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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차트로 읽는 한국사 (1) "얼굴이 백신? 춤과 노래로 역병 퇴치한 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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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7-29 10:31 조회14,2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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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의 일상적인 관심사에 감춰진 한국사 이야기를 차트 순위로 살펴본다. 첫 번째 주제는 ‘코리안 드림’이다.

요즘 모교에 가보면 외국인이 많이 눈에 띈다. 해외에서 온 학생들이 전공 수업에 들어가고, 한국말을 배우는 게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세상이다. TV를 보더라도 프로그램마다 외국인들이 유창한 한국말로 맹활약하고 있다. 2019년 기준으로 한국 체류 외국인이 250만 명을 넘어섰다. 이 땅에 ‘코리안 드림’이 영글고 있는 것이다.

유목민족 격언에 “성을 쌓으면 망하고 길을 열면 흥한다”라는 말이 있다. 문화가 빛의 속도로 이동하고 섞이는 요즘 시대에는 이런 개방적인 마인드가 필수다. 한때 단일민족 국가의 정체성을 가졌던 한국도 어느새 수많은 외국인들이 공부하고, 일하고, 거주하는 다문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한국사를 살펴보면 다문화의 내력이 의외로 깊다. 이 땅에서 코리안 드림을 이룬 외국인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누가 한국사를 무대로 꿈을 펼쳤을까? 당시의 파급력과 현재적 의미를 두루 살펴 코리안 드림 베스트 3를 뽑아봤다.

 

[3위] 사야가 혹은 김충선, 일본군 용병대장의 변신

 

3위는 드라마틱한 인물이 차지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위해 싸운 일본인 장수, 김충선(金忠善)이다. 일본 이름은 ‘사야가(沙也加)’로 알려져 있으며 원래는 침략군의 선봉장이었다. 1592년 22살의 나이로 휘하 부대를 이끌고 조선에 왔다. 하지만 사야가는 상륙한 지 며칠 만에 자발적으로 투항했다. 뒤에 전황이 불리해지자 항복한 왜인들과 달리 일본군이 압도하던 초기에 그야말로 ‘소신 지원’을 한 것이다.

후손들이 간행한 문집에 따르면 그는 평소 ‘인의(仁義)의 나라’ 조선의 문물을 동경한 나머지 그 백성이 되고자 했다고 한다. 이것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따라 나중에 지어낸 투항의 변(辯)이었을 것이다. 실제로는 일본의 전국 통일 과정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반발해 조선의 편에 섰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일본에서는 그가 ‘사이카슈(雑賀衆)’의 일원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사이카슈는 와카야마현을 중심으로 활동한 용병집단이었다. 그들은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받아들인 철포(조총)를 전쟁터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해 명성을 떨쳤다. 이 용병 철포대에 여러 차례 고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잡고 눈엣가시 같았던 사이카슈를 정벌해 궤멸시켰다. 몰락한 사이카슈 중 일부는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건너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대에 맞섰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사야가라는 것이다. 사야가는 사이카슈에서 따온 가명으로 추정된다.

그는 전쟁 초기에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올라간 일본군의 배후에서 적을 괴롭히는 임무를 맡았다. 1593년 이후 강화협상이 진행될 때는 수하들을 조선 각 도에 보내 조총 및 화약 제조술을 전수했다. 이순신 장군도 그의 도움을 받아 화포를 개량하고 조총을 만들었다고 한다. 조선군의 전력 향상에 크게 기여한 셈이다. 도원수 권율의 주청으로 그 공을 인정받은 사야가는 선조 임금으로부터 자헌대부의 품계와 함께 성명(姓名)을 하사받았다. 본관 성씨는 “바다 건너온 모래를 걸러 금(金)을 얻었다”며 ‘김해 김(金)씨’라 했고, “충성스럽고 착하다”는 뜻으로 이름을 ‘충선(忠善)’이라고 지었다.

