데 갖다 붙이기 좋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비참한 전란과 가혹한 수탈에 고통받던 백성들이 현실을 부정하는 예언이나 풍수설에 위안을 얻었으므로, 이를 여러 사람이 모으고 엮어서 책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찌 보면 지배층에 대한 집단적인 저항의 산물이 <정감록>이다.
19세기에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하자 이 책은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민란의 시대에 백성들은 궐기를 알리는 통문과 함께 <정감록>으로 정신 무장을 하고 가혹한 수탈에 맞섰다. 한편으론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며 이 책에 적힌 피난처로 들어가 숨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정감록> 같은 비결서는 시대를 가리지 않고 등장했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미래가 불안하면 사람들은 신비로운 예언이나 무책임한 장담에 귀를 기울이는 법이다. 거꾸로 사회가 투명하고 예측 가능하면 이런 책들은 굳이 금지하지 않더라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1위] 저승에선 여자도 관직 맡는다는 <설공찬전>
1위는 체제비판이 담긴 선비의 귀신 이야기, <설공찬전(薛公瓚傳)>이다.
1996년 16세기 문인 이문건의 <묵재일기>에서 채수가 쓴 <설공찬전>의 국문본이 발견되었다. <설공찬전>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금서로 알려졌다. <중종실록>에서 비중 있게 다룰 만큼 화제가 되었던 책이다. 궁금증을 유발하지만 전해지지 않았는데 그 실체가 일부나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채수는 세조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성종의 총애를 받아 34살에 대사헌이 되었다. 김종직의 제자로서 학문 실력도 뛰어나 <세조실록>과 <동국여지승람> 편찬을 주도하기도 했다. 1506년에는 중종반정에 참여해 공신 반열에 올랐다. 그 뒤로는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에서 여생을 보냈다. 사림파 학자이자 관리로서 명예로운 삶이었다. 그러나 채수의 말년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가 쓴 소설 <설공찬전>이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1511년 사헌부에서는 이 소설을 맹렬히 규탄하며 대선배 격인 채수를 교수형에 처하라고 주장했다. 도대체 죽을죄가 무엇이었을까?
<설공찬전>은 귀신 설공찬이 사촌의 몸을 빌려서 이승으로 돌아와 저승 체험을 들려준다는 이야기다. 저승에 가보니까 이승에서 적선(積善), 곧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들이 높은 품계를 받는다며 화(禍)와 복(福)이 윤회한다는 불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사헌부 관리들은 이를 문제 삼았다.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누구보다 모범이 돼야 할 자가 귀신과 불교 같은 이단에 빠져 풍속을 그르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명목상의 이유였을 뿐이다. 실제로는 소설에 깔린 체제비판이 화를 불렀다. 저승에서는 바른말 한 충신이 귀하게 대접받고, 나라에 반역해 왕이 된 자는 지옥에 떨어지며, 여자도 글재주가 있으면 관직을 맡는다는 내용이 임금과 신하와 사대부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에게, 공신들의 눈치나 살피던 관리들에게, 유교적 신분 질서를 추구한 사대부들에게 <설공찬전>은 께름칙한 구석을 찌르는 가시였다.
물론 그렇다 해도 사람들이 읽지 않으면 그만일 텐데 더 큰 문제는 소설이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한문소설을 국문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이 책이 하층민과 여성에게 널리 퍼졌다는 뜻이다. 자칫 통치 질서와 사회 기강을 흔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사헌부에서 굳이 극형을 거론한 이유다. 중종은 소설이 요망하고 허황되지만 지은이를 처벌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단, 이 책을 수거해 불태우고 숨기는 자는 법으로 다스리도록 했다.
채수는 목숨을 보존하기는 했지만 체면이 구겨지고 말았다. 그의 지위를 고려하면 사회적 파산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선각자로서 채수가 보여준 용기와 통찰은 오늘날 후손들에 의해 재평가받고 있다. 어쩌면 금서로 찍히는 게 꼭 손해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권력은 언젠가 저물고 시대는 바뀌기 마련이니까.
※ 권경률 (사학 90) - 역사 칼럼니스트, 월간중앙 필진.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간다. 유튜브·페이스북·팟캐스트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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