임금의 은혜에 김충선은 더욱 분발했다. 1597~1598년 그는 울산성, 순천성, 의령 등지에서 왜적들과 싸우며 전공을 세웠다. 조선에 항복한 왜병들, 곧 항왜(降倭) 부대를 조직해 적의 포위망을 뚫고 공성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 일본군 맹장들에게 항복을 권유하기도 했다. 일본과의 7년 전쟁이 끝난 후에는 진주 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해 달성군 우록동에 정착했는데, 여진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다시 북방 근무를 자원해 10년간 삭풍을 맞으면서 변방을 지켰다.

‘충성스럽고 착한’ 김충선의 행보는 평생토록 이어졌다. 1624년 이괄의 난과 1627년 정묘호란을 맞아 장수로 출전해 활약했으며, 1637년 병자호란 때는 66세의 노구로 광주 쌍령에서 청나라군에 맞서 분전했다. 1642년 김충선이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달성군에 그의 위패를 봉안한 녹동서원(鹿洞書院)이 세워졌다. 유생들이 상소하고 인조가 현판을 하사한 사액서원이었다. 한 일본인의 헌신적인 충절에 ‘인의의 나라’가 보답한 것이다.

  

[2위] 태조 이성계의 의형제이자 조언자, 이지란

 

한국사 코리안 드림 베스트 3! 2위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의형제이자 개국 일등공신인 이지란이다. 그는 원래 여진인으로 본명은 퉁두란이었다.

퉁두란은 고려 공민왕 때 귀순해 함경도 북청에 뿌리를 내렸다. 용모가 단정하고 여자처럼 아름다웠지만, 싸움에 있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했다고 한다. ‘함흥 군벌’ 이성계는 강에서 사슴 사냥하는 퉁두란에게 반해 형제의 의를 맺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전주 이씨 성을 주고 경처(京妻) 강씨의 조카와 혼인시켜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두 사람의 의기투합은 전장에서 빛을 발했다. 1380년 이성계는 황산에서 왜적 2만 대군을 격파하며 일약 전국구 스타로 떠올랐다. 이 싸움의 압권은 적장 아지발도를 잡는 장면이었죠. 아지발도는 신묘한 기마창술로 아군의 사기를 꺾은 장수였다. 전세를 뒤집기 위해 반드시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이성계는 신궁답게 활을 쏘아 아지발도를 잡으려고 했지만 상대의 투구와 갑옷이 견고해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이지란이 나서 호흡을 맞췄다. 먼저 이성계가 적장의 투구 꼭지를 화살로 맞췄다. 그 바람에 투구가 벗겨지는 찰나의 순간 이지란이 쏜 화살이 아지발도의 입을 꿰뚫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환상의 호흡이었다.

아지발도가 쓰러지자 왜적들은 급격히 무너졌다. 그들은 패주하여 산으로 도망갔다가 고려군의 포위 섬멸전에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고려 전역을 휩쓸며 닥치는 대로 백성들을 약탈하고 살육하던 왜구들의 기세가 한풀 꺾이고 말았다. 이성계와 이지란의 위명 덕분에 가별초 군단은 가는 곳마다 승리하며 불패의 전공을 쌓았다. 왜구는 물론 홍건적, 몽골 잔당, 여진족 등 툭하면 고려를 건드려온 외적들을 확실히 제압한 것이다.

이지란은 모친상 중에도 출전하여 이성계를 도왔다. 덕분에 이성계는 나랏일을 결정하는 도당(都堂)에 입성하고 변방의 무장에서 중앙정계 거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이성계가 정치인이 된 후에도 이지란은 조언자로 활약했다. 이성계가 의형, 이지란은 의제였지만 나이는 이지란이 네 살 더 많았다. 어린 의형이 고려 우왕과 사냥을 나가 활쏘기 솜씨를 과시하자 이를 넌지시 꼬집으며 자중하게 만들기도 했다. 공연히 정적들의 표적이 되지 않도록 단속하는 한편 윗사람의 심기를 관리하는 처세술을 가르쳐준 것이다.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감행하여 권력을 잡을 때도 이지란은 곁에서 의논 상대가 되어주고 큰 결단을 도왔다. 마침내 1392년 이성계가 새 나라 조선을 창업하면서 그는 개국 일등공신에 오르고 청해군에 봉해졌다. 대업을 이룬 후에도 의형제의 맹약은 이어졌다. 이지란은 재상과 군사령관을 맡아 승승장구했지만 1398년 왕자의 난으로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나자 관직을 정리하고 불가에 귀의했다.

이지란은 1402년 72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의 무용담은 500년 세월이 흘러 조선이 망한 뒤에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1910년대 만주 독립군이 부르던 ‘용진가’라는 노래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동명왕과 이지란의 용진법(勇進法)대로 / 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 쳐보세. / (후렴) 독립군아 용감력을 더욱 분발해 / 삼천만 번 죽더라도 나아 갑시다.”

 

[1위] 처용, 한바탕 춤과 노래로 역병을 물리치다

 

코리안 드림 이룬 역사 속 외국인, 1위는 바로 전염병을 쫓아내는 신라의 기인 처용이다. 신라 헌강왕은 지금의 울주에서 그를 만났다. 처용은 기이한 몸짓과 괴상한 복장으로 시선을 모았다. 임금의 덕을 기리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 환심을 샀다. 헌강왕은 그에게 급간 벼슬을 내리고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삼아 주었다. 그런데 처용의 노래와 춤은 여간 신비로운 게 아니었다.

  

서울 달 밝은 밤에 / 밤늦도록 놀다가

들어와 자리 보니 /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 둘은 누구 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만 / 빼앗긴 걸 어쩌리.

 

‘처용가’는 역신이 아내와 동침한 것을 한탄하는 노래다. 역신(疫神)은 오늘날의 전염병을 말한다. 그것이 외간남자로 변신해 아내에게 붙은 것이다. 처용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자, 

역신은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 그에게 무릎 꿇고 약속한다. 앞으로 처용의 형상이 있는 곳은 절대로 범하지 않겠다고. 그때부터 사람들은 처용의 얼굴 그림을 대문 앞에 붙여서 역신, 즉 전염병의 침범을 막았다고 한다.

이 풍습은 오랜 세월 전해져 내려와 조선에서는 섣달그믐 전날 밤에 궁궐에서 처용무를 추도록 하여 악귀를 쫓아내고 전염병을 예방하고자 했다. 이 처용무에 등장하는 처용의 탈은 기괴하기 짝이 없다. 피부는 붉은색이고, 이는 흰색이며,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그래서 처용이 아라비아 상인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헌강왕이 처용을 처음 만난 울주는 당시 국제 무역항이었다. 특히 아라비아 상인들이 가져온 향료가 인기상품이었다. 어쩌면 처용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향료를 팔다가 왕의 눈에 띈 게 아닐까? 그렇다면 옛 사료들이 언급한 처용의 정체도 재해석이 가능하다. <삼국유사>는 ‘용의 아들’, <삼국사기>는 ‘산해(山海)의 정령’, <고려사>는 ‘신인(神人)’이라고 처용을 소개하고 있다. 어쩐지 향료 브랜드로 읽힌다. 아니면 춤이나 노래의 제목일 수도 있겠다. 뭐가 됐든 그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인물인 것은 틀림없다.

처용은 큰 공을 세우거나 높은 벼슬을 한 건 아니지만 노래와 춤으로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외국인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처용을 한국사 코리안 드림 차트 1위에 올린다. 아라비아에서 신라까지 바다를 건너와, 환상적인 노래와 춤으로 신라인들의 엔돌핀을 대폭 상승시켰으며, 무엇보다 얼굴을 백신 삼아 전염병 예방에 앞장섬으로써, 국민 건강증진에 크게 이바지했으므로 자격은 충분하다. 1위에 오른 김에 한바탕 처용무로 후손들 괴롭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 좀 퇴치해주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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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경률 (사학 90) - 역사 칼럼니스트, 월간중앙 필진.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간다. 유튜브·페이스북·팟캐스트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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